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존, 정은우] 동시대 한국 레즈비언 생존주의의 한 풍경 - 정은우의 「피존」에 나타난 생존주의의 교차성과 퀴어한 생존: 정미선 > 전지적 퀴어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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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존, 정은우] 동시대 한국 레즈비언 생존주의의 한 풍경 - 정은우의 「피존」에 나타난 생존주의의 교차성과 퀴어한 생존: 정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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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리뷰팀 댓글 0건 작성일 2025-11-10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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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우, 「피존」(『묘비 세우기』, 2023,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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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퀴어 생존주의와 동시대 레즈비언 서사

 

퀴어 인구(queer people)에게 생존이라는 말은 익숙하다. 블랙페미니즘이 백인 가부장제 체제 속에서의 생존을, 장애학이 비장애중심주의 체제 속 생존을, 탈식민주의가 선주민 공동체의 백인 정착 식민주의 체제 속의 생존을 탐구해왔듯이 퀴어 인구 또한 주변화된 집단으로서 생존 실천과 생존 이론 그리고 생존의 기술들을 발전시켜왔다.​1)

퀴어 생존이란 불안정과 위협 속에서 존재하는 퀴어 인구의 개별 삶의 경영에서부터 퀴어 커뮤니티의 집단적 삶 정치에 이르기까지 살아남는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한 탐구로부터 잘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에 이르는 광범위한 퀴어 생존의 기술(queer art of survival)을 지시한다. 퀴어 생존은 폭력, 자살, 의료 접근권을 거부당하는 것 등의 즉각적 위협 뿐 아니라 침묵할 것을 강요하는 것, 규범적인 가치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통한 존재의 삭제라는 더 미세한 위협들과도 결합하는 다층적인 문제틀이다.​2)

또한 퀴어 생존은 단지 살 수 없는 삶(unlivable life)을 살아나가는 것 뿐 아니라 살 만한 삶(livable life)이란 무엇이고 좋은 삶이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담고 있다.​3) 퀴어 테라피스트 제이 칼라한은 분위기를 읽고, 누구를 신뢰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힘든 시기들을 헤쳐나가기 위해 배워야​4)하는 기술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퀴어 생존의 기술이 갖는 세부적인 테크닉들을 자기돌봄의 실천으로서 제안한다.

이처럼 퀴어 생존은 퀴어 인구뿐 아니라 다양한 주변부적 생존 각본들과의 연결 속에서 탐사되며, 퀴어 생존의 문제틀 속에서 살 수 없는 삶, 살 만한 삶, 좋은 삶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퀴어 생존의 기술과 정치를 문제화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퀴어 생존은 퀴어 생존주의의 문제와 결합하여 주체 없는 비평으로서의 퀴어(queer)와 퀴어 인구의 일상적인 삶 사이의 간극을 지시하기도 한다. 생존 그 자체와 구분되는 생존주의(survivalism)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레짐 속 집합정동과 통치성의 미시정치를 비판적으로 개념화하기 위해 구축된 개념이다. 생존주의는 생존 그 자체를 존재의 목적(telos)으로 삼으면서 도덕화하며​5), 생계와 안전 그리고 그것을 보장해줄 것으로 여겨지는 기제 이외의 다른 가치들을 박탈하거나 부정​6)한다. 생존주의는 1980년대 이후 안보와 복합위기(polycrisis)의 주체화가 자기의 테크놀로지로서 통치의 주요 장면이 되는 시대성 속에서 부상한다.

