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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외, 유성원] 깨진 몸-킨츠기로 말하기: 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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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작성일 2026-05-3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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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난다, 2025.

유성원,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 난다, 2025.

유성원, 「아빠, 안에 싸도 돼요?」, 『계간 문학동네』 2026 봄(통권 126), 문학동네, 2026.





#MSM #안건강 #몸 #언어 #욕망 #인용 #쓰기








There's a certain point the body can't come back from. _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 “Kintsugi”1)







  말을 잘하고 싶다. 내가 느끼는 것을 뾰족하게 전달하고 싶다. 빠지거나 더해지는 것 없이 정확하게 타인에게 도달했으면 좋겠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입을 열기 전에 내 몸의 감정, 감각, 욕구가 정당한 것인지 의심부터 했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느끼는 것,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렸다. 몸에 관해 말하기 전에 몸을 삭제했다. 가령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혹은 무엇을 느껴도 되는지 생각하느라 즉시 반응하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울거나 화가 난 상태로 잠에 못 들었다. 조각난 몸으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MSM2) 퀴어 활동가 유성원은 몸을 글 전면에 내세운다. 그는 몸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로서의 몸을 새로 만들어내는 듯하다. 그의 몸-텍스트를 경유해 나는 무언가를 말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유성원이 발표한 두 권의 단행본, 산문집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소설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와 단편소설 「아빠, 안에 싸도 돼요?」를 토대로 몸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장르적으로 다른 작품들(에세이와 소설)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이야기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그 경계를 다룰 만한 깜냥이 되지 않고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냥 대충 (바르트가 프루스트를 읽은 방식처럼) “성원씨가 쓴 성원씨”를 읽는다고 하자(그렇다고 했을 때 개별 텍스트들의 몸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같은데, 그 경계를 뚜렷하게 하는 것도 이 글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 글은 텍스트를 비약하고 오독하며 쓰인 틀린 글이 될 것이다.3)




1. ‘안 건강’을 ‘선택’하(되)는 몸


  우리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무엇도 갖지 못한 채 태어나버렸다. 모든 것은 내 통제 밖에 있다. 몸은 그중에서도 제일 간사한 배신자다. 몸은 주체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은 원하는 것은 더럽게 많으면서도 제대로 만족할 줄도 모를 정도로 까탈스럽고 이기적이다.

  우리는 몸이라는 한계 속에서 “선택―”다. 선택? 이때 우리는 “선택하는” 것일까,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엄밀하게 능동적인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동사를 잘못 쓰고 있는 것 아닐까. 당연히 언어는 실체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니까 전략적으로 누락하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제한적인 언어 체계는 우리의 몸이 가진 한계와도 같다.

  유성원은 그러한 몸-텍스트로서 작품에서 피동 표현을 강박적으로 사용한다.(“건강이들을 목격된 안 건강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자살당한답니다.”4)) 그의 언어는 단순히 선택을 납작하고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성과 예속성이라는 이분법에서 몸을 한편에 두지 않는 것이다.


  나는 중년 남자들 좆을 빨거나 남자와 항문으로 섹스해서 죽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 일들은 누구라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선택에 불과하다. 죽고 싶어지는 것은 이런 일을 모르고 살 수 있거나 사람들과 함께여서 ‘외로워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이들을 볼 때다. 광화문으로 걸어가면서 오늘 한 일이 선택이었음을 생각했다. 사람을 만나는 대신 사우나에 갔고 찜방에 갔다. 사람들과 함께하면 그것은 겉보기에 외로워 보이지 않을 뿐이고 사실은 아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뭘 골라도 이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남자의 좆을 빤다고 누군가 놀랄 순 있다. 하지만 그것에 놀란다면 내가 1955버거를 혼자 앉아 먹다가 불이 꺼지는 그 순간도 알아야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공평함이다. 내가 찜방에 가서 오늘 몇 명의 좆을 빨았는지 말하려면 혼자인 이유도 말해야 한다. 그게 선택이라는 것도._p.18,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선택은 내가 맺어온 관계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우리는 그것이 마치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공유하는 진공 상태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러나 “선택”에는 그것이 등장하기 전에 예기치 못한 것들이 들러붙는다. 성취, 감정, 행동, 말, 자본 등 선택 전에 내가 욕망하지 않던 몫들을 책임지라고 요구받는다. 가령 몸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방식을, 그러니까 ‘안 건강’을 욕망하고 선택할 수 있다. 그러한 욕망은 개별 몸(과 그것의 시간적, 공간적 위치성)에 따라 다른데, 개별 욕망의 맥락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것의 정당성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사회는 ‘안 건강’을 욕망하는 몸을 ‘비정상’이라고 규정한다. 실제 그러한 몸이 어떠한 상태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안 건강’한 몸은 “건강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피해자성’으로 설명되어야 동정이라도 얻는다. 만약 ‘안 건강’을 선택한 몸이라면 멍청하고 더럽고 역겨우니까 사라져야 한다. 

