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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닮았는가·빨간 두건 아가씨, 김보영] 불편한 전복: 트랜스젠더와 어긋나는 페미니스트 SF, 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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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작성일 2026-04-2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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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얼마나 닮았는가』, 아작, 2020.

김보영, 「빨간 두건 아가씨」, 『얼마나 닮았는가』, 아작, 2020.




#SF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페미니즘 #성별이분법 #트랜지션







세계의 규칙을 비틀어 실험이 가능해지는 세상이 있다. 한국 여성작가/페미니스트 SF의 강진 속에서 많은 작품이 현세계를 뒤틀어 젠더 규범을 해체해왔다. 그런데 어떤 상상력은 모종의 불편함을 자아낸다. 이 글은 논바이너리 당사자의 SF 독서 경험에 비추어 젠더와 신체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이 트랜스적 욕망과 엇갈리는 지점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한다. 특히 2015년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일종의 문학적 성명처럼 쓰인 김보영 작가의 2017년 단편 「얼마나 닮았는가」와 2017년 엽편 「빨간 두건 아가씨」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페미니스트적 젠더 전복 상상력이 트랜스젠더와 어긋나는 순간을 살펴본다. 성차별적 구조와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 SF는 어떤 지점에서 성별 이분법을 재생산하는가? ‘생물학적 성차’ 전복을 위한 신체의 트랜지션은 왜 다시 트랜스혐오적 논리에 기대게 되는가? 트랜스 독자가 자신을 위치시킬 수 없는 페미니스트 세계 만들기를 문제시하며 이 글은 SF가 성별/젠더/신체를 재현하는 방식이 어떤 욕망과 몸을 배제시키는지 질문한다. 






성별과 성차별 사이

 


「얼마나 닮았는가」는 우주선의 위기관리 AI 컴퓨터 ‘훈(HUN)’의 1인칭 관점에서 서사가 진행된다. 소설은 이전의 기억을 잃은 훈이 컴퓨터가 아닌 유사인간 의체에서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선원들이 타고 있는 보급선은 유로파 위성으로 향하다 타이탄 위성에서 구조신호를 받고 궤도를 바꾸지만 통신이 끊겨 위기상황을 마주한다. 훈은 자신이 인간형 의체를 요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직 보급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지만 선장과 선원들 사이에서는 보급 유무를 둘러싸고 긴장과 갈등이 발생한다. 훈은 위기관리 AI 메뉴얼에 입력된 여러 기본 정보들을 기반으로 인간들 사이 갈등을 분석하지만 자꾸만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251쪽)이 있다는 기분이 든다. ‘강우민’과 같은 선원들은 인간 의체를 얻은 훈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신체적 폭력을 행하지만, ‘훈’은 병렬식으로 생각하는 생물 뇌에 적응하려 애쓰며 자신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한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일에 집중한다. 훈은 특히 왜 선장 ‘이진서’와 다른 선원들 사이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고 이진서가 왜 계속 겉돌고 견제를 받는지 고민하면서 의문점을 계속 기록한다. 

훈에게서 배제된 정보는 SF에서 흔히 사용되는 인지적 낯설게 하기(cognitive estrangement) 기법의 예시이다. 문학이 기본적으로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한다면, SF는 판타지 장르와 달리 완전히 허구적 세계를 그려내지 않고 인지를 통해 낯선 세상을 현실 세계로 다시 연결시킨다. 예컨대 선원 두 명이 훈의 신체에 성폭행을 하려다 선장 이진서의 제지를 받는 장면은 너무나 현실적이지만 AI인 훈은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며 “8. 내가 인간과 성교를 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한다”(307쪽)는 기록을 남길 뿐이다. 이후 훈은 여전히 다른 선원들이 왜 선장인 이진서를 무시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여자 말 안 듣는 사내놈들은 쌔고 쌨어”(320쪽)라는 이진서의 말을 듣고서야 잊고 있었던 “여자. 성별”(320쪽)에 대한 정보를 떠올린다. 즉 성별 정보 지우기를 통해 훈의 시점은 독자들에게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남녀 사이 권력관계와 남성의 여성혐오와 성폭력을 그려내면서 성별을 지우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는 성차별을 묵인해온 사회 또는 남성 권력에 대한 페미니스트 분노일까?

