[싱코페이션, 김선오]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논바이너리: 우인영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댓글 0건 작성일 2026-09-21 14:04본문

김선오, 『싱코페이션』, 도서출판 아시아, 2024.
#시집 #논바이너리 #화자중점 #성별이분법 #경계공간 #선택
이 길에서는 저 길을 보여줄 수 없어요.
설명할 수도 없어요.
그냥 따라와요 이렇게.
― 「아니에요」, 『싱코페이션』
김선오의 세 번째 시집 『싱코페이션』의 제목이 무슨 뜻인지 찾아보았다. 한 마디 안에서 센박과 여린박의 규칙성이 바뀌는 현상을 뜻하는 음악 용어이며 음악에서 예상되는 리듬의 위치를 바꾸는 기법이다. 우리말로는 ‘당김음’이라고 한다. 규칙적인 리듬 속에서 변주를 주어 원래 강세가 올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둔다는 것 자체를 시인의 태도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시인의 변주를 위해 듣기 시집을 펼치면 화자는 “그냥 따라와요”라고 말한다. 이 목소리는 우리를 안내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화자의 그 목소리를 따라 기꺼이 화자의 세계로 들어갔다. “따라해보세요. 폐를 펼쳐보세요. 펼친 만큼 세계가/들어옵니다.”, “펼쳐봐/이미 펼쳐진 것을/펼쳐보라고”(「나는 자꾸 내가 되려고 해서 번거로웠다」)라는 구절에서도 화자는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바로 그 말에 나는 시집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느낀 화자의 세계는 이분법적 경계가 흐릿한 ‘가능성’의 세계다. 특정한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세계. 아예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는 세계. ‘펼쳐보라’는 화자의 말은 이미 이 세계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보라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더 자세히 보라고 하는 듯하다. 나는 세계를 낱낱이 펼쳐보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1.
새는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자신의 시체를 보여주었다.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소년이거나 소녀이거나 둘 다 아니라거나 하는 문제보다, 살아 있는 몸과 죽어 있는 몸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크고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실은 가지고 있다기보다 놓치고 있는 쪽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여자도 남자도 다 놓치고 있듯이. 새는 날갯죽지 아래로 삶과 죽음이 동시에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곤란했을 것이다. 나는 대충 ‘논바이너리’(바이너리binary의 부정형에 불과할지언정)라는 단어를 써먹거나 나의 대명사를 they라고 불러달라거나 하는 식으로 존재를 호소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상태를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 1~2연
내가 김선오의 시집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시는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다. 화자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정체화하지 않은 논바이너리에 가깝다. 논바이너리라고 확정하지는 않는다. 태어날 때 의사에게 부여받은 지정 성별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젠더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화자의 존재는 이미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화자는 “살아 있는 몸과 죽어 있는 몸을 모두 가지고 있”는 새에게 왜 그런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묻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는 남성이거나 여성이거나 둘 다 아닌 정체성보다 새의 정체성이 더 크고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정체성에 대해 ‘문제’라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화자는 스스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화자는 자신이 “여자도 남자도 다 놓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논바이너리’나 ‘they’라는 단어로 이름으로 “존재를 호소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새가 가진 문제가 드러난다. 몸에서 “삶과 죽음이 동시에 빠져나가고” 있는 새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화자에게도 “제일 어려웠던” 것은 “이름 짓기”(「싱코페이션」)였기에 새의 고통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지만, 이름을 대신 붙여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새는 유령도 좀비도 아니었고 그냥 자기 시체를 가지고 있는 새였다. 새는 시체를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을까? 대충 두었다가 부패해 끔찍한 냄새가 난다면 들키기 십상일 것이고 경찰에 잡혀갈지도 몰랐다.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 앞에서 새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새를 죽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범죄가 아닙니다. 동물보호법 위반일까요? 하지만 맨날 치킨을 먹는 사람들은요? 게다가 이 시체는 저 자신이기도 합니다.”
도시에 살지 않는다면, 새에게는 새만의 무인도가 있어 그 섬에 자신의 시체를 오백 구쯤 펼쳐놓았을지도 모른다. 햇볕에 말라가는 새의 시체들…… 새는 해변에 널려 있는 시체들 위를 비행하며 모두 잘 마르고 있나, 그런 걸 살펴보았을지도 모르고…… 그중 하나의 빠진 눈알을 다시 끼워 넣었을지도 모르고……
내가 여성학 교수님을 찾아갔듯이, 새는 언어학 교수님을 찾아간 적이 있다고 했다.
