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우리 엄마는 남미새] 레즈비언 어머니의 도착: 남미엄과 엄미새 사이에서 모녀서사의 감정 규범 질의하기, 정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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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작성일 2026-04-08 01:47본문

손보미, 「우리 엄마는 남미새」, 『현대문학』 2025년 9월호, 현대문학, 2025.
#레즈비언어머니 #모녀서사 #모녀관계 #감정규범 #이성애규범성 #어머니죽이기
손보미의 단편소설 「우리 엄마는 남미새」1)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 엄마가 남미새인 줄 알았는데 사실 여미새였음.’ 제목부터 반전까지 웃기고 이상한 이 소설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대중적 페미니스트 담론 장에서 유통되어 온 남미새-여미새 각본을 모녀서사 안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미엄’과 ‘엄미새’라는 파생어를 작동시킨다.2)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이 어머니를 평가하고 비판하는 딸의 자기정당화 각본(남미엄)과 어머니를 사랑하고 돌보고 이해하고 챙기는 딸의 자기서사 각본(엄미새)을 함께 호출하면서, 전혀 다른 자리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표현이 사실은 동일한 감정 규범과 해석적 주체 위치 선점에 기초한 동전의 양면임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이 글은 손보미의 「우리 엄마는 남미새」를 동시대 모녀서사의 맥락 속에서 읽으면서, 이례적인 이 레즈비언 어머니의 도착이 노출하는 모녀서사의 감정 규범, 즉 어머니를 사랑하고 돌보고 이해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자기 자신을 통해 도덕적 자아를 구성하는 딸이라는 주체의 위치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소설에서 모녀서사는 매우 많이 생성되어 왔다. 이 흐름은 이성애적 가족각본을 따라 퀴어/페미니스트적 긴장 관계 속에 어머니와 딸의 서사를 놓는다. 이성애결혼에서 먼 딸과 어머니의 미묘한 공존이 있는가 하면, 레즈비언 딸이 등장하여 탈성애화된 어머니와의 상호이해를 도모하기도 하고, 포스트페미니즘적 세계상을 반영하는 직업과 일, 자존과 개체성을 위해 가족을 그리고 동시에 딸인 ‘나’를 떠나는 어머니를 그리기도 한다. 이 모녀서사들에서 어머니는 주로 헌신적이지 않고, 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며, 때로는 냉혹하게 비평적이고, 차갑고 불가해한 타자로 남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모녀서사의 판본들 사이에는 그럼에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대다수의 서사적 사례들에서 모녀관계의 의미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권한이 딸의 위치성에 있다는 점이다.3) 어머니는 흔히 딸의 성장, 상처, 고통, 윤리적 자기 이해 등의 통로나 이를 매개하는 대상으로 남으며, 이토록 많은 모녀서사 속에서 딸이 어머니에게 청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이 복잡하고 질척한 감정이 어떤 규범 속에서 구획되고 응결되며 표현형으로 구체화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질문되지 않는다. 손보미의 「우리 엄마는 남미새」는 이 지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손보미는 몇 년 전 여성고딕 모티프를 레퍼런스로 삼는 서사들에서 출발하여, 소녀 화자가 자신보다 먼저 ‘여성’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듯한 여자들을 응시하고 탐구하는 소설을 써왔다. 이들이 마주하는 여성들은 무심하고 성급하다고 여겨지고, 유별나고, 수다스럽고, 미친년이며, 부주의하게 감추고, 전혀 어른스럽거나 헌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손보미의 소설세계에서 소녀 화자들이 마주하는, 이성애규범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의 세계는 모순되고 불가해하며 어떤 하나의 진실에도 수렴되지 않는다. 이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여자들이 소녀 화자가 발 디딘 세계를 가득 채울 때, 소녀 화자의 응시는 여성고딕적 정동을 경유하면서 가까이 있어도 낯설고 오래 바라보아도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거나 해석되지 않는 여자들을 자주 실패하는 방식으로 포착해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엄마는 남미새」는 이러한 계열체에서 약간 이탈하는 괴작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의 어머니 또한 그러한 여자들의 계보 위에 새롭게 놓이는 존재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소설 속에서 어머니는 처음에는 ‘남자에 미쳐서 딸도 버린 엄마’라는 모종의 전형적 여성 인물 형상으로 포착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문제시되는 것은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러한 방식으로 어머니를 응시하는 딸의 관점과 이 관점을 통해 구성되는 딸의 자기서사다.
