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드라마 <히티드 라이벌리>(2025)] 걸어 다니는 슬픔들과 ‘가짜’ 레즈비언들: 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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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작성일 2026-03-19 15:37본문

<히티드 라이벌리(Heated Rivalry)> 시즌 1, 제이컵 티어니 감독, 2025.
#비엘 #레즈비언 #드라마 #소셜미디어 #정체성검열 #하위문화 #부치 #퀴어규범성
배우 허드슨 윌리엄스가 밀라노의 한 패션쇼에 초대받아 아주 멋진 사진을 남겼고 그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공유되어서 화제가 된다. 한 레즈비언 트위터(현 X) 유저가 해당 사진을 공유하면서 “게이 남성들이 레이디 가가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한다, 브로!”라는 요지의 농담을 남겼다. 많은 유저가 해당 트윗을 읽고 공감하며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유저가 “너는 윌리엄스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라며, 네 안의 바이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라며 ‘가짜 레즈비언’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당 트윗을 올린 유저를 비롯하여 히티드 라이벌리의 레즈비언 팬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이버 불링이 시작됐다.

[그림 1] 문제의 해당 트윗, “As a lesbian, Hudson Williams is to me what lady gaga is to gay men(레즈비언인 저에게, 허드슨 윌리엄스는 게이 남성들의 레이디 가가와 같은 존재입니다).”1)
전 세계가 들썩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6년 상반기 겨울은 뜨거웠다. 열기의 중심에는 한 캐나다 드라마가 있다. 퀴어 드라마 ‘Heated Rivalry(히티드 라이벌리)’가 그 주인공이다.
레이첼 리드의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된 이 드라마는 프로 리그 하키 선수들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리그 1, 2위를 다투는 라이벌 ‘셰인 홀랜더(허드슨 윌리엄스)’와 ‘일리야 로자노프(코너 스토리)’의 밀고 당기기다. 화제성을 원하는 프로 리그에 의해 라이벌이 되었지만, 주니어 시절부터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던 둘은 빠르게 가까워진다. 하지만 하키 때문에 폭동도 일어나는 북미에서 이들의 비밀 연애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십 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애써 마음을 부정해 보지만, 매번 속절없이 서로에게 빠져들고 만다. 두 사람은 몇 가지 극적인 사건들을 계기로 결국 사랑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다양한 시청자들이 함께 즐길 수 있었던 드라마 히티드 라이벌리는 공개 직후 전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드라마는 퀴어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그동안 미디어가 퀴어 서사를 다루어 온 방식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드라마는 여섯 에피소드 내내 생기가 넘친다. 또한 두 인물을 둘러싼 퀴어 혐오적인 프로 하키 리그 사회의 압박을 과장하지도, 탈정치화하지도 않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는 서사적 공간을 마련한다.
우리는 그간 퀴어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다뤄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우리에게 처절함만을 허락해 왔을지도 모른다. 미디어 속에서 퀴어들은 매번 비참하고, 슬프고, 힘겹고, 죽고, 다치고… 아무튼 처절하다. 특히 레즈비언 사랑 이야기는 화면에 회색밖에 안 나오는 심각한 멜로 드라마, 아니면 자동차가 꼭 나오는 범죄물, 이 두 부류만 만들기로 무슨 무슨 법이 제정된 것 같다. 그간 퀴어 미디어는 열심히 주류 미디어를 침습했지만, 그 대가로 얼마간의 통속화를 감수해야 했다.
사라 아메드는 이성애 중심적으로 작성된 사회의 ‘행복 각본’이 어떻게 퀴어들을 불행과 부정성의 정동과 연동시키는지를 고발한다. 행복 각본이란 특정한 삶의 경로를 행복과 연결시키며 규범적 주체를 생산하는 사회적 서사를 의미한다. 이 행복 각본은 대체로 결혼과 재생산, 정상적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퀴어들은 언제나 이 서사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2) 이러한 각본들에 맞서 핼버스탬은 성공과 재생산만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이성애 규범성 및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도전하는 기술로서의 퀴어 부정성에 주목한다. 사회가 제시하는 행복 각본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3)
한편 근래의 미디어는 행복 각본 속으로 퀴어를 교묘하게 포섭하려 한다. 이것은 올바른 성원권에 대한 논의와는 거리가 멀다. 미디어는 소비자로서의 퀴어만을 선취하고, 시민으로서의 퀴어는 기꺼이 배제한다. ‘행복한’ 소비자가 된다면 너 역시 주류 사회에 편입될 수 있다고 속삭이는 듯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어떤 퀴어들은 여전히 불행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퀴어 부정성에 대한 최근의 논의는 유효한 비판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스스로가 거대한 슬픔과 불행의 아카이브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히티드 라이벌리가 보여주는 정서는 꽤 이례적일 수밖에 없다.