“자네 이름은 새인데 영어로는 bird이거나 sae이거나 say일 수도 있고 그중 하나를 택하면 되는데, 불어로는 Séfksms 사실 역시 기억하게나.”
세상에는 타밀어도 히브리어도 벵골어도 있었지만 새는 제2외국어까지만 공부하기로 했다. 할 줄 아는 언어가 많아진다는 건 해외여행 갈 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늘어난다는 뜻이었고 곧 세계 어디에서든 말 같은 것이 들릴 때에 귓속의 침묵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새는 대부분의 외국어를 쏼라쏼라 정도로만 번역하고 싶었다.
―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 3~7연
새는 “그냥 자기 시체를 가지고 있는 새”일 뿐인데도 벌써 곤란한 일이 많다. 자기 자신이기도 한 시체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충 보관하면 경찰이 들이닥칠 수도 있다. 경찰로부터 자신의 시체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길어진다. 그 시체가 나라고 한 마디만 해도 된다면 어떠한 고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논바이너리예요, 라는 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한 문장으로만 말해도 되는 세상이었다면 말이다.) 화자는 새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방식으로 새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8연에서 언어학 교수는 새에게 여러 이름을 제안하고 “그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는 그 많은 언어를 다 공부하거나 그중 ‘하나’만을 선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할 줄 아는 언어가 많아”지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늘어”나기 때문이며, “귓속의 침묵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계에서 들리는 말들이 썩 듣기 좋은 말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누군가는 방어적인 태도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퀴어 당사자로서 퀴어 혐오가 만연한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자세이기도 하다. 슬프게도.
자신은 삶과 죽음 사이의 논바이너리 같은 거라고, 경계는 어떤 종류의 침묵이라고. 새는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시체는 어디서 났니? 묻지 않았다.
실은 우리가 양쪽을 놓치고 있다기보다 놓아버린 쪽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편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새는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새의 날개를 두드렸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 8~10연
세계가 모르는 사실 중 하나가 여기 있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사실. 화자와 새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세계에서 이분법적으로 구분 지어버린 경계는 화자에게 흐릿할 수밖에 없다. 새는 자신이 “삶과 죽음 사이의 논바이너리” 같은 거라고 말하며, “경계는 어떤 종류의 침묵”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자신을 향한 수많은 질문들(화자가 묻지 않은 “시체는 어디서 났니?”와 같은 질문)에 대해 답을 내놓지 않겠다는 어떤 선언으로 읽었다. 어떤 대답을 하든 그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사람의 대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침묵을 단순한 회피로 받아들인다면 새의 고통을 너무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화자는 2연에서 말했던 ‘놓치고 있다’를 ‘놓아버렸다’는 말로 바꾼다. ‘양쪽을 놓치고 있다’고 말하면 놓친 사람의 잘못이 되지만 ‘놓아버렸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 된다. 이를 통해 화자는 주체로서 존재한다. 이 시의 제목처럼, 경계에 서 있는 것은 화자의 ‘미학적 선택’이다. 그편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 역시 주체적 선택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선택을 한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 위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화자는 자신처럼 흐릿한 경계에 존재하는 ‘새’와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위치에서, 서로의 존재를 충분히 인식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남는다. 주류에서 밀려나고 밀려나서 그 위치에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라는 선언을 ‘새’를 경유해서 발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화자의 종이는 자기 발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기록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화자는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새’가 “자신의 시체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어깨와 날개를 두드려주는 대목에서는 따뜻한 리듬이 느껴진다.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 라는 말을 서로에게 건네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우리의 존재가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위로가 담겨 있는 듯하다.
‘새’가 말했듯이 “경계는 어떤 종류의 침묵”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세계에서 소외시키고 배제한 것들은 언제나 경계에 존재하고 있고, 그곳의 목소리는 경계 안쪽에서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화자는 “피의 이미지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이 세계를 감각할 수밖에 없었다. 화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으니 화자의 시선에서 세계는 어떤 모습인지 조금 더 살펴보자.
2.