  사회적으로 ‘건강한’ 선택만이 존중받는 것처럼,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도 비슷한 규범성이 존재하는 듯하다. 가령 소설의 배경이 되는 ‘찜방’도 그중 하나다.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했을 당시 감염인의 경로에 게이들의 크루징 장소인 찜방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찜방은 사회적으로도,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양쪽 어느 곳에도 들지 못할 때, 몸은 이중으로 실패한 몸이 된다. 제도 안에도, 공동체 안에도 들지 못한 것 같다는 실패. 나 또한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그러한 실패를 감각한다. 이러한 몸은 언어를 갖기 어렵다. 그저 ‘안 건강’한 몸이라고 설명될 뿐이다.

  유성원은 몸을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려고 한다. 그는 ‘안 건강’을 선택한 몸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1955버거를 혼자 앉아 먹다가 불이 꺼지는 그 순간”을 알아야 공평하다고 말한다. 맥도날드에서 함께 어울려 노는 게이들이 혼자 앉아 있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다가, “누구는 평생을 살아도 할 수 없고 하지 않을 일들을 짧은 오후와 밤 사이에” 하는 자신과 그들이 “완전히 다른 종족이라는 걸” 깨닫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 막차를 제시간에 타기 위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감자튀김을 먹다가, 자신 쪽 천정 조명이 꺼졌는데도 자리를 옮기기 민망해서 빨리 다 먹기 위해 노력하던 순간.5) 나는 이 삽화에서 ‘안 건강’한 몸이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 수치심, 막막함, 초조함을 느꼈다. “그 순간”들은 취약한 몸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이처럼 유성원은 ‘안 건강’이라는 단어로 함축된 몸의 순간들을 펼쳐 보인다. 이는 언어화되지 못한 몸을 언어화하는 것이기에 새로운 말하기가 필요한 작업이다. 언어의 한계 속에서 몸의 한계는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2. 누락되고 교란하는 몸


  유성원은 “원하는 걸 갖는 법=원하는 걸 가진다”라는 것이 자신에겐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문을 여는 법=문을 연다”가 아닌 것이다.6) 욕망과 행위 사이를 설명하는 언어에 그의 몸이 누락된다. 누락된(피동) 것들은 교란한다(능동). 어떤 몸들은 당연해 보이는 명제를 교란한다. 여기서부터 몸의 말하기가 시작된다.