퀴어 생존주의에 대한 탐색은 이러한 생존주의를 비판적 재구성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주력해왔다. 세이런은 퀴어한 생존(queer survival)이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7)이라고 정의하면서, 퀴어한 생존은 지배적 생존 각본과 서사를 재평가하는 퀴어 생존의 상상력과 경험을 통해 탐구된다고 말한다. 벌랜트, 아메드, 할버스탬, 뮤뇨즈 등 우리에게 익숙한 포스트-퀴어 정치학의 논자들을 퀴어 생존주의에 대한 탐색의 계보로서 독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동시대 한국에서 퀴어 생존의 논제가 예시하는 생존하는 퀴어퀴어한 생존사이의 접면은 어떻게 탐구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네 삶의 조건과 삶의 이행 속에서 퀴어 생존 내부의 간극과 접변에 대해 질의한다는 것은 퀴어 인구가 살아가는 생활세계로서의 신자유주의 레짐 하의 생존주의와 퀴어 생존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본고는 동시대 한국에서 레즈비언 생존주의의 서사화에 주목하여, 퀴어 생존주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을 한 편 소개하면서 퀴어 생존의 동시대적 풍경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동시대 레즈비언 서사에서 생존의 문제는 낯선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동시대 레즈비언 서사는 레즈비언 생존주의를 서사화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화길의 (2012)8)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새롭게 읽히거나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2017)9)가 포스트아포칼립스 상황 속에서 레즈비언 주체들의 생존을 그린 바와 같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 레즈비언 서사는 생존의 주제화로부터 기원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레즈비언 이자관계를 구축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생존의 기본 단위인 가족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서사화하는 것 또한 오늘날 한국 레즈비언 서사의 두드러지는 경향 중 하나이다.​10) 이러한 서사화 경향 속에서 생존하는 퀴어또는 퀴어의 생존의 동시대적 조건은 가난한 청년 레즈비언 주체의 부분적 서사화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레즈비언 이자관계에 기반한 사적 구원의 가능성(또는 그 가능성의 박탈)에 대한 탐구 속으로 함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퀴어의 생존이 갖는 정치경제학적 조건에 대한 탐구는 일정부분 함구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본고는 정은우의 단편소설 피존​11)에 주목하여 동시대 한국 레즈비언 생존주의의 한 풍경을 읽는다. 우리는 세계 바깥에서 살 수 없을뿐더러 살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레짐 하의 삶의 풍경 또한 세계내재적 레즈비언 주체의 일상에 전면화된다. 피존은 짧은 단편소설이고 퀴어 생존주의의 모든 논제를 다룰 만한 함량을 갖춘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레즈비언 생존주의의 조건을 노동의 문제와 함께 구체화한다는 점에서, 노동자 레즈비언의 생존주의적 처세술과 노동하는 레즈비언이 처하는 곤란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 레즈비언의 위치성을 모두가 연루된 생존주의의 각본 속에서 조명한다는 점에서 미덕이 있다. 본고는 피존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이러한 지점들을 간략하게 논의해보고, 생존하는 퀴어와 퀴어한 생존 사이의 간극에 대해 질의할 것이다. 이를 통해 본고는 퀴어 생존 담론이 사적 구원이나 자기돌봄이나 관계윤리의 문제로 단순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가 구성하는 노동과 관계 그리고 감정의 질서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 탐구될 필요가 있음을 제안할 것이다.

 

 

2. 복수의 생존주의가 접변하는 여성동성사회 속 레즈비언 노동의 위치

 

피존은 피부관리실에서 일하는 레즈비언 노동자 수진을 인물 초점화자로 삼아, 신자유주의 레짐에 기초한 생존주의가 여성동성사회 내부에서 어떻게 교차하고 충돌하는지에 대해 서사화한다. 이 소설은 수진은 관리실 손님들에게 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34)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노동자인 수진에게 있어 당면한 문제는 관리실 손님에게 적절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일이며, 소설 전체에서 이 문제는 수진의 생계가 걸린 임금노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이러한 서두는 레즈비언 노동자 수진이 갖는 생존의 조건을 명확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수진에게 있어 이야깃거리는 단순히 노동 과정에서의 대화 소재를 찾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야깃거리는 수진이 임금노동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자 임금노동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기술로서, 감정노동을 통해 관계마케팅과 감성마케팅이 교차하는 생존의 장치로서 드러난다. 피부관리실에서 실행되는 레즈비언 노동자 수진의 하루는 이렇게 생존주의적 각본에 자신의 정동을 투자해야 하는 삶의 경영으로서 수행된다.

피부관리실이라는 공간은 이러한 생존주의적 각본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장이다. 이 공간에서 수진의 노동은 여성을 주 고객으로 삼아 직접 여성 신체에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자신의 손길과 신체 접촉을 안전한 것으로 표상해야 한다. 수진은 여성동성사회 내부에서 여성 고객에게 무해함으로 인식되는 젠더화된 여성 주체의 위치성을 수행해야 한다. 피부관리실은 여성 간 신체적 돌봄과 감성적 돌봄이 결합하는 여성동성사회의 구성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 내부는 이성애규범성과 젠더화된 규범이 경합하는 통제의 공간인 것이다. 피부관리실의 공간에서 여성 고객과 여성 노동자 사이에 현상되는 신체 접촉과 감정 접촉은 안전한 비성애적 접촉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허용되며 서비스가 성립한다. “같은 여자인 줄 알고 제 살 주무르게 놔두는 거지, 실상을 알면 맘 놓고 맡기겠느냐”(48)라는 실장의 말은 여성동성사회로서의 피부관리실이 외적으로는 여성 간 돌봄의 경제를 구축하지만, 실제로는 이성애규범적 안전지대를 유지하는 통제된 친밀성의 돌봄 경제로서 작동한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준다.