「우리 엄마는 남미새」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우선 처음에 언급한 반전(남미새인 줄 알았던 엄마가 레즈비언이었음)이 있고 그 반전의 경로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열네 살 때 가족끼리 여행을 간 별장에서 다른 남자와 성적 관계를 맺고 그 길로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 그 뒤로 2주에 한 번씩 만나다가 내가 열여덟 되는 해에 뉴욕으로 떠나 다른 누군가와 동거와 헤어짐을 반복하는 어머니를 미워하고 원망한다.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 어머니를 ‘나’의 삶 속에서 일시적으로 추방시키지만, 내가 스물다섯 되는 해에 아버지가 재혼하고 이복동생이 생기게 되면서 서사적 현재인 서른아홉 살이 되기까지 10년 넘는 시간 동안 어머니와 가끔 연락과 교류를 이어가며 살아간다. 이 소설의 서사적 현재에서 ‘나’는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다며 슬픔을 호소하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알고 보니 어머니가 레즈비언임을 ‘엄마의 커밍아웃’을 통해 알게 된다. 사실 어머니가 별장에서 다른 남자와 성적 관계를 맺은 이유도 별장 주인인 어머니의 여자 친구에 대한 감정이 혼란스러워서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아버지와 이혼한 뒤 미국에서 레즈비언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있는 미국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계속 어머니의 ‘남미새력’을 측정하느라 바쁘지만, 그러한 측정을 통한 판정의 욕망 자체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의 욕망을 어떤 규범으로 해석해왔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소위 이런 우스꽝스러운 계몽적 이야기(‘다른 여자가 남미새인지만 신경 쓰는 니가 진정한 남미새’)로 수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소설은 반전을 가지고 있지만 반전이 서사적 쾌를 생산하며 비난의 대상을 반전시키는 방식으로 도덕적 우위의 선점을 쾌락화하는 서사는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하고 중첩된 감정과 함께, 그 감정을 표현형으로 바꾸어내는 규범의 각본이다.
훗날 그날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비굴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수치스러울 수 있고, 수치스럽지 않아도 얼마든지 비굴해질 수는 있다고.
프리즘을 통과하는 감정의 스펙트럼,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 보라. 흐릿하고 위태롭지만 허물없이 넘실거리는 그 빛의 경계선.(66쪽)
「우리 엄마는 남미새」는 초반부터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감정이 어떤 행위에 마땅히 수반된다는 생각, 예를 들어 비굴함은 반드시 수치를 동반할 것이라는 생각은 경험 속에서 부정된다. 이혼 후 어머니와 만날 때 고기를 안 먹겠다고 했던 ‘나’의 결정을 신념으로 존중해주는 시퀀스에서, 이미 다시 고기를 먹게 된 ‘나’가 “체념과 굴복 같은 감정을 느꼈어야 마땅했으리라는 생각”(86쪽)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리고 감정은 스펙트럼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어머니가 딸인 ‘나’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시퀀스에서 울면서 동시에 웃는 것처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감정들이 함께할 수 있다. 또한 ‘나’가 어머니에게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와 억울함과 증오심과 좌절감 그리고 애착 같은 감정들이 예시하는 것처럼 이들 감정은 서로 간의 경계선 속에서 쉽사리 분할되지 않는다. 실제로 어머니가 미국으로 떠난 후 한동안 어머니를 자신의 삶 속에서 추방시켰던 ‘나’의 행위는 어머니에 의해 “넌 그때 나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에 싸여 있었잖니.”(87)라는 언술을 통해 증오심이라는 한 이름으로 번역될 뿐이다. 「우리 엄마는 남미새」에서 감정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흐릿하고 위태롭지만 허물없이 넘실거’리는 종류의 것으로, 진실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하나의 진실이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이의제기한다. 이러한 이 소설의 감정론에 따라 이해하면, 이 소설에서 남미엄 역시 복합적이고 구획되지 않는 모녀관계의 관계적 감정들을 딸의 위치성에서 정제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조율한 표현형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어머니가 줄에 매달린 남자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횟수와 여성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횟수를 속으로 셌고 그걸 비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기 싫어도 그렇게 되었다. 어머니가 남성에게 보내는 환호성이 더 진실되게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97쪽)