  언어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지배적인 언어는 어떤 몸들을 표준으로 삼고 규정된 것이다. 이러한 언어에서 누락된 몸들에게 기존의 관계 문법은 생존을 위해 뒤늦게 사회화해야 하는 외국어다.7) 유성원이 찜방을 배경으로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그가 편안함을 느끼는 관계, “일상에서 물을 마시는 행위, 물병을 만지는 행위, 물을 목으로 넘기는 행위”의 의미를 아는 이들과의 관계를 설명할 언어가 필요하다.8)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경험하는 관계를, 제도가 규정한 언어가 아닌 개별적인 언어로 말하려고 한다. 초기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 사용자 공동체가 합의한 체계적인 언어를 ‘랑그’, 각각의 발화자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양태를 ‘파롤’이라고 했다. 유성원에게 몸들의 관계는 랑그로 말할 수 없는 것, 파롤로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저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우리가 관계라는 단어에 기대하는 값을 어떻게 상상 속에서 합의할 수 있을까?_p.113-114,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관계는 몸들이 협상하는 장이다. 그렇다면 관계는 고정된 언어로 온전히 포섭할 수 없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의미가 규정된 관계명은 각자의 몸들이 기대하는 실제값, 서로가 타협하며 합의한 실제값을 반영할 수 없다. 우리는 몸들이 부딪히는 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말해야 한다. 물론 그 값은 살갗을 미끄러지는 땀처럼 언제나 불투명하고 움직이는 것이기에 몸들은 배신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기존 언어를 해체하는 유성원의 작업은 최근에 발표된 단편 「아빠, 안에 싸도 돼요?」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9) 소설은 폭력이나 착취라는 이름으로 삭제된,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성적 욕망을 파편적으로 이야기한다. 화자인 나는 회사에서 “언어모델이 생성하지 못하는 응답이 무엇인지 찾는” 일을 한다.10) 이는 앞서 내가 반복해서 언급한 유성원의 작업과도 겹친다. ‘나’는 그 일을 종이에 이어서 하는데, 이때 종이는 “검열 규칙이 바뀌어도 플랫폼 원칙이 바뀌어도” 그대로인 것이다. “밤에만 선명해”지는 종이는 “낮에는 빛에 글자가 바래고 남는 건 궤적으로서의 동그라미뿐이다. 나는 무언가를 가두려 동그라미 안에 글을 쓴다. 동그라미는 감옥이자 유일한 작업실이다. 나는 살아 있는데 기억된 자로, 말할 수 없으나 쓰는 자로 남는다.”11) 화자는 언어 밖의 이야기를 언어라는 한계에 의지해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소설은 화자가 종이에 쓴 것인양 언어모델이 ‘아버지와 아들’ 키워드에서 검열한 ‘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나는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누군가는 폭력이라고 말하는 구경거리로서의 경험이 우습다. 그런 시선이야말로 그 경험을 절대화하고 비가역적으로 고정시키고 해결을 지연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경험한 남성 어른과의 성적인 관계를 폭력이나 착취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내 삶에 벌어진 다른 사건이 훨씬 유해하고 착취적이었다. 나를 원한 게 아니라 무엇의 대신인 관계였더라도 그 욕구를 채워주는 순간만큼은 나를 바라봐주는 그 눈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내 친구라고 생각한다. 친밀감이 무엇인지 경험시켜준 공범이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좋은 친밀감이 있고 나쁜 친밀감이 있는데 누군가는 좋은 친밀감 속에 있다. 그것은 그들의 조건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친밀감이라도 필요하다. 그마저도 갖기 어려우니까. 나는 아저씨들에게 원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내게 목적이 있고 그걸 달성하려고 부드럽게 대해주는 어른이 좋았다. 그건 따뜻함이다. 나는 사랑받았다. 그 경험을 그렇게 정의한다._p.269-270, 「아빠, 안에 싸도 돼요?」

  요새 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관계명(?)이 이성애 가족 중심주의 방식으로 읽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겐 친구, 애인, 어머니, 아버지, 파트너, 동료, 동지, 가족, 남편, 부인 등. 이들 단어에 붙어 있는 친밀감, 성애화, 거리감, 애정 등 경계가 점점 모호해진다. 그럴수록 헤테로, 모노가미, 유성애, 가족, 어쩌구 중심적 관계 맺기에 익숙해진 이들과 무엇도 말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러한 말하기(언어)에 전혀 발붙이지 않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거기서 멀어지는 감각이 가끔 현기증이 나고 당혹스럽다. 가령 어떠한 사람만 좋아할 수 있다거나 좋아해야 한다는 이야기들. 그런데, 퀴어는 “사랑하는 사람을 골라 사랑할 수 없”다.12)

  이처럼 유성원은 몸과 유리된 규범적 언어를 의도적으로 잃어버리고, 몸으로 언어를 새로 만든다. 그런데 그 과정은 몸을 취약하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언어와 그것을 말하는 몸이 정상성, 규범성의 언어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몸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13)




3. 구원 없는 몸


It's not about havin' someone to love me anymorе

This is the experiеnce of bein' an American whore _ 라나 델 레이. “A&W”14)


  유성원은 자신을 배제하는 언어(사회)에 살아가는 몸의 혼란스러움을 해결하길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몸 안에서 버티고자 한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아무런 기대를 품지 않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남들처럼 살 수 없다는 것만 생각하자. 탐내지 않는 거, 남들이 갖고 싶어하지 않은 것만 내것이다.