한편으로 피부관리실이라는 공간과 노동의 위치성은 전통적인 여성동성사회의 이성애규범성과 젠더화된 규범 하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이 소설이 조명하는 수진의 노동이 갖는 감정노동적 속성은 신자유주의적 노동과 돌봄 레짐이 투사된 공간으로서 피부관리실의 공간성을 더 구체화한다. 수진의 노동은 신체적 돌봄과 함께 감성적 돌봄을 동시에 요구하며, 담당자 지명 제도와 회원권 제도는 고객 충성도를 개인의 성과로 환원시켜야 하는 노동의 불안정한 위상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수진의 이야깃거리 만들기와 이야깃거리 제공하기는 고객 서비스 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노동​12)으로서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어 지속적인 지명의 성과를 창출해야 하는 매력자본에 기반한 셀프 브랜딩의 과정으로 전화된다. 그 결과로 수진은 자신의 실제 감정 상태와 피부관리실이라는 공간에서 구조화된 감정 표현 규범 사이​13)의 균열을 내면화하며, 자신의 정동을 관리하고 통제하는(해야하는) 자율적 주체로서 훈육된다.

동시에 피부관리실이라는 공간 하의 노동 구조는 비단 레즈비언 노동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피존은 여성동성사회 속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노동이 만나면서 생성되는 생존주의의 중층성을 독해할 수 있게 하는 정경으로서 피부관리실이라는 공간을 호출한다. 이 공간은 여성동성사회 속 복수의 생존주의들이 충돌하고 접변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우선 계급화된 여성동성사회에서의 여성 주체들이 행하는 생존주의가 있다. 이 여성 주체들은 정보망을 유지하기 위해 남자들은 함께 골프를 치러 다녔고 여자들은 같이 까페에 갔다. 운동센터나 편집숍, 음식점 등 일상을 공유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그런 교집합 중 하나가 피부관리실이었다”(41)라는 서술처럼 이성애 결혼 제도 속에서 성별화된 노동 분업을 통해 교육, 정보, 네트워크를 찾아 피부관리실로 집결한다. 이들 여성 주체들은 세대재생산과 계급재생산을 동시에 적절하게 수행하면서 아이들을 낙오란 없”(41)게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생존주의적 주체다.

그리고 가난한 레즈비언 노동자 주체들이 행하는 생존주의가 있다. 이 소설에서 수진이 그러하고 또한 수진과 예전부터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알던 사이었으나 서사적 현재에서 수진이 일하는 피부관리실에 채용된 또 다른 레즈비언 노동자 재영이 이에 해당한다. 수진과 재영은 동일하게 생존하는 퀴어가 되기 위해 레즈비언 삶의 낙담과 상시적 커버링 그리고 여성동성사회에 무해한 셀프 브랜딩 속에서도 매일 적절한 노동을 행해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생존주의적 주체다.

마지막으로 가난한 여성 노동자 주체가 행하는 생존주의가 있다. 소설 속에서 피부관리실 실장은 재영의 커밍아웃에 사장이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안달을”(47) 내며, 수진이 재영에게 행한 가해의 결과로 재영을 해고한다. 그러나 동시에 실장은 오십대 후반의 나이에 다른 관리실에 취직하기에는 나이가 많은 편”(48)이며, “남편과 맞벌이라도 사정이 좋지 않은지 몇년 내내 같은 가방만 들고 다녔다”(48)는 수진을 초점화자로 한 서술에서 살펴볼 수 있듯 생계의 공포에 사로잡힌 인물이기도 하다. 실장은 이성애 기혼 여성으로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원들을 감시하고, 스스로에 대한 해고의 잠재적인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생존주의적 주체로 판명된다.

피부관리실이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이러한 세 여성 주체들은 서로 다른 위치성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노동하지만, 공통적으로 모두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속에서 위기(crisis)와 불안정성을 정상화하면서 생존에 몰두한다는 점은 같다. 세 층위의 여성 주체들과 그들의 관계를 매핑하는 피존의 피부관리실은 모든 주체가 자기책임적 생존 단위로서 전환되는 복합적인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의 정치경제를 상호교차성 속에서 구현하는 장으로서 제시된다.