퀴어의 삶, 어쩔 수 없이 소란과 충돌로 점철된 이 싸움은 장기전(The long game)이다. 사실 승리랄 것도 없는 싸움이다. 우리는 매번 실패하고, 지고, 도래할 퀴어 유토피아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그러니 이 장기전에서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이야기는 얼마나 귀한가? 나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웃고, 울고, 설렜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퀴어 미디어를 보면서 복잡하거나 슬픈 생각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행복했다.
히티드 라이벌리에 대해 다룬 기사를 보면 게이 남성들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퀴어 비남성 특히 레즈비언 여성들도 즐겨본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등장한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던 것 같다. 없을 때는 배고픈 줄도 모르다가 밥 한술 뜨고 나서야 뒤늦게 허기를 느끼는 사람처럼, 우리는 퀴어의 순수한 행복과 즐거움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회의 행복 각본과 어긋나는 퀴어들만의 행복의 방식과 가능성을 개발하는 한편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축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어질 장기전을 위해.
한편 갑작스럽게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쇼의 주인공들은 소셜미디어 때문에 여러 차례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특히 와시안(Wasian) 정체성을 지닌 허드슨 윌리엄스와 커밍아웃한 퀴어 배우인 프랑수아 아르노에게 쏟아진 혐오 발언들은 상상을 초월했다. 또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캐스트를 둘러싼 인종차별 논쟁이 벌어지면서 팬덤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실제 인종차별 문제를 논의하기보다는 배우 개인에 대한 공격과 루머가 확산되는 일이 더 많았다. 심지어 배우의 퀴어 정체성과 사생활을 겨냥한 혐오 발언까지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욱 과열되었다. 결국 배우들은 이러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공동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이러한 상식 밖의 혐오적인 반응들은 드라마 팬덤 안에서도 이루어졌다. 퀴어들의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퀴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팬덤은 히티드 라이벌리를 향유하는 퀴어 팬들을 자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앞서 설명한 ‘가짜 레즈비언 사건’도 그러한 공격의 예시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팬덤 싸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는 레즈비언 정체성을 둘러싼 규범들의 긴장 관계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레즈비언들은 헤테로 정상성 사회로부터는 남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레즈비언 사회로부터는 ‘진짜’ 레즈비언답게 굴어야 한다는 즉, 정해진 레즈비언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을 이중으로 받는다. 그들에 따르면 남성 셀럽들을 선망하고 따라 하거나 비엘을 즐겨보는 레즈비언들은 ‘비정상’ 혹은 ‘가짜’ 레즈비언이다.
비욘세, 레이디 가가, 셰어는 게이 남성들이 사랑하는 여성 디바다. 게이 남성들은 이들의 스타일을 모방하거나 이들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등 그들의 ‘팬심’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이들의 ‘게이다움’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여성 디바들을 모방하고 선망하는 것은 게이다운 일로 여겨진다. 우리는 이들이 여성 디바들을 선망하는 게 곧 그들과 데이트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게이 남성들이 여성 셀럽들을 모방하고 선망하는 것은 여성성을 표현하는 남성 롤모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빌리 포터, 보이 조지, 샘 스미스, 루 폴 등 여성성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성 셀럽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 게다가 인종차별적인 미디어 산업으로 인해 유색인종 퀴어들은 자기 모습을 반영할 수 있는 롤모델을 찾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 여성 셀럽들에게서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더 쉽게 발견하는 것이다.
남성 아이돌이나 남성 셀럽, 혹은 남성 픽션 캐릭터를 덕질하는 레즈비언들도 마찬가지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사정이 낫지는 않다. 우리도 언제나 롤모델이 부족하다(농담을 조금 보태자면, 우리는 롤모델이 너무 부족한 나머지 대륙 너머의 대학 합창부 단원마저도 ‘착즙’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부치 레즈비언들은 자기 모습을 반영하고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여성 셀럽에게서 찾는 것이 무척 힘들다. 그래서 남성 셀럽들을 모방하거나 선망하는 경우가 있다. 나(부치 레즈비언과 트랜스 마스큘린 사이 어딘가에 대충 자리 잡고 있다)의 경우에는 80~9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홍콩 남자 배우들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유덕화를 정말 사랑했는데 그래서 아직도 맥주는 칼스버그만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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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영화 <천장지구(1990)> 속 유덕화의 모습, 유덕화는 일종의 내 ‘부치 추구미’였던 셈이다.
