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리틀 프라이드, 서장원] 연대 너머의 연대를 상상하며: 서장원 「리틀 프라이드」 읽기: 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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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작성일 2026-01-09 10:17본문

리틀 프라이드[1](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25), 서장원
#트랜스남성 #인셀 #사지연장술 #트랜지션 #우정의가능성
어디 내놔도 부끄럽게 여겨지는 우리들
존재 자체가 불법인 비국민, 불법 노동자, 홈리스,
성병캐리어, 각종 정신병자, 장애인, 노출광,
약물 사용자, 복장전환자, 성중독자들을 포함하는
각계 각층의 퀴어 모임
-2023년 노프라이드 파티 포스터 중 일부-
1. 수치심의 정동경제와 흥을 깨는 트랜스
소설의 초점화자 ‘나’는 트랜스 남성이다. 유년 시절부터 종종 남성으로 인식되던 ‘나’는 성인이 된 후 호르몬 투여와 탑 수술을 거치며 안정적으로 시스젠더 남성으로 패싱되는 외모를 가진다. 더는 여성으로 보이는 일도, 공공장소에서 불쾌한 시선의 대상이 되는 일도 겪지 않는 ‘나’는 길을 가다가도 이따금 멈춰 서 자신의 “달라진 실루엣”(107)을 재차 확인할 정도로 삶의 안도감을 되뇐다. 이처럼 ‘나’는 자신이 선택한 젠더 표현을 수행하는 데에는 얼마간 성공하며 패싱 욕망을 충족하지만, 남성으로서 조직 내에 매끄럽게 섞이기엔 여전히 역부족이다. 소설의 첫 부분에서도 서술되듯, ‘나’가 평균 키의 여성에서 작은 키의 남성이 됨에 따라 ‘나’의 몸은 소위 ‘남성성’의 기호로부터 다소 멀어진 남성의 몸으로 의미화된다. 이 무렵부터 ‘나’는 루키즘(외모지상주의)의 경제 원리를 바탕으로 미모의 남성들이 인정받고 곧 가치를 창출하는 회사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력적인 처세술을 학습하며 자기 계발에 매진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스틴은 첫 만남부터 ‘나’의 시선을 가져간다. ‘나’보다도 키가 작은 오스틴은 그저 사무실에서 “구부정하게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남자”였다가도 “박학다식하고 재치”(106) 넘치는 캐릭터를 언제든 연기할 준비가 된, ‘나’가 본받아야 할 견본이 되어준다. 빈티지 의류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을 습득해왔고 남다른 아이디어와 실행력을 겸비한 데다, 인터뷰어로서 탁월한 자질과 기세 또한 겸비한 오스틴은 유행에 민감한 직장 내 필수 인력으로서 “개국공신”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쥔다. 그와 달리, ‘나’는 늘 자기 검열에 집착하느라 에너지를 탕진하기 일쑤이며, 농담을 길어 낼 여유조차 확보하지 못한다. 좀처럼 자신감을 내보일 수 없는 상태로 하루하루 박살나는 기분에 짓눌리는 ‘나’는 키가 작은 남성이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오스틴에게 미약하게나마 “동지 의식”(106)을 느낀다.