  나에 대해 기대를 접으면서…… 나를 나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노력하면서. 사물을 사물 이상으로 여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_p.7,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


  뭘 맡겨놓은 것처럼, 내가 자기들이 여태 살아오며 시달려온 어쩌지 못한 문제들을 한방에 해결해줄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걸 볼 때 한숨난다. 그런 것보다 이 잠들어 있는 시체 같은 사람 사이를 비집고 누워 있는 편이 좋다. 자고 있으면 사람들이 교체된다. 누구라도 상관 없다. 누구에게든 팔베개를 해주고 싶고 이 사람에게 해주었다가 그가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찾아온다. 이곳에서 나는 안심하고 환영받는다. (중략)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건 미래의 변화한 내가 아니라 지금 여기 실물로 존재하는 한계 있는 몸이다._p.126-127,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

  유성원에게 몸은 모두 대체 가능한 것이다. 가령 찜방이라는 공간에서 유성원은 “나를 위해 역겨운 오줌을 참고 마시는 게 아니고 오줌에 흥분하고 마시고 싶어하는 갈망이 있는데 그걸 채워주는 사람 중 한 명이 나였으면” 하고 바란다.15) 특별한 누군가가 되길 원하는 대신 아무나를 원하던 아무나가 우연히 자신과 욕망을 해소하길 바랄 뿐이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누군가를 구원할 특별한 능력이랄 건 없다. 만약 내 몸을 망치는 감정이 덮쳐 온다면 몸을 완전히 통과하길 기다려야 한다. “갇혀 죽어가는 데 입이 없는” 기다림, “희망이 물에 가라앉아 죽어가는 저 사람을 구할 수 없는 희망인 채 빛나는” 기다림, “그 빛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상태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걸 체험하면서 스스로 물 밖으로 기어나와야 하는” 기다림.16) 그 기다림은 끝없이 유예되며 몸을 현재에 존재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몸의 한계성은 존재가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당신의 심장은 당신을 위해 뛰고 있다. 그걸 기억하는 한 우리는 공평하다”라고 했다.17) 심장은 한계이면서 존재다.

  이 지점은 대런 애로토프스키 감독의 영화 <더 웨일>과 대조되어 보인다. 영화는 사무엘 D. 헌터의 연극을 영화화한 것으로 동성 연인이 자살한 후 죄책감과 우울로 폭식을 하다 초고도비만이 된 찰리의 이야기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찰리는 오래전 헤어진 딸 엘리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엘리는 자신과 엄마를 떠난 찰리에게 공격적으로 대한다. 결말부에서 병원에 가길 끝내 거부한 찰리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딸의 에세이를 엘리에게 쥐여주며 그것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는 엘리의 낭독을 듣던 찰리의 몸이 떠오르다 순식간에 흰빛을 받고 마치 구원을 받는 듯한 장면으로 끝난다. 여러모로 전혀 퀴어하지 않은 이야기다.

  나는 유성원의 몸-텍스트가 엘리의 글처럼 구원을 주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유성원의 몸을 읽을 뿐이다. 그럼에도 온전히 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분투하고 말하는 몸의 이야기를 읽으면 몸을 견딜 수 있는 것도 같다. 내 몸의 욕망을 그의 몸-텍스트에서 발견한다.18) 욕망은 살갗에서 발견된다.



  유성원의 글, 나와 다른 언어(파롤)로 쓰인 글을, 나는 내 언어(파롤)로 읽는다. 이때 내 언어는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내 언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내 언어의 변화를 느낀다. 그렇다면 내 글에 다른 언어들, 내 욕망을 부추기는 언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 이유는 내가 쓰고 말하는 언어가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 몸도 내가 읽어온 모든 텍스트의 인용이지 않을까. 여기서 또 인용을 하자면 “산다는 것은 가장 능동적이고 가장 자발적이고 가장 성실하고 가장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의미에서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를 받는 것”이다.19) 나는 타인의 글을 조각내고, 엉뚱한 곳에 이어 붙이며 내 말인 양 군다. 일본어로는 그것을 “킨츠기”라고 부른다(There’s a name for it in Japanese, it’s “Kintsugi”20)) 킨츠기는 깨진 도자기 조각을 이어 붙이고 깨진 선을 따라 금가루나 은가루를 붙여 장식하는 일본의 전통 공예 기법이다. 인용은 깨진 조각을 붙이며 전혀 다른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다. 라나 델 레이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 상투적인 말을 해리 닐슨의 노래에서 인용한다.21) 그렇게 해서 라나는 자신의 노래에 새로운 리듬감과 감정을 부여한다.22)

