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돗자리세미나 <기형도 퀴어하게 읽기> 발제문 및 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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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빅뷰티 작성일 15-09-11 17:27본문
2015. 8. 29
한강망원공원에서 진행된 무지개책갈피 제1회 돗자리세미나!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퀴어퀴어하게! 읽어보았습니다^^
푸르른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선선한 한강 바람을 맞으며 진행된 자리!
감사하게도 참가자 분들의 사진 촬영 허락을 구하고, 그날의 풍경을 기록했습니다.
사진1: 한강 공원을 바라보며 마주앉아 자기소개를 나누는 참가자들
사진2: 기형도 시집에 대해 퀴어퀴어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참가자들
현장의 낭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무지개색 토론 등은
아래의 발제문과 서기록에서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2015년 8월 29일 <발제문> 제 1회 무지개책갈피 돗자리세미나 : 기형도 퀴어하게 읽기 발제자: 보배
나의 아름다운 게이 시인에게: 이곳은 아직도 침묵의 시대입니다 -기형도를 가장 퀴어하게 ‘오독’하는 방법
모든 의문은 한 줄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경, 종로 2가 부근의 한 극장 안에서 죽었다.”1) “그는 이후 독창적이면서 강한 개성의 시들을 발표했으나 89년 3월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2)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다.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음.”3)
심야영화를 보던 유망한 시인이 돌연사했다. 이 문장들은 그 정도만을 말해준다. 스크린에 펼쳐진 남녀의 선정적인 섹스 장면. 새벽 세시 반이라는 시간만큼이나 왠지 신비로운, 아까운 재능의 죽음. 그리고 순진한 독자들은 우리의 시인을 고고한 제단 위에 모셔둔다. 그렇게 그의 시는 살아있던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멋진 문장으로만 소환되는 언어 속에 갇힌다. 하지만 증거는 순진하게 넘길 수 없을 만큼 넘쳐난다. 명민한 독자들은 의문을 거두지 못하고 질문을 계속한다. 폐쇄적인 문단에서도 연기는 새어나간다. 그리고 달아오른 의문에 불을 지피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 시인이 죽은 곳은 당시 대표적인 게이 크루징 장소인 파고다극장이었으며, 그가 게이라는 소리소문(!)을 없애기 위해 유족들과 문단이 열심히 막고 있다는 것이다. 국문과 수업에서도 듣지 못한 이 놀라운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려 애썼지만 21세기 인터넷세대 독자가 찾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나마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쯤해서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가 게이일 ‘수도 있다’는 의문조차 품을 수 없는 한국 사회, 특히 한국 문단은 명백하게 호모포비아적이지 않은가? 앨런 긴즈버그가 게이라는 사실, 에이드리안 리치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시를 보다 풍부하게 해석하도록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이 당연한 사실이 왜 국내 게이 시인에게만 예외가 될까. 오히려 그의 시는 문단에서 보기에도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가 게이(일 수도 있다)라는 ‘흠집’을 감추려고 애쓰는 모양이다. 가브리엘 실비안(한국 이름이 있을텐데….)은 자신의 글4)에서 이 부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국내에선 카더라 통신밖에 없고 그나마 Gi Hyeong-do gay 따위로 검색하면 그를 게이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Wikipedia 포함.) 요약하자면 기형도가 80년대 대표적인(이란 말은 즉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게이 크루징 장소인 ‘살롱’ 파고다 극장에서 죽었다는 사실과, 그의 시에 동성애적 주제가 분명히 눈에 띈다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문단과 학계에선 퀴어비평적인 시도를 전혀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에 대해 ‘풍문’ 혹은 ‘소문’으로 치부하면서 호모포비아적인 거부감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그의 게이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혐오와 편견 때문에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게이 시인에게 너무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기형도 시인을 게이 시인으로, 그의 시를 퀴어 비평적으로 적극적인 ‘오독’을 행하려 한다. 그의 죽음과 시가 온 힘과 생명을 다해 퀴어적인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에, 나는 차마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편협한 독자가 되려 한다. 일차적으로는 그의 시가 분명 퀴어하기 때문이며, 이차적으로는 그 사실(만)을 얘기하지 않으면서 기형도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비평에 진절머리가 나기 때문이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앉아서 성자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게 경배하러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육체에 물을 묻히고 녹이 슬기를 기다렸다. 서울에서의 나의 행복론은 산산조각나고 있다. 내가 거듭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거듭 변하기 위해 나는 지금의 나를 없애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짧은 여행의 기록 2-2. 서고사 가는 길」 부분5)