한편으로 이 세 층위의 여성 주체들은 모두 선을 지키는 것상냥함을 견지하는 것을 아비투스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상냥함은 최소한의 관계적 윤리라거나 최소한의 돌봄이나 연대의 감정화된 기술 같은 긍정적인 자질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돌봄 레짐이 요구하는 자기규율적 감정 관리의 기술로 해석된다. 여성 고객들, 수진, 재영 그리고 실장을 포함하여 모두가 이 공간을 떠나지 않기 위해 선을 지키는 것으로서의 상냥함을 수행해야 한다. 즉 이들에게 있어 상냥함이란 윤리나 연대의 표현이 아니라 생존의 언어이며, 다른 여성 주체들과의 감정적 교류를 가능케 하거나 관계의 상호성을 증진시키는 정동적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경제를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작동시키는, ‘선을 지키는가운데 행해지는 정동적 규율과 통제의 코드로 이해된다.

소설은 이러한 정동적 규율과 통제의 코드가 균열하는 순간을 모의하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수진은 여성동성사회 속 돌보는 여성성의 무해함을 어필하기 위한 셀프 브랜딩 전략으로서 인터넷 블로그에서 밍키라는 개의 사진과 스토리를 도용한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수진이 기르는 피존으로 둔갑한 밍키는 갑작스럽게 죽고 밍키의 실제 주인은 밍키가 죽었다고 블로그에 글을 쓰며 슬퍼한다. 수진은 어차피 도용한 것이기 때문에 밍키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피존과의 일상생활을 전시하면서 고객들에게 자신을 브랜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수진은 밍키가 죽었을 때, 자신 또한 계속해서 가상적인 피존을 키우는 것처럼 연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피존에 대한 이야기를 고객에게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수진이 피존과의 생활을 이야깃거리로 삼는 이유는 고객에게 개를 기르는 수진이 표상하는 무해함과 안전함 그리고 평범함을 브랜딩하기 위한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죽은 개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피부관리실이라는 공간에서 규정된 적절한 감정 표현 규범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진은 이 이야기를 멈출 수가 없다. 이러한 시퀀스가 매개하는 수진의 말하기는 이러한 정동적 규율의 실패를 모의하면서 동시에 코드화된 상냥함이 붕괴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무해함, 안전함 그리고 평범함은 피부관리실이라는 공간에서 서비스 관계의 안정성을 위해 구축되는 정동적 표준항이다. 그러나 정동적 통치성과 통치의 실패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레즈비언 노동자 수진의 인물 형상을 통해 퀴어의 생존이 갖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름을 독특하게 지었다고 평해지는 수진의 피존은 비둘기의 도상을 통해 평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수진은 꾸준히 평화를 희구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수진의 레즈비언적 삶의 실패(애인의 탈반과 결혼) 속에서도 레즈비언됨의 커버링을 수행하면서 여성동성사회의 서비스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일상성은 거짓된 평화의 살아냄을 뜻하기도 한다. 수진은 평화에 대한 낙관주의적인 이미지를 소설 속에서 끝내 그릴 수 없는 인물 형상이다. 평화는 이미 죽어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피존이 단 한 번도 피존이 아니었던 것처럼 평화는 한 번도 수진에게 임재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피존에서 피존이라는 이름이 지시하는 평화가 실은 통제된 생존주의적 정동을 표상할 때, 신자유주의적으로 매핑된 여성동성사회 속 수진의 레즈비언 생존주의는 생존하는 퀴어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퀴어한 생존의 잔여이자 실패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패의 장면에서 우리는 퀴어하게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상냥함의 정동 코드가 균열을 보일 때, 그리하여 선을 지키는 데서 비롯되는 통제된 평화가 우리 자신의 내면성 속으로 육박하게 될 때, 우리는 수진의 서사로부터 생존하는 퀴어와 퀴어한 생존 사이의 흔들리는 지평 속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3. 퀴어하게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에 질의하기

 

피존에서 수진은 끝내 자신이 속한 여성동성사회 속 생존주의의 각본에 가장 충실하게 적응하고 이를 수행하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이 소설의 미덕은 이처럼 살아남는 퀴어를 동시대 한국소설에서의 가장 쉬운 처방전으로서 손쉽게 윤리적으로 봉합하려 들지 않으며 퀴어 생존의 문제를 박탈의 피해자 위치성 속에서 미화하지 않는 데 있다. 피존에서 수진이 행하는 생존주의의 각본에의 충실함은 곧 수평적 적대감과 측면적 폭력(lateral violence)으로 전이된다. 이는 수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레즈비언 노동자 재영을 피부관리실에서 해고되게 만드는 데서 살펴볼 수 있다.