훈의 시점이 주는 반전의 핵심은 작가가 상정하는 내포 독자를 두 가지 부류로 구분 짓는다. 기본적으로 성차별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서사 반전 장치로 깨달음의 순간을 마주하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서사 내내 기시감을 느끼다 성별 정보가 공개되었을 때 “그럼 그렇지”라며 쾌감을 얻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자는 성차별을 전혀 인지하며 살아오지 못한 ‘남성’ 독자, 후자는 ‘여자 말 안 듣는 사내놈들은 쌔고 쌨’다는 이진서의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통쾌함을 느끼는 ‘여성’ 독자인가? 이 구분에서 떨어져나가는 수많은 독자들은 그렇다면 이 서사 장치와 어떤 만남을 가지고 어떤 정동을 가지고 독서를 할 수 있을까? 인간들 사이 미묘한 권력 관계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서서히 인지하고 기록하면서도 훈은 이진서가 ‘여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지겹다는 듯이 차별을 지적할 때까지 성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별에 대해 주목한 다음은 어떠한가?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는 기본적인 기준, 성기. 하지만 인간은 성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가슴, 몸집, 골격, 얼굴형, 목소리 톤, 하지만 모두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예외적인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 이진서의 목소리는 낮고 키는 큰 편이다. 상대적으로 작은 골격과 매끈한 피부는 참고할 만했지만 그런 남자도 마찬가지로 많다. 표정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쉽고 기계에게는 어려운 구분.”(320쪽) 


훈은 자신이 기계라는 사실을 인지하며 자신에게는 성별이 없고 보급과 관련이 없으면 성별이 유의미한 정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 시점부터 바로 다른 인물들의 여성/남성 패싱 성별을 읽어낸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지금까지 내 성별이 뭐라고 생각……”(321쪽) 했는지 고민하다가 갑자기 “성차별”(324쪽)이라는 결정적 실타래가 풀리는 전개는 의문스러운 지점을 남긴다. 훈은 자신을 ‘여성’으로 대하는 선원들의 비합리적인 행동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일까? 성별은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유의미한가? 훈은 지워진 성차별에 대한 정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 숨 쉬듯 만연하는 것. 인간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것. 비합리인 줄도 모르고 행하는 비합리,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하는 잘못. 들추어내면 어리둥절해하다 못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324쪽)


“너희 나라 공무원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고 믿고, 내게서 지워버렸어”(324쪽)라고 훈이 이진서에게 하는 말은 이 단편소설의 페미니스트적 분노를 가장 잘 축약해서 보여준다. 다만 주목해야 할 점은 문제시되는 정보가 성별(이분법)이 아니라 성차별 자체라는 점이다. 유로파 행성에 보급을 해야 하는 우주선의 위기관리 AI로서 훈은 성별 그 자체가 아니라 불균등한 여성/남성 성별 배치에서 파생되는 갈등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삼는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트랜스적 상상력과 어긋난다. 훈은 “여자가 아니면 남자라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전형적인 어림짐작 성향이지만 인간의 젠더는 복잡해서 그렇지만은 않다”(321쪽)고 생각하는 AI이지만 소설은 성차별을 극대화하여 서사적 긴장을 주기 위해 남성/여성 구분을 필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성별, 타자화와 동일시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소설에서 훈에게 직접적으로 ‘여성’이라는 성별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훈이 성차별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대목에서 암시가 되고 있을 뿐, 소설 텍스트 안에서 훈이 직접 여성으로 정체화하거나 자신의 의체를 여성의 것으로 인식하는 대목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은 훈과 남성/여성 인물들 사이 타자화와 ‘닮음’ 또는 동일시 과정을 그리면서 성별 기제를 강화한다. 항해사 강우민을 포함한 다른 남성 선원들은 훈과 이진서를 대상화하며 (성적) 폭력과 강압을 행하려고 한다. 

이 문제적 구조는 성차별에 대한 깨달음은 얻은 후에 훈이 직접 강우민에게 “내가 널 동경할 거라고 믿지. 당연히 인간이 되기를 꿈꿀 거라고, 네게 사랑받고 몸을 섞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지”(327쪽)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폭로된다. 훈은 인간들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인격만을 겨우 상상할 수 있을 뿐”(328쪽)이라고 생각하며 강우민이 타자에 대해 가지는 망상을 비판한다. 초반에 “선장과 남찬영 사이에 있는 묘한 진영의식”(303쪽)을 이해하지 못하던 훈은 둘을 ‘여자’로 인식한 후에야만 “둘 사이에 있던 기묘한 진영의식”(325쪽)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기에 강우민의 타자화를 폭로하는 장면은 동시에 훈은 (성)폭력을 가하고 여성을 얕잡아보는 남성과 균등하지 않은 인원 배분 때문에 소수의 여성으로서 어려움을 겪는 선장과 남찬영 사이 대립 구도를 만들어낸다. 