기형도를 해석할 때 늘 언급되는 부정적인 세계인식, 낙관 없는 우울의 정체는 무엇일까? 김현은 시집 뒤에 실린 글에서 이것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어려운(그리고 당시에는 ‘핫’했을) 말로 표현하면서 리얼리즘의 배경을 가난과 이별로 꼽았다. 시장에 간 엄마를 “찬밥처럼 방에 담겨”(134쪽) 기다리는 가난한 유년의 경험은 그렇다 치고, “사내들”이 “있는 힘 다해 취했”던 “그 술집 잊으려네”(78쪽)라고 말하는 시인의 이별을 “여러 사람이 같이 어울린 술집에서 여자에게 실수를 하여”라거나 “그녀와 헤어진 기억이 너무나 아파 (중략) 도망치려 한다”고 지극히 이성애 중심적으로만 해석한 데에는6) 코웃음마저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리얼리즘일까? 오히려 기형도 시의 리얼리즘이란 (그의 ‘퀴어함’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시인) 「나쁘게 말하다」(21쪽)에서처럼 ‘어둠 속에서 어슬렁거리는 몇 개의 그림자’나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든 청년들의 욕망’과 같이 80년대 파고다극장의 스크린 앞에서 사랑을 나누던 게이 청년들의 (아직은 공유되지 못한) 우울함을 닮은 게 아닐까. 이 시에서 “골목으로 들어오던 행인”은 추측컨대 음습한 동물과 같은 청년들을 보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 것일 테고, (그들을) “눈치챈 차량들이 서둘러 불을” 껐으며 “건물들마다 순식간에 문이 잠겼다.” 아직 밝은 빛 아래 나오지 못하고 종로 구역(그것도 새벽의 특정 극장)에서만 서로를 확인하던 게이 커뮤니티의 은어적 특성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게이 시인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지를. 사실 많은 평론가들이 기형도의 우울함을 80년대 시대 상황과 연결지어 당시 시인들과 공유하는 공통적인 특징으로 밝히고 있는데, 기형도의 우울은 명백하게 ‘세상’과 분리 및 고립되어 있다. 위의 시와 아래 수필을 함께 읽으면, 세상에 이렇게나 퀴어할 수가 없다.
나의 문학적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절망…… 세상에 대한 내부의 복수심? 만약 그렇다면 오, (중략) 이 단단한 세상에 대한 나의 대리석 같은 가면과 그 대리석 기둥 속에서 마모되어지고 균열되어지는 낡은 판화 조각 같은 나의 약점에 대한 반발의 덮개는 무엇으로 설명될까. -「참회록」 부분7)
세상은 더없이 단단하며, 그 세상 앞에 선 나는 대리석(이라니 얼마나 단단한지)같은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나의 ‘약점’이 숨어있다. 그 약점은 낡은 판화 조각처럼 얇으며, 대리석 뒤에 숨어서도 (혹은 오히려 그렇기에) 점차 마모되고 균열된다. 더불어 나는 나의 약점에 대해 반발을 갖고 있다. 그의 약점은 우리의 퀴어적 우울과 너무 많이 닮았다. 더불어 이것이 자신의 문학적 근거라고 ‘자백’하고 있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80년대 퀴어적 우울을 다룬 기형도 시인을 전지적퀴어시점^^으로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다.(덧: 「오래된 서적」 25쪽 / 「어느 푸른 저녁」 28쪽)
이처럼 풍경을 (주로 회색빛으로) 쓸쓸히 도색해내는 기형도 시인은 흔히 육체적이라기보단 정신적인, 추상과 관념의 시인으로 이해되지만, 곳곳에 호모에로틱한 표현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안개’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80년대를 가장 잘 그려낸 시 「안개」에서조차 “안개는 샛강 위에 /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라는 표현이 눈에 띄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는 마지막 문구가 인상적인 시 「장미빛 인생」(35쪽)에서는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중략)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이미 육체적 상징으로 많이 사용된 ‘기타’ 연주를 통해 섹슈얼한 이미지를 그려낸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82쪽)도 흥미롭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에 씌어진 부분과 씌어지지 않은 부분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두 번째 부분이다. [……]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작가의 말」 부분8)
자, 이제 다시 제목으로 돌아간다.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사후에 시집을 내면서 김현 시인이 택한 제목으로, 격정의 시대, 슬픈 세상, 그럼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죽은 혀를 연상시킨다. 80년대라는 침묵의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인의 슬픔이 담긴 제목이다. 80년대부터 20년이 넘게 지났고, 시인의 죽음 이후 16년이 흘렀다. 그러나 나의 아름다운 게이 시인은 여전히 벽장에 갇혀 있다. 그의 시가 외치는 구체적인 우울함, 그러나 동시에 절박한 생의 움직임, 끊기지 않는 희망의 부름을 우리는 얼마나 들여다보고 있을까. 여전한 침묵의 시대, 우리는 죽어서까지 갇혀진 그의 말을 얼마나 열심히 듣고 있을까.