동거남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몇 명의 동거남이 어머니를 거쳐 갔는지가 문제였다. 차라리 재혼을 했다면, 그랬다면 나는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73쪽)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표현형으로 관계적 감정들이 구획되고 조율될 때 투사되는 감정 규범에 있다. 앞서 간단하게 언급했고 위의 첫 번째 인용문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서사적 현재에서 ‘나’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계속 어머니의 남미새력을 측정하려 한다. 남자를 향해 환호하는 횟수를 세고, 동거남의 숫자를 문제 삼고, 재혼이라는 형식만 갖추었다면 자신은 그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문제되는 것이 어머니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그 욕망이 어떤 삶의 형식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해 판정하고 평가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그 주체 위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어머니의 욕망, ‘나’의 관점에서는 ‘부적절한’ 이 욕망들은 어머니의 이후의 삶의 방식에서 이성애적 가족 제도 속 모성의 규범적 형식 속에서 독해되기를 초과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에, ‘나’는 어머니의 “러브 스토리”(64쪽) 따위가 딸인 ‘나’가 승인할 수 있는 질서 속에 봉합되지 않는다는 점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신발 정리를 하나도 안 했네.”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멜다야, 뭐야.”
“이멜다가 뭐야?”
내가 묻자 아버지가 대답했다.
“있어, 그런 여자.”(75쪽)
이 점에서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는 가족여행에서,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자신이 그때 사랑한 사람의 신발을 정리해주는 것과 달리 그녀를 ‘그런 여자’로 손쉽게 호명하는 아버지와 닮아 있다. 남미엄이라는 표현형은 딸의 감정이 어머니의 삶을 특정한 도덕적 형식, 특히 이성애규범적인 형식 안에 가두어 읽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명명에 가깝다. 이러한 표현형은 이미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온 여성을 비난하는 문법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런 여자’는 어머니의 “오싹하고 달콤한 야심”(119쪽)으로 표현되는 욕망을 쉽게 비난 가능한 종류의 것으로 단순화하는 동일한 사회적 규범의 각본 속에서 작동한다.
나는 소파 위에 누워서 어머니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후손에게 미안하다고?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허, 어머니의 ‘진정한’ 후손은 나였다.
내가 어머니의 후손이었다. 어머니의 몸속에 열 달 동안 있다가 나온 게 바로 나였다.
오래전, 휴가지에 그 남자를 데리고 오기로 결정했을 때, 그것도 모자라 우리가 머무는 별장으로 몰래 숨어들어 왔을 때는 나에게 안 미안했나? 이혼한 집 자식이라는 수근거림 속에서 살아가게 될 나는? 이혼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이혼 사유가 어머니의 불륜이라는 점이었다. (중략) 그런 나에게는 안 미안했나? 나에게는 죄책감을 안 느꼈나?(99쪽)
이 지점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이 소설 전체에서 딸이 어머니에게 열네 살부터 서른아홉 살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이 모녀관계 속에서 청구하고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위 인용문은 그러한 청구의 요체가 ‘미안함’에 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어머니는 딸에게 미안해해야 하고, 자신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하며, 딸이 감당해온 상처와 어머니에 대한 평가와 요구 사항들을 승인해야 한다. 기후위기에 대해서는 후손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 ‘나’에 대해서는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어머니의 선택과 삶의 방식에 대해 ‘나’는 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마땅한 승인은 윤리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가 된다. 이때에 모녀관계는 감정의 정당한 분배를 둘러싼 윤리적 투쟁으로 격상된다.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해야 하며, 어떤 관계가 더 강한 윤리적 의무를 발생시키며, 무엇이 미안해해야 할 상처로 인정받는가의 문제가 함께 동반된다. 딸인 ‘나’는 어머니의 죄책감이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윤리적 우선권을 부여받는 주체로서 자기서사를 구성한다.