평소 접점이 없던 오스틴은 같은 대학 출신임을 이유로 ‘나’에게 대화를 걸어온다. 그리고 자기 직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나’는 비율도 안 좋고 미남도 아닌 오스틴이 비율 좋은 미남들만을 물색해 인터뷰를 따 내는 작업이 즐겁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살아온 내내 자기 몸에 대한 부정적 감정에 정향되어온 ‘나’는 신체에서 비롯된 수치스러움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이는 ‘나’가 오스틴과 접촉할 실마리가 되어준다. 다만, 여기서 ‘나’가 느끼는 유대감이 비단 왜소한 신체 특성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오스틴은 실질적인 팀장 노릇을 하느라 평소 다른 직원들 앞에선 좀처럼 내비치지 않던 고충도 ‘나’에겐 털어놓으며 정서적으로 연약한 모습을 유감없이 내비친다. 이러한 대화의 과정에서 ‘나’는 오스틴을 “언제나 나를 잡아 줄 사람, 내게 여기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113)으로서 신뢰를 축적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특기할 점은, ‘나’가 오스틴에게 마음이 기울어가는 후경에 ‘나’와 전애인 혜령의 갈등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나’는 매번 유사한 이유로 혜령에게 꾸중을 들어왔다. 현재 직장 ‘올드독코퍼레이션’에 지원하고 결과를 기다리던 ‘나’는 만일 합격한다면 그 이유가 사장 ‘쿠엔틴’이 스스로 편견 없는 사람임을 내세우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위축된 태도를 비친다. 이 말에 혜령은 ‘나’에게 “늘 좋지 않은 상황을 너무나 집요하게 생각한다”며, 그리고 이것을 자신에게도 옮기는 것 같아 지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나’의 이러한모습이 “비굴한 태도”이며 “퀴어로서 프라이드가 부족한 것”(109)이라며 다그친다. 그러나 ‘나’는 자긍심을 가지라는 혜령의 말을 쉬이 실천에 옮길 수가 없다. ‘나’의 몸 자체가 이미 수치심으로 경계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논의를 참고해볼 수 있다.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정동 경제’라는 새로운 감정 모델을 제시하며 감정이 ‘무엇인지’ 물을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언하자면, 감정은 어떤 대상이나 기호에 실증적으로 내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순환에 따른 효과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마치 어떤 상품의 가치가 상품에 본질적으로 귀속되는 게 아니라 교환 행위의 반복을 통해 ‘잉여’가치를 산출하면서 증식하듯, 감정과 그 대상 역시 유동적으로 흐르며 경제성을 확보한다. 몹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감정의 흐름이 몸의 표면을 새롭게 물질화(materialisation)한다는 것이다. 아메드가 강화(intensification)라고 명명한 이러한 작용에 따르면 몸의 표면이란 본질적으로 결정된 닫힌 범주가 아니라 열린 범주로서 감정의 끊임없는 순환을 통해 구성되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는 정치적, 윤리적 장소가 된다.
감정, 그 중에서도 수치심이 덕지덕지 자국(impression)을 남긴 피부로 표면화 된 ‘나’의 몸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다가도 숨기게 한다. 아메드는 수치심이 작동하는 핵심에 바로 이러한 이중의 작용이 있다고 설명한다. 목격자를 필요로 하는 수치심은 주체가 대상에 대한 애착을 내비치고 싶어 하다가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억압해야 하는 고통의 반복으로 작용한다. 트랜스 남성의 몸에 대한 수치심에 지속적으로 정향되어 있는 ‘나’는 자해적인 내러티브를 상상하며 이를 애인에게 풀어놓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혜령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관둘 수가 없는데, 시스 규범적인 기율 하에서는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몸을 재정향하는 일이 도무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누적되며 끝내 혜령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이후, ‘나’는 동료에게 괜찮은 남자처럼 보이고 싶어 애썼다가도 이것이 절연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때 이 모든 ‘나쁜 느낌’은 타자나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에 기인 한 것으로 여겨진다.[2]
2. 돈이 되는 퀴어와 돈이 안 되는 퀴어