<출처> 1) 김현,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94(재판), 155쪽. |
2015년 8월 29일 <서기록> 장소: 망원한강공원 초록잔디 위 참가자: 수덕, 참새, 지연, 소양, 앜이라, 다름, 수빈, 다은, 지인 발제: 보배 서기: 아란
제 1회 무지개책갈피 돗자리세미나 : 기형도 퀴어하게 읽기
자기소개 및 미니퀴즈 진행, 정답자에 상품(사탕) 나눠준 후 토론 시작.
-보배: 발제할 책으로 기형도 시집을 고르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기형도가 퀴어일 수 있다는 목소리를 최근에야 접했고, 몹시 놀라고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났어요. 기형도, 우리가 수능 공부할 때부터 접했던 유명한 시인이잖아요? 그런데 오래 전부터 한국 문단이 기형도의 퀴어성을 감추려고 애를 써왔고, 유가족도 마찬가지였던 거죠. 기형도 전집에도 소설, 수필이 실려있는데요, 제가 추측하건데 전부 다 실리진 않았을테고 필터링을 거친 뒤 실렸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작품이 필터링 된다는 건, 일종의 호모포비아적 행위가 아닐까... 그런 함의를 두고 관련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제가 참고한 글은, 발제문의 각주4번에 소개된 가브리엘 실비안이라는 분의 글이에요. (한국분으로 추정되고, 한국 이름도 있을 텐데...) 이 분이 외국 모 웹진에 발표한 글에, 기형도를 게이 시인으로 소개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영문 글이고요. 기형도가 죽은 파고다극장이 게이크루징 장소로 굉장히 유명했던 곳이라는 점, 기형도의 시가 굉장히 퀴어하다는 점 등 다양한 근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형도 퀴어설을 악소문으로 치부하는 문단의 현실을 꼬집고 있어요. 일단 저는 전집에서 발췌해서 발제했구요. 기형도는 우울한 시인으로 평가 받는데...
-아란: 그냥 발제문을 낭독하시죠. 정말 잘 쓰여진 글인데...
-보배: 줄글을 읽으면 재미 없잖아요. 그래서 풀어 설명하려고 한 건데..
-아란: 글이 정말 좋은 글이라 괜찮아요. 정말 잘 쓰셔서 찬찬히 들어보고 싶어요.
(보배, 발제문 낭독)
-아란: 왜 마지막 문장은 안 읽으세요? 정말 좋은데?
-보배: (쑥스럽다) 아니, 다들 눈이 있으니까... 읽으시라고... 어쨌든 여러분, 가브리엘 실비안의 영문 글도 구글 번역기 돌려서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기형도 전집도 재미있으니 추천 드립니다. 오늘은 낭독과 토론을 함께 하겠습니다. 각자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으시면서 가장 좋았던 시, 함께 얘기해보고 싶었던 시를 골라 낭독하려고 합니다. 자 그럼... 앜이라씨부터 해볼까요? 시간이 좀 필요하세요?
-앜이라: 네 조금...
-보배: 그러면 여러분, 시집 다 어떠셨어요?
-참새: 몰랐던 시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뭔가.. 발제문에 쓰신 것처럼, 퀴어적인 부분이 느껴졌어요. 자기가 왜 우울한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심정이 드러나있는?
-보배: 네. 저는 그게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파생된 우울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파생된 근본적인 우울에서 비롯된 거라고 느껴졌어요.
-참새: 학교 공부할 때는 시대적 배경을 기준으로 배우고, 외우고, 읽다보니까 퀴어적 부분은 전혀 못 읽어냈던 것 같아요.
-보배: 맞아요. 저는 이번에는 그 반대로, 퀴어하게 읽어야 한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좀 심하게(^^) 퀴어하게 읽게 되더라고요.
-다은: 저는 좀 달리 생각해요. 퀴어적인 건 잘 못 느꼈어요. 작가로서, 시인으로서 자기 내면의 고통이라던지... 그런 문학을 하는 시인으로서의 감성을 많이 느꼈지, 퀴어적인 걸 잘 못 느꼈던 것 같아요.
-보배: (퀴어성이) 꽁꽁 숨어있긴 해요.