어머니는 당황한 게 분명했다. 나는 미국에 사는 나이 든 한국인들이 이런 문제에 훨씬 더 보수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한 생각. 여기서는 어머니가 여자보다 남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느니 어쩌느니 그런 것 때문에 마음 상할 일이 없으리라는 것. 이상하게도 나는 약간 의기양양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LGBTQ 파티예요!” (중략)
“엄마도 성소수자가 뭔지, 알 것 아녜요. 서울에도 1년에 한 번씩 이런 행사가 있거든요. 퍼레이드요. 정말 굉장하다고요. 규모가 엄청 커요. 여기보다도 훨씬 더.” (중략)
그 순간, 어머니가 웃었다. 아주 살짝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비웃었다. 분명히 그랬다.
“엄마는 얼굴도 모르는 후손들에게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왜 저 사람을 보고 웃는 거예요? 저 사람에게는 안 미안해요? 왜 저 사람을 비웃는 거냐고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어머니의 얼굴은 붉어진 채였고,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난 아무도 안 비웃었다.”
“비웃었잖아요.”
잠시 나를 응시하던 어머니가 뭐 어떡하겠냐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냥 저 사람이 춤추는 게 너무 웃겨서 웃은 거야.”
“뭐가 웃긴데요?”
“저 옷이랑 몸, 춤, 아, 그냥 저 모든 게 웃겨서 웃은 거야.”
그러더니 내게 되물었다.
“넌 저게 안 웃기니?”
“저건 저 사람의 투쟁이에요. 저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당연히 어머니는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 (중략)
“엄마는 남은 음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먹는 게 대단한 투쟁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저 사람들요, 저 사람들이 싸우는 건 안 보여요? 저 사람들에게 안 미안하냐고요.”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지도, 내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약간 못마땅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래, 하나도 안 미안해. 대체 내가 뭘 미안해해야 하는 거니?”(104~106쪽)
이러한 딸의 모녀관계에서의 해석적 주체 위치 선점과 그 위치에 대한 윤리화(윤리적 윤색)는 이 소설의 서사적 현재에서 어머니와 ‘나’가 함께 만나는 LGBTQ 파티를 매개하는 시퀀스에서 더욱 노골화된다. 이 시퀀스에서 ‘나’는 성소수자들의 공연과 퀴어 퍼레이드의 의미를 이해하는 주체로 자신을 위치시킨다. 반면 어머니의 웃음은 ‘나’에게 있어서 곧바로 비웃음으로 해석된다. ‘나’는 어머니에게 ‘성소수자가 뭔지’ 알 것 아니냐고 질문하면서 어머니의 반응으로서의 특정한 감정을 비난한다. 그러면서 어떤 삶 앞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을 어머니에게 요구하는 대리 주체로서 ‘나’는 감정의 올바른 표현을 알고 있는 평가자의 위치성을 점유한다. 하지만 다음 시퀀스에서 어머니는 그 자신이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성소수자가 뭔지’ 아는 것뿐만 아니라 ‘뭐’라는 타자화된 대상을 넘어, 삶의 경로 속에서 성소수자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다. 딸인 ‘나’는 성소수자를 이해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단지 퀴어한 삶들의 모습을 거기에서 응당 느껴야 하는 윤리적 감정의 올바른 형식으로 번역하고 그 특정 번역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주체를 자임함으로써 퀴어를 대상으로 소비할 뿐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에 대해 ‘대체 내가 뭘 미안해해야 하는 거니?’라는 질문으로 응답한다.
이 응답은 거부의 표지인데, 동시에 이 응답은 위의 하나의 시퀀스를 넘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딸의 관점, 딸이 당연시해 온 감정 규범, 감정의 올바른 표현을 규정하는 평가자의 위치성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의 핵심적 표지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 엄마는 남미새」의 어머니는 사과하고 반성하고 딸의 상처를 돌볼 의무가 있고 적절한 죄책감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하는 어머니의 자리에 배치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 거부를 통해 어머니는 딸의 윤리적 자기이해와 모녀관계에서의 주체 위치 선점 그리고 소위 해석적 주권성 전체를 떠받치는 통로이자 이를 매개하는 대상이 되는 것을 명백하게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딸의 자기서사 자체를 중단시키는 타자-어머니 형상으로 도착한다.