몸의 경계가 감정의 순환에 따라 재구조화 되면서 몸이 속한 공간 역시 물리적인 변환을 겪는다. 아메드는 수치심이 신체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을 변형시키고 새롭게 형성하는 일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이 때 이 신체적이고 사회적인 공간들은 이미 특정 규범이 편히 기거할 수 있게끔 설정되어왔다. 일찍이 수잔 스트라이커가 LGTBT/퀴어의 역사에 트랜스가 배제되어왔다고 지적하며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 개념을 제시한 바와 같이[3], 실제로 ‘나’에게 시스 규범적 사회의 공간들은 너무나 불편하다. 이에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촉각을 곤두세우며 혜령을 성가시게 군다. 트랜스의 수치심을 읽어낼 수 없는 혜령이 “푹 잠기는 느낌”을 약속 받는 곳에서 ‘나’는 도무지 몸을 쉬게 할 수가 없으며 이 때 느껴지는 모든 이질감들이 높은 해상도로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때 ‘나’의 구구절절한 수치심, 구멍이 숭숭 뚫린 몸에서 쉴 새 없이 새어나오는 수치심은 혜령이 차지하는 공간을 계속 불편하게 침범하며 끈적거리는 정동적 대기(atmosphere)를 형성한다. 시스젠더인 혜령에게 ‘나’는 ‘비관론자’,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사람’이자 ‘즐거움을 죽이고’ ‘기꺼이 불행을 초래’하는 사람으로 비춰진다.[4]
혜령이 이런 ‘나’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와중에 알게 된 오스틴에게 ‘나’는 새로운 우정에 대한 기대를 건다. 우선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스틴은 생득적 외양으로 말미암아 절대 “미남”은 될 수 없기에 “선남”으로서 호감도를 적립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나’와 오스틴 사이의 교감이 “정확히”(112) 호응하는 대목은 올드독코퍼레이션[5]의 실상에 서로가 동의를 이루는 지점이다. 생태 윤리적 가치관을 내세우며 설립된 올드독은 “지속 가능한 패션”(112)을 표방하지만, 그저 ‘모범 소비자 정체성’을 재/생산함으로써 환경 윤리를 산업 논리로 덮어왔다. 달리 말해 올드독은 외려 소비주의 욕망을 부추기며 생태 파괴를 가속하는 기만적 공략을 통해 기업 가치를 키워온 것이다. 여름밤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10월, “해마다 더워지는 날씨가 올드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114) 이야기를 나누는 두 인물은 기후 위기를 악화시키는 데에 이 친환경 스타트업 기업이 일조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나’가 수치심의 정동적 궤적을 그려왔다는 지점과 더불어 ‘나’와 오스틴이 회사의 허상을 직시하는 대목에서 일시적이나마 강한 결속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천천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서사 전반에 걸쳐 자긍심에 근거한 퀴어 정치가 배타적으로만 작동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벼려내고 이것이 자유주의적 정치, 일명 ‘퀴어 리버럴리즘(queer liberalism/퀴어 자유주의)’과 공모하는 모순성을 상세히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는 LGBT/퀴어가 이른바 ‘핑크산업’을 주도하는 유능한 소비자이자 감각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보유한 집단으로 가시화되는 전략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개념[6]이다. 실제로 ‘나’에게 있어 “퀴어 프렌들리”라는 일개 “콘셉트”(108)는 소비자본주의의 기호로서 현상에 맺히고 이는 나의 수치심과 적대적으로 얽힌다. 이를테면 ‘나’는 혜령과 방문한 술집에서 프라이드 깃발이 밝은 곳에서 얼마나 볼품없을지를 상상한다. 이는 불을 끈 채로 샤워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경험, 혜령과 갔던 퀴어 퍼레이드에서 아름답게 다져진 몸을 보며 소외감에 압도되던 시간과 유비되며 지금 ‘나’의 몸을 자긍심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또한 상술하였듯, ‘나’는 쿠엔틴이 자신을 채용한 점에 대해서도 과할 정도로 감사함을 느끼며, “쿠엔틴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편견 없는 사람이란 걸 증명하려고 트랜스젠더를 고용할 것”(108)같다고 토로한다. 관련해서 리사 두건(Lisa Duggan)은 신자유주의적 흐름 내 다문화적 다양성이 어떻게 평등 정치라는 환상으로 둔갑하는지 지적한바 있다. “시늉에 불과한 포용적 제스쳐”로서의 이러한 통치 모델은 모범적인 시민 및 소비자로 동화될 수 있는 대상들에게만 권리를 부여하며 자유주의를 강화하는 생명정치를 가동한다.[7] 규범을 전복하려는 몸짓이 외려 기존의 규범을 고착화하는 데에 동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주변화 되어온 ‘나’의 몸은 기업의 앨라이 의식이 상품주의와 교묘히 결탁하며 뒤틀리는 양상을 기민하게 감각하기에 자신의 채용 소식을 마냥 덮어놓고 수긍할 수가 없으며, 관용적 대상의 일환이자 진보적 수사로서 기업 이미지에 착종되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자문할 수밖에 없다.