1)
2)
3)
4)
5)
6)
7)
어린 羊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1) 로션을 바르다 창밖을 보았을 때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빌딩 사이로 솟구쳐 파란 하늘을 비행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닐봉지는 추락할 듯 휘청거리다 다시 날아오르기를 반복했다. 로션을 마저 바르려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창밖을 보았을 때 비닐봉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2) 꿈의 시작을 기억할 수가 없다. 기억 속에서 나는 이미 꿈의 한복판에 있다. 사라진 꿈의 도입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지우개로 지운 종이에도 지운 자국은 남아 있다.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물건도 어딘가에 발견되곤 한다. 사라진 꿈의 도입부는 꿈으로부터 내가 떠나오는 순간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할 수 없는 꿈의 앞부분을 나의 현실로서 살고 있는 것이다. 지우개로 지운 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워진 글자가 보인다.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3) 할머니가 코피를 흘리고 있다. 왜 그런 종류의 장면이 내 삶의 첫 번째 기억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할머니는 분명히, 코피를 흘리고 계셨고 수건 같은 것으로 코를 막으려 했지만 붉은 피가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네 살 아니면 다섯 살이었을 것이다. 기억이 시작되었다. 피의 이미지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4) 언제부터 여기에 와 있었는지 모르겠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5) 가청음역대 소리의 주파수를 서서히 높이면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고주파수가 되었다가 마침내 빛이 된다. 빛은 어떤 의미에서 한때 우리가 들었던 소리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구성하는 데이터를 소리로 변환하면 끔찍한 잡음처럼 들린다. 아름다운 음악을 구성하는 데이터를 이미지로 변환하면 형편없는 낙서처럼 보인다. 아름다움과 끔찍함 사이에 어떤 비약이 있었던 것일까? 우주가 무無를 비약하여 도착한 장소가 여기인가?
6) 눈밭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책상이 놓여 있다. 그중 하나의 앞에 내가 앉아 있다. 나에게 책 한 권, 종이 한 장, 볼펜 한 자루가 있다. 옮겨 적으라는 뜻인가 보다. 책을 펼친다. 읽는다. 받아쓴다. 그러나 볼펜에는 잉크가 없다.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다. 그러나 읽는다. 받아쓴다.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다. 펜촉의 흔적이 음각으로 남는다. 남지 않을 때도 있다.
7) 羊이라는 한자에는 ‘상서롭다’ 그리고 ‘배회하다’라는 뜻이 있다.
―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전문
내가 두 번째로 가장 좋아하는 시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을 소개하고 싶다. 이 시에서 화자는 “어린 양”처럼 배회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눈이 내리는 형태로 쓰인 각주에는 제목과 다르게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진눈깨비”의 아름다움이 벌써 느껴진다.
1번 각주에는 “새”의 이미지가 나온다. “추락할 듯 휘청거리다 다시 날아오르는” 비닐봉지의 이미지는 “새”로 변주되며, 언제든 다시 날아오를 힘을 가진 새가 자유롭게 비행하는 모습을 보니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의 새가 떠오른다. 우리가 만났던 새가, 집으로 돌아갔던 그 새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새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소수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어디 특별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로션을 바르다 창밖을 보았을 때”에도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당연하지만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다.
화자는 “기억할 수 없는 꿈의 앞부분”을 현실로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기억나지 않았던 꿈을 새로운 현실로 마주하면서 새로운 나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워진 자국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런 화자의 첫 번째 기억은 할머니가 코피를 흘리는 장면이다. 이 기억에 대해 쓰인 시가 또 있다.
그냥 빛이랑 놀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들어왔어요
현관문이 열렸는데
글쎄 할머니가
코피를 흘리고 계신 거예요
코피를
줄줄
빨간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어요
할머니가 이쪽으로
달려왔어요
수건인가 행주인가
꺼내서 코를 막고
그런데 그 밑으로도
뚝뚝 떨어지고
싱크대에도 할머니 흰옷에도
네모난 빛의 안쪽에도 핏방울이
떨어졌어요
(…)
제가 다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근데 저는
피를 그때 처음 봤거든요?
어린애가 피를 볼 일이
딱히 없었을 거 아니에요?
피가 너무 빨갛고 그래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어요
(…)
나는 처음 피를 보았다
내 삶의 첫 번째 피였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빛 속으로 떨어지는 피
저는 그런 건 그날 이후로 본 적이 없어요
― 「눈꺼풀 안쪽의 붉음」 中
할머니는 코피를 흘리신다. 계속 흘러서 “빨간 피가 바닥으로/뚝뚝 떨어”(「눈꺼풀 안쪽의 붉음」)지고, “싱크대에도 할머니 흰옷에도 네모난 빛의 안쪽에도 핏방울이/떨어”진다. 이 모든 기억에 대해서 화자는 “제가 다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제 기억은 그래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기억 속 “첫 번째 피”를 기록한다. “놓친 부분도 있었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자는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서 화자의 두 번째 피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건 어쩌면 생리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논바이너리(에 가까운)인 화자에게 빨간 ‘피’는 자꾸만 “빛 속으로 떨어지는 피”이며, ‘빛’의 세계에 충격을 가하는 물질이었을 것이다.