“엄마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상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어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냐고요. 엄마는 언제나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왔으니까. 엄마처럼 운 좋게 제멋대로 산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아요? 가족이고 자식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정말이지……. 엄마는…… 엄마가 바라는 것만…….”
나는 더 적합한 말을 찾아야 했다. 방향을 틀지도, 난파당하지도 않을, 그런 말.
“엄마는…… 엄마는…… 정말이지…….”
어머니가 가로채듯 끼어들었다.
“남미새니?”
“뭐라고요?”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저열함과 비열함이 새삼스럽게도 너무 선명하게 다가왔다.
남미새라니, 세상에, 남미새라니.
어머니는 시선을 멀리 허공에 둔 채 다시 한번 더 말했다.
“내가 남미새냐고.”(108~109쪽)
흐느끼는 건지, 아니면 웃음을 참는 건지 모르겠는 투로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그래, 인정할게. 나는 여미새야.”
여미새라고?
“휴가지에 데리고 왔던 남자랑……(어머니는 한참 동안 망설인다)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건 맞아. 그 시절, 나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너무 혼란스러워서 뭐라도 해야 했어.”
뭐라도 해야 했다고? 뭐라도? 도대체 뭘? 문득, 그날 별장 현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신발들을 정성스럽게 정리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이멜다, 라고 지칭했던 여성. 어머니가 그 여성의 집으로 남자를 불러들였다.(112쪽)
위 시퀀스는 이 소설의 반전인 ‘우리 엄마가 남미새인 줄 알았는데 사실 여미새였음’이 밝혀지는 반전의 연속된 두 가지 시퀀스다. ‘나’는 ‘가족이고 자식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엄마가 바라는 것만’ ‘하면서 살아온’ 어머니에 대해 ‘남미새(남미엄)’가 아닌 다른 ‘방향을 틀지도, 난파당하지도 않을’ 그런 말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퀀스에서 어머니는 그러한 ‘나’의 호명의 주도권을 빼앗아 ‘내가 남미새냐고’ 묻는다. 여기에서 ‘나’는 오랫동안 모녀관계에서 자신이 겪어온 복잡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어머니에 대해 투사하는 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페미니스트 레토릭과 윤리적 자기이해의 언어가, 실은 남미엄이라는 표현형을 통해 어머니의 욕망과 이성애적 가족각본에 근거한 모성의 수행 거부를 하나의 비난 가능한 형식으로 응결시키는 데 복무해왔음을 직면하게 된다. 그동안 이 표현형은 수치심과 분노와 억울함과 증오심과 애착이 뒤섞인 모녀관계에 대한 ‘나’의 감정의 복합성을 어머니의 성적 타락과 딸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대상화된 어머니로 투사하면서, 감정 규범으로서 유효하게 기능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먼저 ‘내가 남미새냐고’ 되묻는 순간, 이러한 표현형과 호명은 더 이상 적절하게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판단을 윤리적 비판으로 승인해온 딸 자신의 해석적 주체 위치도 동반하여 흔들리게 된다.