-수빈: 저도요. 몇 년 전 수강한 학교 강의에서, 각자 책을 선정하고 책과 관련된 장소에 답사를 다녀오는 과제가 있었어요. 저는 그 과제용 도서로 이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골랐었고요. 그때 관련 자료를 리서치하면서 기형도 게이설을 접하게 됐고, 파고다극장에 답사도 가고, 퀴어성을 적당히 녹여내서 레포트를 쓰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지금 다시 읽으니까 오히려 별로 안 느껴졌어요. 퀴어한 지점이요.
-보배: 여러분... 저희 세미나를 접어야 할까요? 다들 퀴어하게 읽는데 실패하셨나봐...(ㅠㅠ)
-수빈: 사실상 시집에 남성의 육체... 이런 상징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밤에 극장 가고... 그런 상황도요. 예전에 과제할 때는 그런 것만 택해서 퀴어하게 바라봤었는데, 이번엔 좀 전반적으로 보다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어요.
-보배: 퀴어적 상징들이 대단히 숨어있긴 해요. 그럼 오늘, 함께 파헤쳐봐요! 앜이라님 낭독하실 시 찾으셨어요?
-앜이라: 네. 48쪽에 있는 시, 「정거장에서의 충고」 읽겠습니다.
(앜이라 님의 시 낭독)
-보배: 앜이라님의 낭독 목소리인가요? 나지막한 목소리...(^^) 이 시를 고르신 이유는?
-앜이라: 다른 시는 좀 어두운 분위기인데, 이건 희망적이라 좋았어요.
-보배: 동의합니다. 그래서 이 시를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을 것 같은데요? 근데 좀 어렵지 않았어요?
-일동: 네.
-보배: 첫문장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1행)'가 선언 형식이고 굉장히 명료해서 쉽게 느껴지는데, 나머지 부분은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아름다운데 어려운 시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기형도 시에 '개' 모티프가 굉장히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이 시에도 나오는데, 왜, 그 시도 있잖아요. 마지막에 플래시 속에 들어온 흰 개. 어떤 의미일까요? 앜이라님... 이 시를 저희한테 팔아주시겠어요?(^^)
-앜이라: (쑥스럽게 웃으심)
-다은: 기형도 시는, 독자의 개인적 상황이 안 좋을때 읽으면 더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평온할 때 읽으면 그냥 그렇구나 하는데...
-수빈: (다은님에게) 시 감성이 잘 없어 ㅋㅋ
-다은 : (ㅎㅎ) 아픔이 없을 땐 잘 읽히던데...
(지연님 도착 및 토론에 합류)
-참새: 저는 이 시에서, 길 위에서의 퀴어를 읽었어요. 퀴어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경우, (물리적이고 혈육적인 의미의) 집과 완전히 동화되기 힘들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일단 살고는 있지만, 나 자신이 집과 분리된 느낌...?
-다은: 데미안처럼, 밤의 세계를 알게 되면 다시는 낮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요? 염원은 하지만...
-보배: 안 그래도, 시를 읽으면서. 노트에 '거리' 모티프를 기록했었어요. 화자들이 거리를 떠돌고 집에서 벗어나있고... 평론에서도 '길 위의 시학' 과 같은 식으로 평가된 부분들이 있을 거에요.
(소양님 도착 및 토론에 합류)
-보배: 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여러분의 퀴어력에 감탄을 했고요! 수빈님? 시 골라서 낭독해주시겠어요?
-수빈: 저는 「입 속의 검은 잎」으로 할게요. 58페이지.
(수빈 님의 시 낭독)
-수빈: 시집의 제목으로 뽑힌 시인 만큼, 기형도 시의 주요 심상들이 이 한 편에 잘 등장하고 있어서 골라봤어요. 혀를 잎으로 은유한 것도 뛰어나고, 이외에도 무채색의 시각적 심상들이 많은 것 같아요.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3연 4행)'는 구절이 있는데요. 이게 시집 전체에서 발견되는 무채색의 심상 같아요. 잎은 검은색인데, 나무는 말라있고... 그리고 「안개」라는 시를 보시면 거기 흰 색의 심상도 많이 등장해요. 흰 색은 긍정적 심상일 수도 있지만, 기형도 시에서는 뭔가를 안 보이게 가리는 것. 그 안에 숨어있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형색. 그런 것들로 표현되거든요. 이 시에서도 그런 시각적 심상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 같아요.
-보배: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2연 9행)'. 이 시의 '그', 즉 돌아가신 분이 이한열 열사를 뜻한다고 어딘가에서 들었던 것 같아요. 문단에서의 1차적 해석에 따르면 이 시가 1980년대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데... 근데 제가 보기에는, 이 시도 퀴어한 것 같아요.
-수빈: 퀴어한가요?