소설은 이미 여성 대 남성으로 구분되는 진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 훈은 ‘여성 집단’과 동일시된다. 게다가 훈이 “이진서는 강우민보다 사람이 낫다. 선장은 훨씬 더 넓게 동일시한다”(330쪽)고 생각하는 대목처럼 이 세계만들기 속에서 여성은 기본적으로 남성보다 동일시를 더 폭넓게, 많은 존재에게 할 수 있다고 상정된다. 소설은 “싸구려 감상주의나 연약함”(332쪽)으로 치부되는 여성의 특징이 “개인의 성향”(332쪽)일 뿐이라고 선언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일시 전략은 여성-연민-감성적/남성-야만-비이성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의존한다. 이로 인해 성차별을 비판하는 서사 속에서도 일부 대목들은 이진서와 같은 여성 인물이 다시 연민의 존재로 재구성되는 한계에 봉착한다. 

그런 점에서 이진서가 훈에게 느끼는 자기연민이 ‘닮음’을 기반으로 한 동일시에서 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훈을 죽이려던 강우민을 훈과 이진서가 함께 처단한 뒤, 이진서는 훈에게 “뜬금없”(331쪽)이 사과를 하고 훈은 “그것이 자기연민임을 이해”(331쪽)한다. 여기서 이진서의 자기연민은 훈을 “자신과 닮은 것으로 두고,” 훈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기에”(331쪽)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 닮음은 또다시 여성(형) 신체와 그 성에 기반한 차별과 폭력을 전제한다. 따라서 소설이 일부 여성 간 연대의식을 그려내려고 한다면 이는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 속에서 타자화와 동일시의 논리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진서가 훈과 동일시를 하는 것과 별개로 훈이 이진서의 관점에 완전히 ‘동일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남성/여성의 구도 외에도 소설은 초반부터 AI 훈의 관점에서 인간과 거리감을 두면서 인간/기계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훈이 끝내 타이탄 행성에 보급을 하기 위해 자신의 인간 의체를 포기하려고 하는 장면에서 이진서는 왜 훈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버리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334쪽)을 하며 훈의 뺨에 손을 대고 “접촉, 친밀감의 표현”(335쪽)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훈에 대한 이진서의 친밀감이 극대화되는 계기는 훈이 자신이 왜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밝히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등장한다. 이진서는 훈이 인간 의체에 들어가기 전 AI 프로그램으로 존재했을 당시 선장인 자신을 우주선 내 갈등의 문제로 삼은 것에 대한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훈은 선장인 이진서에게 비난이 쏠려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 위기관리 AI 매뉴얼 중에 “비난을 자신에게 돌리는 전략”이 있다고 밝히며 “누가 보아도 ‘다른’ 것”, 즉 인간 의체에 들어간 AI가 나타나면 “진영이 결집하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 결정을 했다고 설명한다(335쪽). 그런데 이진서가 “그쪽 진영”(남성 진영)에 끼지 않고 훈을 감싸면서 선원들이 이진서와 훈을 동일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훈은 진단한다(335쪽).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진서는 훈과 입술을 맞추며 키스한다.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이 키스 장면은 여러 층위의 동일시와 타자화의 과정과 얽혀 있다. 훈은 선장과 선원들 사이의 갈등이 커질 무렵 그들이 결집하기 위해서는 더 큰 불편감을 불러일으키는 타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인간 의체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 신체에 들어간 훈은 (남성) 선원들에게 이진서와 비슷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이진서는 같은 성차별을 경험하는 훈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같은 진영에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다른 (남성) 선원들이 훈과 이진서를 같은 여성 집단으로 동일시해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이 얽힌 과정에서 동일시와 타자화는 신체와 성별을 넘어서지 못한다. 여기서 동일시-타자화의 고리는 여성 신체를 공유한 사람을 하나의 ‘여성 집단’으로 묶어내 그들이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남성 집단’의 가해로 상정한다. 이는 소설이 인간/기계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점으로 육체성을 제시한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 의체를 가진 훈은 점점 인간적인 생각이 자신의 데이터를 오염시킨다고 생각하고 이진서와의 친밀감 교류는 두 몸이 만나 인간-기계의 구분이 가장 허물어지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이진서와 훈의 키스는 전혀 퀴어하지 않다. 이진서가 키스를 하는 이유는 훈과의 극단적 동일시 때문이고, 훈에게 이 키스는 이진서에 대한 친밀감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인간은 이런 것을 보고 사는구나”(336쪽)라는 인간 고유의 경험을 체현하는 과정으로 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키스 장면은 역설적으로 인간과 기계가 얼마나 닮지 않았는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진서가 여성 신체와 공유된 성차별/성폭력 경험 때문에 가지는 친밀감은 훈에게서 그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게다가 훈은 키스를 하며 “그제야 처음으로 내 성별이 궁금해졌지만 여전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336쪽)고 생각한다. 잠재적인 여성 간 친밀감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장면은  ‘성별’ 경험에 기반한 동일시와 친밀한 경험에서 다시 소환되는 ‘성별’ 지표로 인해 퀴어한 독해가 불가능해진다. 성별이 훈에게 의미없는 정보로 보이는 사실은 논바이너리 독해를 가능하게 하는 대신 성별 이분법을 넘어서는 세계 만들기의 실패를 보여준다. 이진서는 왜 훈이 인간 신체를 포기할 때 슬픔을 느끼는가? 닮은 것은 그들의 ‘여성’ 신체인가, 아니면 ‘남성’이 가하는 성차별인가? 그들은 얼마나 닮았는가? 그 동일시는 어떤 납작한 배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논바이너리 독자 입장에서 이런 페미니스트 이상 안에는 ‘나’가 없다.