  그런데 문득 내가 타인의 몸-텍스트를 이기적으로 쓰는 것 아닌가 싶은 우려가 든다. 왜냐하면 타인의 몸-텍스트는 나의 맥락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몸-텍스트가 누구의 것인지 밝히고 이를 어떻게 읽었는지 이야기할 뿐, 내 경험으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지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23)

  그러다, 몸-텍스트 조각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더 웨일>에서 찰리를 구원해준 빛이 아닌, 우리를 파괴할 수 있는 빛. 그건 맞지 않는 몸-텍스트를 인용하며 생긴, 봉합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것이 빛이 들어오는 방식이다(That’s how the light get in).24)

  그렇다면 빛이 들어오게 하자(Let the light in).


Ooh, let the light in

Let the light in _ 라나 델 레이, “Let The Light in”(feat. Father John Misty)25)


































1) https://youtu.be/Yb2zNCG0s3I?si=_0DtuvL9E1U79B6u

2) Men who sex with men. (다른 몸과 성행위를 하는) 몸을 중심으로 둔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3) “타인의 작품이 나의 내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 작품을 나의 내부에서 나를 위해 집필된 작품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고, 또 그와 동시에 내가 이 작품을 변형시키고, 그것을 사랑의 힘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역 (민음사, 2015), 233.

4) 유성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난다, 2025), 145.

5) 위의 책, 17.

6) 위의 책, 48-49.

7) 유성원,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난다, 2025), 56.

8) 위의 책, 129.

9) 트위터(現 X)에서는 작품의 제목을 두고 이를 비난하는 게시물이 올라오기도 했다. 소설의 제목을 찍은 사진과 “이게 뭐야 ㅅ발”이라고 적힌 게시물로 시작된 비난은 ‘기분 나쁘다’, ‘불쾌하다’, ‘이게 문학이냐, 리디북스로 가라’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소설 내용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성애가 삭제된 관계명을 성애화하는 문장을 전면으로 드러낸 제목이, 기존 언어 규범에 익숙한 이들을 혼란케 한 듯하다. 그런데 언어를 낯설게 하는 것은 당연히 문학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어떤 맥락에서 언어가 사용되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그 자체로 문제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10) 유성원, 「아빠, 안에 싸도 돼요?」, 『계간 문학동네』 126 (2026): 264.

11) 위의 글, 267.

12) “변화를 수용하는 낙관과 우리에게 허용된 것 바깥을 향하는 본질적인 경쾌함. 퀴어의 자긍심이 비롯되는 곳에 당당히 선 퀴어는 그 구조에 균열을 낸다. 그들의 존재는 퀴어적 사건으로부터 주체화되었으며, 사랑할 사람을 골라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를 구성한다./퀴어는 언젠가 예외의 자리를 허락받는 것을 넘어 퀴어함이 자본주의와 정상성에 반대하는 사랑의 가치를 함께 부상시키면서 우리 모두를 묶어주는 하나의 총체성이 될 수 있다.” 배효민, <진>, 2025, 종이에 인쇄, 가변크기. 배효민 작가는 퀴어의 몸을 주제로 한 전시 《Oh My Body!》에서 가격에 따라 성별 정정 수술 범위가 달라지는 현실을 살아가는 트랜스젠더로서의 몸을 이야기했다. 작가는 피자 도우를 가슴 모양으로 만들어 냉장고에 넣고, 트랜스젠더로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배달 음식 전단지로 만든 진(zine)들을 냉장고 문에 부착했다. 이 작업을 통해 피자집 노동자와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이로써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활동이라고 말한 노동, 작업, 행위를 퀴어링하여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려는 자본주의에 저항한다. https://www.instagram.com/p/DWxYxTyEsSq/?igsh=MXVkZ3Z4Nm85NnRldg

13) 유성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난다, 2025), 257;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난다, 2025), 34; 41; 67.