-다은: 이건 여담인데요. 오늘 어떤 게이 친구랑 놀다가 왔거든요. 「입 속의 검은 잎」을 퀴어하게 읽는 모임에 간다고 하니까, 그 친구 왈... 그게, 물고 있을 때 턱을... 비유하는 것 같다고...(^^)
(일동,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박장대소)
-보배: 아! 뒤늦게 이해했어... 아... 그래요. 그게 발표되면 얼마나...... 그렇구나... 그런 식으로 읽을 수도 있군요...(^^) 그럼 왜 이게 표제일까요?
-아란: 아름다운 제목이기도 하고요. 시대상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있는 작품이니까, 만약 누군가가 기형도를 한 명의 퀴어 시인이 아니라 그 시대를(시대의 정치적, 역사적 상황을) 풍미한 시인으로 만들고 싶었다면...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표제로 고르기에 적절한 작품 같아요.
-수덕: 저는 사실 이 시집을 퀴어하게 읽는다는 것에 굉장히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요, 그런데 오기 전까지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퀴어한 걸 잘 모르겠는 거예요. 「나쁘게 말하다」는 되게 직접적인 편이고... 저는 「장미빛 인생」을 골라봤어요. 시가 퀴어해서가 아니고... 제 개인적인 경험을 기준으로 선택했습니다.
(수덕 님의 시 낭독)
-수덕: 연세대 앞에서 버스 환승할 때 겪은 개인적인 경험인데요. 거기에 작은 사각형의 콘크리트 박스... 작은 지붕 하나 얹고 매점이자 충전소인 곳이 있잖아요. 제가 버스카드를 충전하려는데, 거기에 문신을 한 건장한 체격의 아저씨가... 날도 더웠는데,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계신 거에요. 제가 불렀는데 못 들으시다가 겨우 깨셨는데, 그 아저씨의 모습이, 눈빛이 약간 탁하고, 귀에 있는 문신은 빛이 바래고, 머리는 반백에.. 이런 모습이었는데요. 제가 충격을 받은 건... 저런 건장한 성인 남성의 과거가, 귀에 문신이 있는 그의 과거가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는데, 남의 인생을 쉽게 연민해선 안되겠지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는 거죠. 저는 이 시를 읽고, 그러했던 경험이 떠올랐어요. 쓸쓸한 감정이 떠올랐어요.. 근데 보배님도 발제문 작성하실 때, 이 시를 고르셨네요?
-보배: 네. 저는 에로티시즘적 비유가 보여서요... 의자에 어찌나 밀어넣는지...(^^)
-수덕: 퀴어하다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가, 고민해봤는데요. 꼭 성애적 요소뿐만이 아니라, 퀴어로서 생활 전반에서 겪는 경험, 생각들을 표현한 작품들도 포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퀴어로서의 사고방식, 시각, 일상, 삶 같은 것들을 작품에서 찾아내는 것이죠. 게이라서 퀴어하게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경험을 투영해서 읽을 수 있게 하는 거죠. 이런 시각이 퀴어문학에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게 하는 통로가 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 저 나름의 답을 찾은 것 같아요.
-수빈: 축하드립니다. 답을 찾으셨다니(^^)
-일동: ㅎㅎ(^^)
-보배: 기형도가 중년 남성을 많이 그려내잖아요. 그래서 그게 수상하다는 의견도 있고요..ㅎㅎ 아까 발제문에서 말씀드린 호모에로티시즘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중년 남성을 바라보는 기형도의 시각에는, 명백하게, 약간 경멸이 있는 것 같아요. 노년기의 남자를 바라보면서, 늙는다는 것에 대해 경멸하는 시선을 담아낸 시도 있었고요. 저는 그게 약간... 애증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어요. 왜냐하면, 섹슈얼한 느낌도 함께 느껴졌거든요. 그런데요. 지금 발견했는데, 「장미빛 인생」이라는 제목, 되게 아이러니하네요?