수진은 같은 일터에서 재영이 자신의 정체성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으며, 재영의 여자친구가 퇴근길에 같이 가려고 자주 찾아오는 것, 주요 고객 중 하나인 소미와 외국에서의 퀴어 퍼레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 자신과 재영이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라는 점을 이야깃거리로 삼은 것 등에 대해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벽장 레즈비언으로서 수진은 피부관리실의 생계노동으로부터 탈락하지 않기 위해 주 고객인 소미에게 재영이 소미의 이야기를 했다는 점을 일부러 전하고, 피부관리실 실장에게 소미가 재영에 관해서 알고 있다고”(50) 말한다.

그러나 사실 소미는 재영이 레즈비언이라는 점을 알지 못하며, 재영이 소미에게 이야기한 수진과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진이 겪는 위협은 실질적이기보다는 상상적이며,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의 구조가 만들어낸 언제든 대체 가능하고 폐기될 수 있다는 내면화된 불안이 만들어낸 상상적 위기로 판명된다.

임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위기(risk)에 대한 현재적 관리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의 레짐 속에서 주체의 행위자성을 구축하는 주요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소설 속 수진의 이러한 가해는 생존을 윤리의 파산으로 밀어넣는 생존주의적 구조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성애규범성과 젠더화된 감정노동 그리고 계급적 생계노동의 압박을 포섭하는 신자유주의적 레짐 하의 미시적 통치성은 지배적 생존 각본으로서의 상상된 위기와 위협이 교차하는 장 속에서, 모든 다른 가치를 삭제하는 생존의 명령에 따라 체제 내 수진의 선택을 합리적 선택으로 보이게 만든다.

피존은 시간적 순서(order)를 조작하여 재영이 해고되고 난 뒤 재영이 살고 있는 쇠락한 동네를 찾아가는 수진의 서사적 현재를 서두와 말미에 동시에 배치한다. 수진은 재영이 해고당하도록 자신이 중간에서 조작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죄책감을 느낀다. 신자유주의 레짐 하에서 지배적인 주체의 생존 각본은 생존 자체가 무엇이라도 해도 된다는 긴급한 명령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재영에 대한 수진의 생존주의적 가해는 피치 못할 것으로 수진 그 자신에게 있어서 처리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여적 정동은 남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잔여가 수진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기만적인 방식으로 수진이 자신의 죄책감을 처리하기 위해 재영의 피부관리실에 남겨둔 짐을 쇼핑백에 담아 재영에게로 향한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피존이 보여주는 수진의 죄책감은 수진 자신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 잔여적 정동은 신자유주의적인 생존 각본 속에서 생존의 초평면이 단절시키는 타자에 대한 염려 그리고 연대를 금지하는 구조 자체가 개별 주체에게 다시금 떠넘기는 도덕적 부채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는 공동의 돌봄이나 연대를 가능케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결핍과 부재 또는 가해의 책임을 주체의 몫으로 다시금 환원시키는 회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재영에게 향하는 수진의 측면적 폭력은 동시대 레즈비언 노동자가 겪는 구조적 폭력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 결과 피존에서 수진은 가해의 부인할 수 없는 정동적 부채를 끌어안고 살 수 없는 삶을 살아나가는 생존하는 퀴어가 되며, 수진의 생존은 신자유주의 레짐의 증상을 체현한다. 이러한 수진의 생존을 통해 결론적으로 정은우의 단편소설 피존은 살아남는 퀴어를 통한 역설적인 퀴어 생존의 실패를 그린다고 할 수 있다. 수진의 생존 서사는 퀴어 생존 담론의 낙관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동시에 살아남는 퀴어가 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잃도록 강제되는지 그리고 퀴어의 생존경제가 신자유주의 레짐의 접변 속에서 어떻게 굴절되면서 작동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소설은 재영을 통해 살아남는 퀴어와 퀴어하게 살아남는다는 것 사이의 다른 미미한 정동적 관계성의 가능성을 남겨두기도 한다. 재영은 오래 전부터 수진과 레즈비언 커뮤니티 속에서 관계 맺어 왔으며, 수진이 탈반하고 떠난 애인이 선물한 오래된 구두를 계속해서 신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재영은 암시적으로 수진이 자신을 해고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점 또한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끝내 수진이 자신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기만적으로 재영을 찾아왔을 때조차 수진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재영은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수진에게 뜨거운 매생이 칼국수를 식혀 건네주며,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수진이 버스를 탄 후에야 수진이 건네준 피부관리실에 남아있던 자신의 짐이 든 쇼핑백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떠난다.