화자가 가진 ‘빛의 세계’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의 5번 각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고주파수 소리가 빛이 된다. 빛은 “한때 우리가 들었던 소리”이자 아름다운 풍경과 음악을 구성하던 소리다. 시집 전반에서 ‘빛’에 대한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빛은 눈꺼풀 바깥에도 있고 안쪽에도 있다. 네모난 모양이기도 하다. 화자는 할머니가 오기 전까지 “네모난 빛이랑 놀”고 있었는데 그 빛 안으로 할머니의 피가 떨어지며 어떤 균열이 생긴다. 「어둠 속에서는 잘 구별되지 않는 것들」의 “눈꺼풀이 빛의 웅덩이가 되었다”는 구절과 「눈꺼풀 안쪽의 붉음」이라는 제목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면, 빛의 웅덩이였던 눈꺼풀에 핏방울이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화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아름다움과 끔찍함 사이에 어떤 비약이 있었던 것일까?” 그 균열은 화자가 ‘경계’로 들어서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로 인해 화자의 세계가 뒤집어지고 펼쳐지고 접히는 것 아닐까.
화자의 세계는 눈꺼풀 안쪽/바깥과 닮아 있다. 우선 화자는 단일한 ‘나’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로서 존재한다. 단순히 화자가 논바이너리이기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그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화자는 자신을 지칭할 때 ‘나’라고 지칭하기보다 ‘우리’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가 등장하면 꼭 ‘너’가 등장한다. 그럴 때 ‘너’는 ‘나’가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다른 것을 해주기도 하고(「내가 이렇게 쓰고 있으면」), ‘너’는 “너의 몸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빛과 어둠”을 보기도 하고, “아직 너로 결정되기 이전의 만남”들을 보고,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주변의 감각들을 “동시에” 느끼면서 “영원히 떠지지 않는” 자신의 “눈꺼풀을 본다.” 이때 눈꺼풀 안쪽을 보는 사람은 ‘너’이고, 바깥을 보는 사람은 ‘나’다. 화자가 지금껏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어둠은 안쪽, 빛은 바깥을 향해 있는 것이다.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언니일지도 모르는 친구”(「부드러운 마중」)가 되기도 하는 다수의 화자이기 때문에 양쪽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양쪽 모두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으로 돌아가보자. 화자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언제부터 여기에 와 있었는지” 모른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화자는 “모르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모르는 거리”를 걷고 “모르는 벽돌 모르는 사람 모르는 공이 날아”(「어떤 뉘앙스」)오는 세계, 즉 알 수 없는 세계에서 화자는 책상에 앉아 있다. 종이와 잉크 없는 볼펜이 주어져 있다. 잉크가 없어서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데도 화자는 ‘쓰기’라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흔적이 남든 남지 않든 그것은 화자에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읽고 쓰기’라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화자에게 ‘읽기’란, 눈앞의 놓인 것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화자는 무엇이든 펼쳐보는데, 그것이 책이 아니어도 펼쳐본다. 그것은 ‘수영장’(「약하고 어수선한 삶」)이 될 때도 있고, ‘새’와 ‘폐’(「나는 자꾸 내가 되려고 해서 번거로웠다」)가 될 때도 있다. 결국 이 세계 자체를 펼쳐보는 셈이다. 펼칠 수 있다는 것은 접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막 없음」에서 ‘집’을 접는다.) 이처럼 화자는 자신의 세계를 펼치고 접어보면서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이 세계를 종이 위에 옮겨 적고 펼치고 접어보면서 일상의 장면들을 낯설게 보고,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낯설게 보기’란 어느 창작자나 시도하는 것이지만, 화자는 자신의 ‘미학적 선택’대로 스스로를 낯선 경계선에 위치시킨다.
“지우개로 지운 자국”(「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보려고 하는 화자의 세계는 “한 세계가 끝나고 나면 다른 세계의 영원이 다시 시작”(「산책법」)되는 세계다. 화자는 “그 세계의 구석에서도 엉망진창으로 칸타타를 연주하는 안경 쓴 청년이 야마하 전자피아노의 파샵 건반을 고치려고 애를 쓰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화자가 세계의 망가진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고치려고 애를 쓰”는 행위이기도 하다. 자신이 쓰고 있는 이 종이는 “무형으로 가기 위한 잠깐의 유형/임시적인 유형”(「무형 선물 교환 파티」)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기억하는/형체가 있는/바로 그 얼굴로” 가기 위해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보기를(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이게 아니면 달리 무슨 삶이 있겠어.” 화자를 알고 나서 이 세계를 보면 다시 보이는 삶들이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