 




전환과 전복의 실패



하지만 이 단편소설이 자아내는 불편감은 페미니즘이 어떤 종류의 실패에 쉽게 당도하는지를 고민하기 위해 유의미하다. 신체적/생물학적 성으로 환원되는 섹스(sex)가 ‘성’차별에서 주요 비판의 지점이 된다면, 페미니즘은 이분법의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예컨대 위기관리 AI 훈이 자신의 실수를 곱씹는 과정에서 “이토록 먼 항해를 떠나는 배에, 그것도 일정이 비틀린 불안한 일정에, 절대로 한쪽 성을 이렇게 적게 배치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야만이 비어져 나올 ‘구멍’을 만들지 않았어야 했다”(325쪽)고 생각하는 부분은 남녀를 파이게임에 몰아넣게 된다. 동일한 조각을 가지더라도 끝내 지속되는 위계가 너무 많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 ‘성’차별적인 위계 속에서는 전환도 전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훈은 의체의 기억을 복사해 다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돌아오고 이진서는 여전히 “모니터에 얼굴을 대”며 “접촉, 친밀감의 표현”(338쪽)을 보인다.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훈은 인간으로서 잃은 것에 대해 아쉬워하며 인간과 가까운 의식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초반에 계속 보급을 해야 한다는 어떤 목적을 가진 기계의식을 보이던 훈과 달리 소설은 훈이 타이탄 행성으로 착륙선을 떼어내며 “나와 닮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내가 내려간다”(339쪽)고 생각하며 끝을 맺는다. 연민으로 정의되는 (여성적) 인간성에 훈이 가까워지며 소설이 끝난다는 점은 동일시와 연민의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게 한다. 대상에 대한 연민은 동일시를 통해서만 가능한가? 훈의 위치성은 인간-기계 구도와 얽혀 있어 이를 페미니즘 진영의 문제로 바로 빗대 읽어볼 수는 없지만, 위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 성별-성차별-성폭력의 고리는 분명 페미니스트 운동의 ‘좁은 동일시’와 배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나아가 여성과 남성의 몸을 바꿀 수 있는 합성신체가 개발된 미래를 그리는 김보영 작가의 엽편 「빨간 두건 아가씨」는 페미니스트 전복을 위한 신체의 트랜지션이 다시 트랜스혐오적 논리에 기대게 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소설은 “여성”(72쪽)의 신체를 가진 사람이 거의 사라진 세상에서 붉은 두건을 쓰고 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걷는 “아가씨”(65쪽)가 받는 차별적 대우에 집중한다. 수많은 남성들은 아가씨를 구경거리로 여기며 희롱하고 쫓기다 못해 아가씨는 택시에 탑승하지만 기사 또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 손님을 처음 보는 택시기사는 질문한다.



