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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리뷰팀 댓글 0건 작성일 2025-11-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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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 2024 

『콘클라베』, 로버트 해리스 원작




※ 해당 글에는 영화 <콘클라베>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인문화 #인터섹스 #교황 #트랜스젠더퀴어




콘클라베는 로마 가톨릭의 주요한 의식 중 하나로 교황 서거 후 밀실에서 추기경들이 모여 다음 교황을 뽑는 행사를 의미한다. 영화 콘클라베는 바로 그 콘클라베에서 교황 선발을 두고 벌어지는 일을 다룬 정치 스릴러 영화이다. 〈콘클라베>는 추기경 단장 로렌스의 시선을 따라 영화가 전개되는데 올곧고 정의로우며 신실한 그의 시선에 주요한 후보들은 모두 조금씩 미덥지 못한 후보들이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모든 것이 완벽하고 정결한 후보 빈센트 베니테스인펙토레 추기경이 눈에 띄게 되지만 세력이 없는 그가 교황이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기적처럼 베니테스 추기경이 교황이 된다.

로렌스는 이를 두고 하나님의 역사라며 기뻐하지만 베니테스는 로렌스에게 엄청난 비밀을 들려준다. 로마 가톨릭 교리상 교황은 남성만 될 수 있다. 하지만 베니테스 추기경은 인터섹스였던 것이다. 베니테스는 서른 살 경 자신이 여성과 남성의 장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몰래 여성의 장기를 없애는 수술을 받으려고 했으나 나는 신이 만드신 그대로 모습이므로 잘못된 게 없으니 교정의 조치가 필요 없다는 확신으로 수술을 단호히 거부했다고 로렌스에게 담담히 고백한다. 그는 이후로도 여전히 가톨릭 사제로서 신과 인간에게 봉사하며 살아가다 교황으로까지 부름을 받는다.

 

이것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트랜지션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트랜스 젠더퀴어다. 여성보다는 남성에 가까운 젠더를 가지고 있다. 그간 나 자신을 레즈비언 부치로 정체화해 왔으나 콘클라베>를 계기로 트랜스 남성으로 재정체화했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온 고민은 이런 지점이었다. ‘트랜지션하지 않은 내가 감히 트랜스라고 스스로 정체화해도 되는 걸까?’ 그래서 빈센트 베니테스캐릭터를 보았을 때 무척 고무적이었다. 트랜지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호한모습으로 남기로 한 트랜스 캐릭터를 미디어에서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베니테스 캐릭터는 내가 부치에서 트젠남으로 재정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미디어에서 트랜지션하지 않은 트랜스젠더는 언제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인 것으로 묘사한다. 이는 바디 디스포리아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트랜스젠더들을 트랜지션을 거쳐야만 완성되는 존재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트랜지션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트랜스 남성이고 나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베니테스에게 나를 투영했고 그를 통해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트랜지션을 하지 않아도, 추가적인 교정의 조치 없이도 나는 온전한 남성이라는 그의 선언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나는 신이 만드신 그대로의 모습이다(I am what god made me).” 앞으로 빈센트 베니테스 같은 캐릭터들이 더 많이 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소셜미디어상에서 베니테스의 선택과 행동들에 대해 오간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너무 재미있고 좋았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들은 트랜스 당사자들에게 크게 상처가 되기도 했다.

 

인터섹스를 퀴어화하는 것은 폭력인가?

소셜미디어, 특히 X(구 트위터) 상에서는 영화 콘클라베를 향유하는 많은 팬에 의해 베니테스의 퀴어성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중 트랜스 당사자들에게 크게 상처가 되었던 이야기들은 이런 것이다. 인터섹스를 퀴어화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이야기, 베니테스는 그냥 시스 남성인데 퀴어들 또 현학적인 이론들을 들먹이면서 유난 떤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에 크게 상처받았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터섹스 캐릭터를 퀴어화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말에 정말 동의하지 않는다. ‘퀴어화는 모독이 아니다. 인터섹스를 퀴어하게 해석하는 것은 인터섹스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적인 것은 우리의 몸을 둘러싼 정상이라는 기준이지 인터섹스를 퀴어하게 해석하는 행위가 아니다. 나는 이러한 말이 이해가 되지 않고 사실 일정 부분 화가 나기도 한다.

왜 빈센트 베니테스는 퀴어이면 안 되는가? 왜 트랜스이면 안 되는가? 왜 이런 행위는 유난이고 폭력이 되는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넘어 다소간 슬프기까지 하다. 누군가는 공식적으로 영화 코멘터리에서 베니테스 캐릭터가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했으므로 그는 트랜스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아마도 이러한 코멘터리가 트랜지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사려 깊은 코멘터리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그저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너는 여성의 장기가 있으니 트랜스젠더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사자에게는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이처럼 인터섹슈얼의 남성됨과 트랜스 젠더퀴어는 대치되는 개념인가?”하는 물음, 이것이 당사자에 대한 무시나 혐오는 아닌가 하는 물음은 내 안에도 있다. 그러니까 베니테스를 논 바이너리나 젠더퀴어로 해석하는 것이 성기 환원적인 생각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 말이다. 그러나 트랜지션을 기준으로 두지 말고 확장과 변화를 기준으로 트랜스를 재정의한다면 어떨까?