14) https://youtu.be/pYqky795R1s?si=954Im4cqsvkhTVtG

15) 유성원,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 (난다, 2025), 168.

16) 유성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난다, 2025), 28.

17) 유성원,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 (난다, 2025), 201.

18) “나의 글쓰기 욕망은 독서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특정적인 독서에서 옵니다. 나의 욕망의 특정성→ 사랑의 만남에서처럼 무엇이 만남을 정의할까요? 희망입니다. 읽은 몇몇 텍스트와의 만남에서 글쓰기 희망이 태어납니다.”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역 (민음사, 2015), 230.

19) 위의 책, 179.

20) Lana Del Rey, “Kintsugi.” Did You Know That There’s a Tunnel Under Ocean Blvd. Interscope Records, 2023.

21) “Harry Nilsson has a song, his voice breaks at 2:05/Somethin’ about the way he says “Don’t forget me” makes me feel like/I just wish I had a friend like him, someone to give me five.” Lana Del Rey, “Did You Know That There’s a Tunnel Under Ocean Blvd.” Did You Know That There’s a Tunnel Under Ocean Blvd. Interscope Records, 2023.

22) 이 글에서 알 수 있듯 나는 미국의 가수 라나 델 레이를 디바로 숭배하고 있다(만화 <캐릭캐릭 체인지>에 나오는 수호알처럼 게이들은 자신의 디바를 마음 속에 품은 채 그들로 변신하길 꿈꾼다. 물론 뻥이다). 언젠가 친구와 농담 식으로 국제디바협회가 만들어진다면 협회장은 비욘세, 부회장은 레이디 가가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렇다면 라나 델 레이는 ‘새드 걸(sad girl) 지부장’ 정도 될 것이다. 라나 델 레이가 다른 디바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 디바들을 거칠게 나눌 수 있는 기준점은 바로 ‘Bitch’라는 단어의 사용 양태다. 여기에는 동기부여형(브리트니 스피어스의 Work Bitch), 자기과시형(리아나의 Bitch Better Have My Money), 자기주체화형(도자캣의 Boss Bitch, 카디 비의 Money, 메간 디 스탈리온의 B.I.T.C.H 등. 이들은 노래뿐만 아니라 인터뷰에서도 Bitch를 말버릇처럼 쓰는 것 같다. 한편 니키 미나즈는 여기에 속했으나 협회에서 영구 제명당했다) 등 여러 양태가 있다. 라나 델 레이는 스스로 Bitch로 호명하지만, 자기주체화형과는 다르게 어떤 자긍심도 보이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Venice Bitch에서 라나는 “It’s me your little Venice bitch”라고 읊조리듯 노래한다. 이러한 이유로 라나는 수동적 여성 이미지를 판타지화한다며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Ultraviolence에서는 “He hit me and it felt like a kiss”, “Give me all of that ultraviolence”와 같은 가사가 문제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비욘세나 레이디 가가 등의 단단한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라나는 힘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런 노래를 불렀기에 더 수동적으로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폭력을 당하거나 관계에 의존적인 여성(라나 노래의 화자)으로서 자신의 욕망과 관계, 광기를 노래한다는 것이 수동적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나는 라나의 노래를 퀴어하게 느낀다. 다른 디바들이 퀴퍼에서 우리들의 자긍심을 올려줄 노래를 부르는 동안, 라나는 그냥 미쳐버린 자신을 노래하는 것이다. 라나는 Cruel world에서 미쳐버린 A&W(American Whore)이자 Venice Bitch로서 hope is a dangerous thing for a woman like a me to have라고 말한다. 이는 내게 유성원의 작품과 겹쳐 보인다.

23) “반면, 그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조각에 대해서는 소설적 상상력을 조금도 발동시키지 않는다. 가령, 그는 엄마와 애인이 전화 통화로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예 쓰지 않기를 선택한다.” 전승민,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김봉곤론―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 『문학들』 76 (2024) : 248.

24) Lana Del Rey, “Kintsugi.” Did You Know That There’s a Tunnel Under Ocean Blvd. Interscope Records, 2023.

25) https://youtu.be/WJlQ4jt5Fz4?si=Gfqx7O76IjZZgx1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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