‘나’가 자신의 몸에 대해 가져온 트라우마는 수치심의 언설을 통해 반복적으로, 또 강박적으로 출몰한다. ‘만일 트랜스 남성인 어느 할리우드 배우가 다 성장하기 전에 트랜지션을 수행했다면, 그래서 왜소한 신체를 지녀 매력자본을 획득할 수 없었다면 할리우드 데뷔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가정을 늘어놓는 ‘나’는 별 생각 없이 영화를 기다리던 혜령의 평화를 깨트린다. 그런데 이때 ‘나’의 상상이 그저 편집증적 망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대만 스트립쇼의 사례를 통해 확인된다. 혜령이 대만 교환학생 시절 방문한 대학 근처의 술집에서는 10 달러 짜리 스트립쇼가 열리곤 했다. 누구나 무대에 오를 수 있되 관객을 많이 웃기는 참가자가 높은 순위에 오르는 이 쇼에는 노화, 장애, 질병의 흔적을 내보이는 퀴어들이 가득하다. 잭 핼버스탬(Jack Halberstam)은 트랜스 몸과 젠더 유연성이 초국가적 경제성으로 환원되는 와중에 전혀 다른 시공간에 배치되는 양상을 지적한 바 있다.[8] 이를 예증하듯 소설 속 어떤 트랜스의 몸은 핑크머니를 끌어 모으는 몸으로 호응을 얻으며 할리우드 영화로 유통되는 데 반해, 또 다른 몸은 대만 어느 대학가의 ‘10달러 짜리 스트립쇼’에서 관중들을 웃기며 “따뜻한 박수”(124)를 받는 데에 그친다.
이와 같은 극명한 대비를 통해 부각되는 지점은 ‘나’ 또한 혜령에게 매혹의 대상이 결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혜령은 ‘나’에게 스트립쇼에서 본 참가자들의 목록을 열거하며 그 중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문워크를 추던 트랜스맨이 멋져보였다고 전한바 있다. ‘나’는 이를 두고 혜령이 스스로를 트랜스 친화적이라고 내세우기 위한 제스처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아무리 유행에 걸맞은 옷을 걸쳐 입는다 하더라도 탑 수술의 흉터를 고스란히 간직한 ‘나’의 몸은 트럭에 올라 “‘QUEER’ 혹은 ‘PRIDE’라고 보디페인팅”을 칠한, “땀으로 번들거리는, 잘 다듬어진 예쁜 몸”(112)이나 할리우드 산업에서 탐낼만한 몸이 될 수 없다. ‘나’는 기껏해야 남성동성사회에서 통하는 유머나 단련하며 “유쾌한 코미디언”(106) 구실을 해야하는데, 이는 절대 누군가를 반하게 할 수 없는 몸을 지닌 채로 상대방을 웃겨야하는 쇼 참가자들과 나란히 놓이며 좌절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이런 ‘나’는 자신이 혜령에게 그저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으로 타자화되어온 것은 아닌지, 달리 말해 혜령의 사랑 역시 그저 콘셉트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또 다시 지긋지긋한 의심에 빠진다.