-수빈: 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2연 전행)'라는 마지막 구절과 대비되는 아이러니한 제목이죠. 저는 이 시, 되게 퀴어한 것 같아요. 시가 퀴어하다는 게 뭘까? 여기 와서 고민해봤는데요. 퀴어하다는 게 뭘까 생각해보면, 예를 들면 제가 레즈비언인데, 제가 제 성정체성에 대한 시만을 쓰지는 않잖아요. 만약 제가 게이라면 게이의 시각에서 (음료수병을 집어들며) 우엉차 병을 보면서 성기를 떠올릴 수도 있는 거고요. 제가 얘기하려는 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시선에 내재된 관점이 퀴어하다면 퀴어하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입 속의 검은 잎」도 분명히 시대적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거기 사용된 이미지들이 왜 하필 잎사귀이고, 왜 하필 검은 색채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는 거죠. '늙음'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그 시각도 굉장히 퀴어한 것 같습니다. 유난히 늙는 걸 두려워하는 거죠. 두려움에 대한 이유는... 동반자를 찾아야 하는 문제, 법적 결혼에 대한 문제... 우리가 당면한 그런 문제들 때문에 늙는 게 두려울 수 있고요. 또 게이의 시각에서 신체의 미적 정도에 중점적 가치를 두는 것일 수도 있고요.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아, 기형도 시인 진짜 게이 같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연: 목덜미, 입술, 귀... 저도 중년 남성의 육체를 이렇게 세세히 훑으면서 야하게 본 적이 없어가지고(^^) 새로웠네요.
-소양: 탑골공원에 나이 든 게이분들이 많이 모인다는데요. 그 분들이 거기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분들을 욕망하는 시선... 이런 것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퀴어적 현실인 것 같아요.
-보배: 그쵸. 그러한 현실을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다는 게...(^^) 저는 얘기 듣다가 깨달았어요. '늙음'에 대한 집착 자체가 퀴어할 수 있다는 걸요.
-수빈: 저는 왜 혀를 잎사귀로 비유했을까도 생각해봤어요. 검은 잎이라는 이미지, 잎사귀, 수분기 없어 말라서 버석거리는 잎사귀. 이런 것들이 '늙음'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했어요.
-보배: 와, 정말 대단하세요. 이제 그러면... 저는 다름님께 낭독을 시키겠어요.(^^)
-다름: 저는 118쪽, 「쥐불놀이」를 읽겠습니다.
(다름 님의 시 낭독)
-다름: 저는 이 시에서 '사랑을 목발질하며/나는 살아왔구나(2연 1~2행)'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고, 공감이 갔어요.
-다은: 저는 이 시가 제가 읽은 기형도 시 중에 제일 호모에로틱하다고 생각해요. '돌리세요, 나무가지'!
(일동, 어리둥절하다가 또 박장대소)
-다은: 그때 당시의 은어를 녹여낸 걸 수도 있다고 봐요.
-일동: 불가마...! (ㅎㅎㅎㅎㅎ)
-다은: '술래는 잠을 자고 있어요(3연 6행)'. 그럼 난 다른 애를 찾아야겠다... 완전 퀴어하지 않아?
-수빈: 얘네 박 탄다고 하잖아요.(ㅎㅎㅎ)
-다은: 대보름에 달... 추석 때 (ㅎㅎㅎ)
-일동: 어디까지...! (ㅎㅎㅎ)
-보배: 사랑을 목발질하며... 저는 이 구절이 시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거 빼고 다! (ㅋㅋㅋ)
-다은: 급한 불을 꺼야하니까... 당장 돌릴 나뭇가지가 필요하니까...
-보배: 너무 웃기다... (ㅋㅋㅋㅋㅋ)
-다은: 기형도 시에 등장하는 나무가 다 이런 심상이었을 지도...?
-보배: 나무가 원래 좀... 그런 거죠?
-다은: 욕망에 가득 차서 쓴 듯해요.
-보배: 저는 진짜 순수한 시라고 알고있었어요... 유아적 감성으로. 그건 표면이었군요.
-다은: 천연덕스러운 것 같은데요.
-수빈: 그때 찜질방이 있었나요?
-보배: 1980년대? 아... 저는 한참 부족한가봐요.. 아직 퀴어하지 못해...
-다은: 그런 은어도 있잖아요. 자진방아를 돌리는 거. (ㅋㅋㅋ)
-지연: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정형화된 수업을 해줄 때는 몰랐는데 되게 재밌네요. 기형도 시집. (ㅋㅋㅋ)
(일동 초토화됨. 잠시 5분 휴식)
-소양: 저는 25쪽, 「오래된 서적」 읽어볼게요.
(소양 님의 시 낭독)
-소양: 이 시가 굉장히 좋아서 골랐어요.
-보배: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1연의 3행과 4행이 행갈이를 통해 중의적 의미로 이어지네요.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2연 마지막 행과 3연 첫행인데, 행갈이가 굉장히 세련됐네요. 지금 발견했어요. 저는 이 시가 퀴어적 우울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어요. 검은 페이지라는 상징도 그렇고요. 두려움이 속성인 것 같아요.
-지연: 퀴어적 우울이라고 하시니까,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4연 1, 2행)'과 같은 부분이 의미 있게 읽히네요.