그러나 레즈비언들의 이러한 선망은 게이 남성들의 선망과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해석된다. 레즈비언들의 선망은 곧바로 성애적인 것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레즈비언들이 남성 셀럽을 선망할 때 그것이 곧 그 남성과 데이트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레즈비언들의 남성 셀럽 선망은 곧바로 그들의 정체성을 진정성의 심문대에 올린다. 이러한 정체성 경질은 외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레즈비언 사회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남성 캐릭터나 셀럽을 덕질하는 레즈비언에 대한 질타는 요즈음의 일만이 아니다. 이러한 정체성 경질의 역사는 ‘팬픽 이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팬픽 이반은 남성 연예인이나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한 팬픽션 속 인물들의 모습을 모방하면서 자신들만의 동성애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던 1990~2000년대 레즈비언·퀴어 여성 팬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당시 팬픽 문화에서 모방과 선망의 대상이 된 남성 연예인들은 H.O.T.의 문희준이나 강타 같은 아이돌 스타들이었다. ‘게이 독본’ 즉, 퀴어 롤모델이 거의 없던 시절, 팬픽 속 ‘이상한’ 남성 캐릭터들은 청소년 퀴어에게 훌륭한 지침서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팬픽 속에 재현된 퀴어한 남성 셀럽들의 양태를 모방하며 그들이 되고 싶은 모습과 양식을 만들어 나갔다. 팬픽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퀴어 정체성 형성의 실험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은 전부 무시된 채 당대에는 혹은 이후에도 팬픽 이반들은 레즈비언들에게 언제나 ‘가짜’ 취급을 받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어떤 레즈비언들이 남성 셀럽들을 모방하고 선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정말로 그들 자신 안에서 아직 발현되지 않은 양성애적인 혹은 범성애적인 욕망의 일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뭐 어쨌다는 말인가? 어차피 섹슈얼리티는 유동적이다. 게다가 그가 되고 싶은 것인지, 그를 원하는 것인지 모호한 경계의 감정은 원래 퀴어의 전매특허다. 그것은 원래 퀴어한 감정이다. 세즈윅 역시 동일시와 대상애의 구분이 모호한 것을 동성애적인 감정의 특징으로 보았다. 한편 퀴어 페미니스트 이론가 게일 루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부치-부치 에로티시즘은 부치-펨 섹슈얼리티보다 기록이 훨씬 적고, 레즈비언들이 늘 그것을 인식하거나 이해해온 것도 아니다. 그런 관계가 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레즈비언 문화에는 그런 관계와 관련된 모델이 드물다. 다른 부치를 욕망하는 많은 부치는 게이 남성 문학과 행위를 이미지와 언어의 원천으로 보아왔다. 부치-부치 섹스의 성애적 동학은 때때로 서로 다른 종류의 남성들 사이의 성적 관계를 위한 많은 견본을 발전시켜온 게이 남성의 것과 닮아 있다.4)
루빈은 부치와 부치 사이의 섹슈얼리티가 남성 동성애 문화의 이미지와 언어를 참조해 발전해 왔다고 지적한다. 즉, 남성성을 표출하는 주체들 사이의 욕망을 설명하는 하나의 견본으로서 부치 레즈비언과 남성 동성애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차는 다른 퀴어 하위문화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미조구치 아키코는 비엘을 향유하는 여성 독자들 사이의 관계를 ‘버추얼 레즈비언’적 관계라고 설명하기도 한다.5) 미조구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퀴어의 욕망과 동일시를 서로 완전히 분리한 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왜 어떤 방식의 욕망과 동일시는 ‘가짜’라는 이름으로 배제되는 것일까? 레즈비언들의 남성 선망이 유달리 공격의 대상이 되는 이유, 심지어 이러한 공격이 레즈비언 사회 내부에서 더 심하게 이루어지는 까닭은 우리를 둘러싼 정상사회의 압력이 너무나 거세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한’ 우리를 향해 언제나 “거봐, 그거 그냥 착각이었지?”라고 말할 준비가 된 정상 사회에 대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는 우리일 뿐이다.”라고 외쳐야 했으니까. 특히나 여성들 간의 성애적인 감정은 청소년기 한때 스쳐 지나가는 정념에 불과하다는 통념에 맞서 나 자신을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실제로 사춘기가 끝나면 많은 이들이 탈반한다). 하지만 그 답이 서로를 향한 정체성 경질일 필요는 없다. 진정성은 정상 사회가 요구하는 억지일 뿐이다.
퀴어 미디어를 향유하는 것이 더 이상 퀴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퀴어 미디어를 어떻게 더 퀴어하게 향유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미디어를 향유하는 방식은 다양하므로 각자의 공간들을 존중하자는 말은 너무 뻔하고 안일한 말일까? 그러나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보면 이 뻔한 말이 정말 필요해 보인다. 적어도 나는 우리가 서로의 욕망을 경질하지 않을 때 좀 더 다채로운 가능성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였으니까.
1) https://x.com/bookishlesbians
2)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성정혜·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2021.
3) 잭 핼버스탬,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허원 옮김, 현실문화, 2024.
4) 게일 루빈, 『일탈』, 임옥희·조혜영·신혜수·허윤 옮김, 현실문화, 2015, 477-478쪽.
5) 미조구치 아키코, 『BL 진화론』, 김효진 옮김, 길찾기, 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