3. 지금-여기의 연대를 넘어서는 연대를 향해
이렇듯, 「리틀 프라이드」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모든 서술이 초점화자 ‘나’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작품 속 어떤 장면도 전지적이거나 객관적 사태로 지시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가장 혼란스럽게 표출되는 대목은 ‘나’와 오스틴이 어느 멕시코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오스틴은 인터뷰 대상자로 출연한 커플의 여성에게 추근댄 혐의로 이 주 간의 정직 처분을 받는다. 이후 복귀한 오스틴에게 ‘나’는 맥주를 마시자 제안한다. 즉각적으로 그와 절연한 쿠엔틴이나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나’는 그의 성정을 “은연중에 재구성”(113)할 정도로 끈끈한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스틴이 “맥주 병을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으며”(115) 여성혐오적 발언을 내뱉을 때 ‘나’가 그에 대해 품고 있던 믿음은 산산조각난다. 자신이 집적댄 여성이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이고 그렇기에 사귀던 애인에게 차였을 것이라는 오스틴의 터무니없는 추론에 ‘나’는 얼이 빠진다. 그리고 이 발언만은 기만이나 시늉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115) 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대화에서 ‘나’가 오스틴과 관계를 지속하기 어려우리라는 사실이 일차적으로 노출된다. 호모 소셜(homo social, 남성동성사회)에서는 누구보다 예리한 눈썰미와 빠른 눈치, 합리적 판단력을 가진 것으로 이름을 날린 오스틴의 역량이 여성과 엮이는 상황에서는 전혀 발휘되지 않는 한계가 드러난다. 오스틴은 애인과 헤어져 영상을 내려달라는 여성에게 그 조건으로 자신과 커피를 마시자며 협박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내는 큰 소리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 일순간 조용해지는 것”과 그들이 “곧 일부러 의자를 소리나게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문서와 가방을 챙겨 자리를 뜰 준비”(116)를 하는 분위기 또한 전혀 파악 하지 못하고 있다.[9] 더 나아가 오스틴은 자신이 인셀남(비자발적 순결주의 남성)이 된 원인이 오롯이 외양에 있다고 판단하고 사지 연장술을 받기로 결정한다. 그는 이 수술로 말미암아 삶의 “새출발”과 더불어 “페미가 아닌 좋은 여자”(117)도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진다. 끝으로 오스틴이 이 혐오에 뿌리를 둔 인셀 남성성의 수치심을 ‘나’가 체현한 트랜스 수치심과 동일 범주로 견줄 때, 그러면서 서로가 ‘전우’이지 않냐 되물을 때, ‘나’는 그와의 우정을 끝내 저버릴 수밖에 없다.
살펴본 바와 같이, 「리틀 프라이드」는 “한명의 성인 남성으로서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충분히 관계”(119) 맺으라는 성별정정의 폭력성이 오스틴의 지배적 이성애 남성성 규범과 맞닿는 지점과 틀어지는 순간을 절묘히 드러낸다. 또 한편으로 소설은 ‘나’의 취약성을 부조하며 퀴어 집단 내부의 불균질한 위치성을 조망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 정치가 봉착한 한계와 모순을 예리하게 묘파해낸다. ‘나’는 퀴어 애인인 혜령과의 관계 속에서 선형적이고 발전론적인 서사에 기입될 수 없는 뒤처진(backward) 존재로서, 자긍심만을 원동력으로 삼는 자유주의 성정치에 균열을 내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특정 정체성을 위한 권리의 전략적 이용이 다른 이들에 대한 불평등을 제도화하는 지점을 꼬집으며 “퀴어라는 용어가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의미한다는 점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한다”[10]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소중한 전언을 음미하며 안일한 자유주의나 무한 다원주의로 수렴되는 삶의 양식을 넘어서는 더 살만한 삶을 열기 위해 우리가 비평적 언어로서의 수치심, 연대의 자원으로서의 수치심을 더 떠들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각주
- 이 글에서 인용한 소설 본문과 쪽수는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5)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한다.
- 사라 아메드 지음, 시우 옮김, 『감정의 문화정치』, 오월의봄, 2023, 228면.
- 수잔 스트라이커 지음, 루인, 제이 옮김, 『트랜스젠더의 역사』, 이매진, 2016 참고
- 사라 아메드 지음, 김다봄 옮김, 『페미니스트 킬조이』, 아르테, 2023, 참고
- 이하 올드독
- 한우리, 「퀴어는 항상 급진적인가」, 『말과활 12호』, 2016 참고
- 리사 두건 지음, 한우리, 홍보람 옮김, 『평등의 정치』, 현실문화, 2017, 112쪽.
- Judith Halberstam, “Queer Temporality and Postmodern Geograpies”, 『In a Queer Time and Place ,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5.
- 이 상황은 오로지 \\\'나\\\'에 의한 서술로 전달된다.
-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양효실 옮김, 『연대하는 시체들과 거리의 정치』, 창비, 2020, 10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