“그런데 정말 여자 맞죠? 여장남자라든가 그런 것 아니고. ……아니 뭐, 그냥.” (중략) “가만, 혹시 여자 몸을 입은 것도 아니라 진짜 여자예요? 날 때부터 여자였어요?”(71쪽)


“하긴 여자인 게 좋죠? 사랑받잖아요. 주목도 받고. 이 거리 남자들이 다 아가씨만 보고 있을걸요.”(74쪽)


택시 기사의 발언에서 트랜스(여성)혐오가 묻어나는 것에 더해 소설 속 세상은 트랜스 남성적 욕망을 납작하게 지워버린다. 버스 정류장에 달린 ‘태어난 그대로의 성으로 삽시다’라는 문구의 공익광고(69쪽)는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그대로 반영한다. 여자들은 입시철이 오면, 교수가 되기 위해, 연봉협상이나 정리해고 시즌이 오면, 막노동을 해야 하는 일이 오면, 땅이나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남자로 몸을 바꾼다”(74쪽)는 소설의 세계는 트랜스적 욕망을 ‘성’차별에 입각한 ‘성’전환의 욕망으로 환원시킨다. 남녀가 평등해지는 세상이 오면 전환의 필요는 사라진다. 이는 트랜스 남성과 논바이너리의 존재를 지워버릴 뿐만 아니라 트랜스 여성의 욕망을 병리화하고 문제시 삼는 논리의 기반이 된다. 남성-여성의 공고한 위계가 존재한다면 ‘남’에서 ‘여’로의 전환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설의 결말에서 “무시당하거나 지워지기를 원하지도 않”고 “그저 자연스러움을 원하”고 “거리를 무심히 걷는 모든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기를”(75쪽) 바라는 아가씨의 소망은 공감하기 어렵다. 소설의 전제 자체가 생물학적 성 전환과 성차별 극복을 동일시하면서 이미 배제의 논리 위에서 전복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가씨가 두리번거리며 선 지하철 입구”에 놓인 꽃과 촛불, 그리고 가득 붙은 포스트잇(70쪽)은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아름다운 추모로만 여기기 어렵다. 어떤 종류의 배제적 페미니스트 연대는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김보영의 두 작품은 서사의 전환점으로 사용되는 성차별, AI 화자를 통한 성별 모호성, 그리고 인공 신체의 성별 전환과 같은 장치를 활용하지만, 그 상상력은 여전히 남성/여성, 가해자/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기대어 있다. 그 결과 ‘전환’은 젠더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기보다는, 기존 이분법을 실험적으로 전도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러한 젠더 상상력은 트랜스의 신체와 삶을 독자적인 존재 방식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성별을 페미니즘적 분노와 저항을 드러내는 서사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2017년에 쓰인 두 소설은 성차별과 성폭력의 문제를 핵심 서사 동력으로 삼으며 페미니스트 분노를 드러내는 일종의 성명처럼 읽힌다. 그러나 이를 트랜스 배제적 급진 페미니즘(TERF)의 논리와 맞물려 읽어 본다면, 두 작품은 페미니즘적 상상력이 트랜스적 존재, 욕망, 신체를 충분히 사유하지 못하는 지점을 노출한다. 성차별에 대한 분노, 성폭력에 대한 공포는 ‘(시스) 여성의 (트랜스에 대한) 공포’로 쉽게 뒤틀려 젠더 위계를 전복하려던 페미니스트 감각은 그 이분법에 다시 갇히게 된다. 

이 글은 김보영 작품세계가 가지는 페미니스트 상상력의 한계를 일부 지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한계와 부대끼는 일은 어떤 상상력이 트랜스 페미니즘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지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 페미니스트 SF 상상력은 더 복잡하게 나아갈 수 있다. 주인공으로 트랜스젠더 인물을 재현하는 SF(김초엽의 「양면의 조개껍데기」와 김성중의 「에디 혹은 애슐리」) 의 경우 다양한 장치를 통해 트랜지션의 서사화를 다층적인 방식으로 풀어갈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 트랜스 인물을 표면화하지 않더라도 신체성/사이보그/욕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작품(김초엽의 「로라」「수브다니의 여름휴가」)의 경우도 은유로서의 트랜스를 넘어 트랜스 욕망과 더 친밀한 독해가 가능해지기도 한다. 페미니스트 SF에서 젠더에 대한 더 다채로운 실험과 트랜스/젠더/퀴어 독자가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세계 만들기를 읽어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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