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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모호한, 그러나 그렇기에 현실적인 이야기!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저물 듯 저물지 않는』. 지금까지 저자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소설 속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쓰인 이 작품은 우리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이 쉰이 넘도록 부모가 남겨둔 유산으로 먹고살면서 유일하게 열을 올리는 행위는 독서뿐인, 현실과 동떨어져 사는 듯한 탐독가 미노루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뚜렷한 기승전결 없이 그저 흘러간다.
쉰이 넘었지만 여전히 어른인 듯 아이인 듯 살아가는 미노루에게는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책임이 언제까지고 미뤄지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은 미노루의 탐독을 답답하게 여긴다. 책 속에만 빠져 사느라 현실에는 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탓이다. 하지만 미노루에게 독서는 현실 도피가 아니다. 삶의 일부분, 오히려 현실보다 더욱 현실감 있는 세상이다. 현실은 밋밋한 반면, 미노루가 읽고 있는 소설 속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나 연인 사이의 어긋남 같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제목이 암시하듯 미노루가 사는 시간은 낮과 밤의 경계인 해 질 녘처럼 어스름하고 모호하며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다. 미노루의 주변 인물들은 얼핏 제법 현실적으로 사는 듯 보이지만 이들의 시간도 어스름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눌러 살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거나, 인정해버릴 수 없는 현실을 잠시나마 한숨 돌리려고 외면하는 중이거나, 언젠가 먼 미래에 행복했다고 느낄 그러나 지금은 도망치고 싶은 순간을 애써 견디고 있거나.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이 뚜렷하지 않은 이 이야기는 그렇기에 우리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지독히 현실적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주인공인 미노루에게 집을 얻어 살고 있는 시카와 사야카가 중년 레즈비언 커플로 등장한다. '일찍부터 자신의 성정체성에 눈을 뜬 시카와 달리(241p)' 사야카는 결혼을 했다가 늦게 자신을 정체화 한 것으로 묘사된다. 특별히 두 인물이 중년 여성 커플로서 느끼는 감정들, 생활의 단면들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소설 속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은 저물 듯 저물지 않는 저녁 하늘처럼 미미한 빛을 띄고 조용히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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