이러한 재영의 상냥함은 피부관리실에서 행해지는 여성동성사회에서의 감정의 경제를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작동시키는 정동적 규율과 통제의 코드로서의 상냥함과는 변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의 친애로서의 재영의 상냥함은 신자유주의적 레짐의 생존주의가 전면화되는 일상 속에서도 수평적 적대감과 측면적 폭력의 발생 회로를 거부하는 코드 바깥의 잔여를 보여준다. 재영은 살아남는 퀴어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 재영은 수진을 통해 생존하는 퀴어의 전략을 응시하는 레즈비언 노동자 주체이자, 이러한 생존하는 퀴어를 상냥함 속에서 남겨두는 주체이다.

라나 린은 유방암 생존자인 자신의 위치성 속에서 생존자됨(survivorship)에 대해 질의하면서, 생존자됨이란 자신의 지속적인 생존자 정체성과 관계 맺는 하나의 태도로서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자신의 생존 상태를 다루고, 협상하고, 관리하는 경험의 한 범주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린은 퀴어한 생존의 기술이란 괴로움의 얽힘 자체를 그 불가해성과 함께 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4) 이러한 측면에서 재영의 상냥함은 생존주의적 정동경제가 요구하는 상호가해의 반응성과 관계 구축의 회로를 끊어내는 퀴어한 멈춤 내지는 보류의 형태로서 이해될 수 있다. 재영은 피부관리실에서는 살아남지 못하는 퀴어이나 피부관리실 바깥에서 이어지는 삶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 속 퀴어 생존이 만들어내는 괴로움의 얽힘으로서의 측면적 폭력이 교환되는 상호가해의 관계성을 감내하는 방식으로서의 상냥함을 지속한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피존은 신자유주의 레짐이 조직하는 생존주의의 정치경제 속에서 레즈비언 노동자의 서사화를 통해, 퀴어 주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이 모두가 연루되어 있는 동시대적 삶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균열되게 하는 살아남는 퀴어퀴어하게 살아남는다는 것사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동시대 레즈비언 서사의 번영 속에서 생존하는 레즈비언들과 레즈비언의 생존주의가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할 때, 퀴어한 생존에 대한 문제틀은 포스트-퀴어 주체이자 포스트-페미니스트 주체로서 레즈비언의 형상과 또한 그러한 레즈비언들의 생존이 갖는 정치경제학적 일상성에 대해서 관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 한국 레즈비언 생존주의의 한 풍경으로서의 피존이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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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aurène Cheilan, “Survival of the Queerest: Queer Survival and Future Possibilities”, SSRN, 2025, pp.6-7, http://dx.doi.org/10.2139/ssrn.5102477.

2) ibid, p.7.

3) 살 수 없는 삶과 살 만한 삶에 대한 더 자세한 논점은 주디스 버틀러·프레데리크 보름스, 조현준 옮김,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문학과지성사, 2024 참고.

4) Jay Callahan, “The Queer Art of Survival: Self-Care during Chaotic Times”, 2025, https://www.jaycallahantherapy.com/blog/the-queer-art-of-survival-self-care-during-chaotic-times.

5)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한국사회학』 49(1), 한국사회학회, 2015 참조.

6) 차미령, 「생존과 수치 - 1970년대 박완서 소설과 생존주의의 이면(1)」, 『한국현대문학연구』 47, 한국현대문학회, 2015 참조.

7) Laurène Cheilan, op. cit., p.16.

8) 강화길, 「방」, 『괜찮은 사람』, 문학동네, 2016.

9)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민음사, 2017.

10) 정미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퀴어/여성가족서사의 정동과 반사회적 주체」,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25 여름 정기학술대회, 2025.08.21. 참고.

11) 정은우, 「피존」, 『묘비 세우기』, 창비, 2023. 원 발표년도는 2021년이다. 인용 시 본문에 쪽수만 병기한다.

12) 김현경, 「피부관리실 종사자의 감정노동과 반생산적 과업행동의 관계에서 감성지능에 대한 매개효과 연구」,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23(3), 한국산학기술학회, 2022, 467쪽 참조.

13) 위의 글, 459쪽 참조.

14) Lana Lin, “The Queer Art of Survival”, Women’s Studies Quarterly 44(1/2), 2016, p.342;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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