-수빈: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3연 마지막 행)'
-다은: 자신의 삶을 얘기할 때, 뭔가 피쳐링되고 걸러지는 게 많은 느낌이에요.
-보배: 그쵸. 다 보여주지 못하고.
-다은: 제 눈에만 이러는 게 보일 지 모르겠는데...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3연 1, 2행)'
-일동: 박장대소 (^^)
-아란: 이 시에 등장하는 '두께'라는 표현이 사실은, 정상가족 구성, 직장을 가지는 것과 같은 세속적 삶의 이력을 뜻하는 걸까요?
-다은: '두꺼운 추억'이라는 표현은, 관혼상제, 즉 결혼도 하고 제사도 지내고... 그런 걸 내포하는 것 같아요.
-보배: 1980년대에 20대 중반이면 그런 말 들을 법 하죠.
-다은: 살아 계셨으면 우리 부모님 세대죠.
-보배: 이 구절도 의미심장해요.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3연 2행)'. 장소를 옮기며 살았다는 건 정착하지 않았다는 뜻이고요.
-아란: 기형도 시집이 이렇게 잘 읽히는 게 처음이에요.
-보배: 여담인데요. 이번 모임을 위한 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기형도를 언급하긴 했으나 개인적으로 안 했으면 했어요. 저는 발제를 해야 하잖아요.(^^) 그러다 이렇게 하게 됐는데... 같이 얘기하니까 편하네요.
-참새: 저는 111쪽 「비가2―붉은 달」 읽어볼게요
(참새 님의 시 낭독)
-참새: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1연 3~5행)' 저는 이 부분이 연인이었던 화자와 '그대'가 헤어지는 상황으로 읽히더라구요.
-보배: 그대가 남자라는 거죠?
-참새: 네.
-보배: 3연 1행에 보시면,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이 천국이라는 게 뭐죠?
-수빈: 그 사람이 간다고 말하는 목적지.
-참새: 화자가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 입장이고, 붙잡을 여력도 없는 입장인 것 같아요. 상대방은 천국으로 간다 하고. 그 천국이 사실은 그 사람의 내부일지도 모르고요. 헤어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단절되는 것이고... 그런데 화자인 '나'는 '그대'가 왜 그걸 천국이라고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뜻 아닐까요?
-보배: 소양님은 창작하시죠? 누군가와 헤어지고나면 뭔가 폭풍 쓰지 않으세요?
-지연: 창작인 뿐만 아니라 대부분 그러는 듯해요. 싸이월드 일기 쓰고 블로그 글쓰고...
-보배: 아무래도 시인이 뭔가를 경험했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인 것 같아요.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만다 안개(2연 1~3행)' 아, 우리 사이 협곡이라니... 정말 누군가랑 헤어지고 쓴 시 같아요. 그런데 '약기운'? 이건 무슨 상징일까요? '달빛'?
-다은: 크레졸이 뭐에요?
-보배: 마취시키는 약 아니에요?
-다은: 그 약 아닌가?
-수덕: 그런데요. 만약 게이 유부남이라면, 가정이 유배지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겠어요.
-다은: 맞아요. 그런데 '그대'가 떠난 곳을 천국이라고 표현했다는 게... 어쩌면 '그대'가 화자를 떠나면서, 이성애 가정에는 네가 줄 수 없는 안정감이 있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까요?
-보배: 113페이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연에 괄호로 표시된 것들은요?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지연: 이건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을 질문하고 답하는, 자문자답 같아요.
-보배: 내가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시니컬하게 대답하는?
-다은: 아니면, 크레졸에 취해서... 마취약에 취해서 들여다본 제 안의 내면을 묘사한 게 아닐까요?
-아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는 다른 상징들도 발견했는데요.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4연 1~2행)'. 이 부분에 등장하는 호루라기가 통금시간으로 야간 통행을 금지했떤 시대적 상황에 대한 묘사인 것 같고요. 그 전 행에 악수하며 헤어지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게이 커플을 묘사한 것 같 같습니다.
-보배: 기형도가, 묘한 게, 성별을 강조하지 않아요. 동시대 시인들은 대부분 여성을 대상화하는 데 익숙해져서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별이 딱딱 구분돼있는 느낌인데요. 기형도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해석 가능성이 다양해지죠.
-소양: 자기검열일 수도 있다고 봐요. 대상을 정확히 남자라고 명시하면, 아무래도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 자신의 작품이 검열 대상으로 지목 당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요. 시인이 일부러 숨긴 것 같아요.
-보배: 좋은 해석입니다.
-아란: 저는 「늙은 사람」 낭독 할게요.