어머니는 ‘그래, 인정할게. 나는 여미새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커밍아웃은 어머니의 삶을 레즈비언 정체성으로 포획하는 단일한 서사로의 전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머니는 자신이 ‘나’가 어린 시절 가족여행지에 데리고 왔던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시간을 ‘너무 혼란스러워서 뭐라고 해야 했’던 시간으로 서술한다. 이 서술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어머니 자신의 이해를 비로소 직접적으로 매개하면서, 동시에 삶 속에 부려지는 정리되지 않는 욕망과 해명되지 않거나 실패하는 감정들 그리고 삶의 경로 속에서 뒤늦게야 다른 이름을 얻곤 하는 경험의 시간성과 복잡성을 상기시킨다. 이런 점에서 여미새는 남미새에서 치환되어 정리될 수 있지 않고, 남미새-여미새 각본 또한 삶을 포착하기엔 너무 헐겁다. 이 이름들은 취약한 토대 위에 세워져 삶은 그 틈새로 새어 나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소설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대중적 페미니스트 담론 장에서 남미새-여미새 각본을 모녀서사 안으로 가져옴과 동시에, 그 각본 안에 남미엄과 엄미새라는 파생어를 작동시킨다는 점을 재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전체적인 작동 속에서 엄미새는 특히 어머니에 대한 딸의 애착, 돌봄, 이해, 비판을 경유하여, 이러한 딸의 관계적 감정이 윤리적 자기이해와 만나는 지점을 구조적으로 노출하는 표현형이다. 엄미새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돌보고 이해하고 비판하는 자기 자신을 통해 도덕적 자아를 (여전히) 구성하고 있는 딸의 자기서사 각본이며, 모녀관계의 의미를 해석하고 평가할 권한이 딸의 위치성에 집중되는 방식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표현형이기도 하다. 결국 남미엄과 엄미새는 서로 표면적으로는 관계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석적 주체 위치와 감정 규범을 통과한 투사적 매커니즘 속에서는 서로를 보족하면서 동시에 작동하는 동전의 양면으로서의 연쇄적 표현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어머니를 비난하는 딸과 어머니를 끝내 돌보고 이해하려는 이러한 딸의 모녀관계에 대한 질척한 정향은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에서 대상관계 이론 이후에 이르기까지 문제시되어온 모녀관계의 이성애이론(hetero-theory)이라는 또 하나의 각본 속에서 자연화되어, 우리의 시야에서 흔히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아온 것처럼도 보인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동시대 한국소설이 모녀관계를 매개할 때 이 모녀서사들은 어쩌면 어머니-죽이기의 지연 그 자체를 패티시화하면서 페미니스트 관계 윤리의 실험을 이 특정한 하나의 관계 속에서 소진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엄마는 남미새」가 드러내는 모녀관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진실은 타자가 우리가 바라는 방식대로 의미화되거나 적절한 감정을 수행해줄 수 없다는 것에 있으며, 이는 우리가 아무리 이를 윤리적 채무로 조건지우더라도 그렇다. 이 소설은 레즈비언 어머니 인물형의 출현 그 자체를 넘어, 그러한 어머니의 욕망과 삶의 형식들을 비판 가능하고 설명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딸의 감정 규범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조직해온 토대가 바로 이성애규범적 가족각본과 모성의 연쇄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 대한 복무는 전혀 윤리적이지 않고 페미니스트적이지 않으며 퀴어하지도 않다.
우리는 유년을 넘어선 삶의 긴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사랑, 돌봄, 이해, 미안함, 인정 등 그 구획된 감정의 표지만 달라질 뿐 지속적으로 뭔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딸의 위치성과 그 전략과 자기이해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응결된 딸의 자기서사에 대해 얼마나 질문해왔을까? 그리고 이러한 청구의 자리는 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가? 손보미의 「우리 엄마는 남미새」는 레즈비언 어머니라는 하나의 ‘금기’를 통해 동시대 모녀서사의 문법에 균열을 낸다. 어머니는 아무 유감도 없이 나와 다른 하나의 타자이며, 우리는 이 관계에서 아무 갚아야 할 빚도 청구해야 할 빚도 없고 무엇으로도 이 채무관계를 도덕화하거나 (페미니스트 문법을 차용하여) 윤리화하는 방식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이 한국형 딸들이 갖는 자기서사와 욕망에 대해 낯설게 보도록 만드는 손보미의 「우리 엄마는 남미새」를 통해, 우리는 결론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라는 망령으로부터 딸들은 어떻게 진실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1) 손보미, 「우리 엄마는 남미새」, 『현대문학』 2025년 9월호, 현대문학, 2025. 이하 본문 인용 시 쪽수만 본문에 병기한다. 모든 인용문 속 강조표기는 본문에 따른 것이다.
2) 남미새는 남자에 미친 새끼, 여미새는 여자에 미친 새끼, 남미엄은 남자에 미친 엄마, 엄미새는 엄마에 미친 새끼의 줄임말이다.
3) 이는 어머니를 인물 서술자로 설정하는 것과 상관없이 초점화 역학과 이를 통해 구성되는 내포작가 수준에서 딸의 퍼스펙티브를 호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