 

확장과 변화를 기준으로 트랜스를 재정의하기

수잔 스트라이커의 경우 주어진 젠더와 불화하고 젠더 이분법을 교란하는 모든 총체적인 행위를 트랜스젠더적인 것으로 확장할 것을 요구했다.​1) 결국 베니테스가 퀴어냐 아니냐, 트랜스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들은 단일한 자아를 상정하고 그 단일한 주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인데, 퀴어 이론은 정체성에 대한 학문이라기 보다는 관계와 실천에 대한 학문으로 꾸준히 확장되어 왔다.​2) Being이 아닌 Doing. 베니테스는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정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이미 꽤나 트랜스하다.

한편 트랜스 젠더퀴어 연구자이신 루인 선생님께서도 트랜스 젠더퀴어를 정체성이 아닌 일시적이거나 지속적인 삶의 태도, 젠더 경험, 인식론으로 설명한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어떤 순간엔 구분하는 듯하지만 젠더퀴어의 복잡한 경험 맥락에서 어디서 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또는 나 자신은 이런 구분과 분열, 모순을 어떻게 하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부연설명을 해야 하는 고단함을 겪지 않으면서, 그 분열과 모순을 내 삶이자 내 몸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란 고민을 했다. 그것이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한 이유였다. 즉 의료적 조치를 하건 하지 않건, 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만 가끔 틈새를 드러내건 이원젠더 규범에 저항하며 다른 방식으로 젠더를 구성하건 상관없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고 저항하고 때때로 능청스럽게 무시하는 그런 일시적이거나 지속적 삶의 태도, 젠더 경험, 인식론을 설명하고 싶어서 트랜스 젠더퀴어란 용어를 채택했다.​3)


결국 콘클라베는 의식은 로마 가톨릭 내에서 가장 거룩한 남성 노인을 뽑는 일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정결하다는 것이고, 정결은 부정의 반대편에 있다. 메리 더글라스에 따르면 부정하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음을 통해 발생하는 정동이다. 로마 가톨릭을 비롯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모든 것에 제자리가 정해져 있는 세계다. 그러나 빈센트 베니테스는 폭력적인 성별 이분법적 세계를 그의 신체를 통해 교란한다. ‘제자리에 있음을 성결로 인정하는 폭력적인 세계에서 그의 신체는 꾸준하고 지독하게 제자리에 없음을 통해 신의 손길 혹은 역사(役事)를 주장한다.



BENITEZ (CONT'D)

I was who I had always been. It seemed to me more of a sin to correct His handiwork than to leave my body as it was.


LAWRENCE

Then you... you are still...?


BENITEZ

I am what God made me. And perhaps it is my difference that will make me useful. I think again of your sermon. I know what it is to exist between the world's certainties. 


베니테스: 저는 항상 제 자신이었어요. 주님의 작품에 손을 대는 것이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았죠.


로렌스: 그럼지금도 여전히?


베니테스: 주님께서 만드신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저를 더 유용하게 만드는 건 제가 하기 나름이겠죠. 단장님의 설교를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세상의 확신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저는 압니다.




당신은 그의 종이 위 신체를 무엇으로 상상하는가? 당신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확장되고 변화하는가?

나는 퀴어들이 또 유난이라는 말이 너무 슬프다. 이건 정말로 퀴어들이 많이, 자주 듣는 말이다. 종종 우리가 만들어 내는 소란들은 소음으로 취급된다. 퀴어는, 특히 트랜스는 아직도 빨갱이보다 무시무시한 낙인이고 용납할 수 없는 쿵쾅거림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일련의 글과 만화와 뇨타​4)(릭터)해석들을 퀴어의 유난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종이 위에서마저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종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변태가 되어버리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종이 위에서나마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마음껏 상상하고 놀 수 있다. 우리는 종이 위에서 자유롭다. 이곳은 유난스럽고 소란스럽다. 나는 당신이 종이 위에 투영하는 변태적인상상력이 궁금하다. 우리 유난스럽게 살자, 퀴어스럽게.




1) 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제이와 루인 옮김.

2) 루인, 「여성 범주를 통해 트랜스 페미니즘을 다시 사유하기」, 2020.

3) 루인,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 강조는 필자.

https://runtoruin.com/category/%ed%8a%b8%eb%9e%9c%ec%8a%a4-%ec%a0%a0%eb%8d%94-%ed%80%b4%ec%96%b4/

4) 캐릭터를 상상 속에서 성전환하여 즐기는 2차 창작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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