(아란 시 낭독)
-아란: 평소 특별히 좋아하던 시는 아닙니다. 노인에 대한 화자의 시선이 좀 잔인하다고 느껴졌기도 했고요, 나이주의와 외모지상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기도 했고... 그런데 오늘 여러분 말씀 듣다보니 제가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이 시가 새롭게 읽히고, 공감됐습니다. 화자는 노인을 무조건적으로 타자화해놓고 혐오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혐오와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걸 읽게 됐어요. 저도 레즈비언으로서 남성 노인과 여성 노인을 바라볼 때, 다르게 볼 수 밖에 없더라고요. 여성 노인에게는 괜히 미래의 내 모습을 이입해서 상상하게 되기도 하고, 탈성애적인 존재가 될까봐(이것도 노인차별적인 시선이라는 것 인정합니다)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요. 또, 거리의 노인에게 이렇게까지 격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퀴어한 것 같아요. 대부분 그냥 스쳐지나가잖아요.
-수빈: 실제로 되게 많이 계시죠. 탑골공원에요.
-보배: 그쵸. 대부분 신경쓰지 않는 늙은 남자라는 존재가, 기형도의 눈에는 '쉽게 들키'는 것을 보면, 완전 퀴어하죠. '그는 쉽게 들켜버린다/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1연 1~2행)' 이 부분은 발기를 뜻하는 것 같아요.
-아란: 아... 그렇구나! (혼란, 감탄)
-보배: 굉장히 노골적인 시네요. 그리고 노인을 보는 시선도 단순하지만은 않아요. 3연에서는 '나는 혐오한다'면서, 4연에서는 태도가 사뭇 달라져요.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단 한걸음도/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4연 전행)' 자신의 혐오하는 시선 자체에 대한 통찰과, 약간의 반성이 보여요. 이런 갭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화자의 복잡한 시선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단순히 혐오만은 아닌... 그런 게 재미있어요.
-아란: 네. 평소 화자의 시각이 되게 잔인하다고 생각해왔는데, 기형도가 게이라면, 늙은 남자를 게이로서 바라봤으리라는 가정을 하니까,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어요.
-보배: 저는 지금껏 기형도가 퀴어성을 꽁꽁 숨기는 시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다시 살펴보니 되게 직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은: 저는 「질투는 나의 힘」 읽겠습니다.
(다은 님 시 낭독)
-수빈: 마치 자신이 젊은 나이에 죽으리라는 걸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자기 생에 대한 정리를 해놓은 것 같네요.
-다은: 이 시를 고른 이유는... 기형도 특유의 찌질한(^^) 감성이 좋아서인데요. 어떻게 보면 퀴어스럽게 읽힐 수 있는 것 같아요. 질투라는 어휘 자체가 일반 한국 남자들의 입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단어잖아요? 질투한다는 것을 적극 인정하고 밝히는 태도 같은 거요. 그런 감정들이 공감 가고요. 그걸 솔직하게 썼다는 점을 미뤄보아, 그 시대의 힙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란: 뭔가 일반적인 한국 남성의 젠더와 다른... 친해지고 싶은 느낌이네요.(^^)
-보배: 그러면 제가 다음 읽을 시를 고르겠습니다. 저는 45페이지의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읽겠어요.
(보배의 시 낭독)
-보배: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대단히... 원나잇을 하는 게이 청춘의 이미지가 대단히 떠올랐고요.(^^) 아란이 방금 얘기했듯이, 관습적인 젠더 역할을 생각해보면, 보통 남자들이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1연 3행)'처럼 자신의 육체를 사용했다는 식으로 얘기하지는 않잖아요? 오히려 남자들이 여자의 육체를 탐한다거나 사용한다고 표현되어 왔죠. 그런데 이 작품은 '내 육체를 사용했다'고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고요. 또, 다른 작품들에서 드러났던 퀴어적인 우울이 이 시에서도 보였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았던 문장은요.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1연 9~10행)' 이 부분인데요. 이파리들이 유독 크고 넓다, 그것은 나무가 자신의 내부를 숨기기 위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무의 숨겨진 속내를 파헤친다는 것은, 의심이 많은 사람의 시선으로만 포착해낼 수 있는 진실이잖아요. 그런 게 보여서 이 문장도 좋았어요. 네. 사실 마무리를 하려고 제가 급하게 고른 시이기도 합니다.
-손지인: 저는 시집에 실린 가장 마지막 시 「엄마 걱정」 읽겠습니다.
(손지인 님의 시 낭독)
-손지인: 제일 좋아하는 시인데요. 기형도에게 있는 어둡고 우울한 느낌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시 같아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2연 3행'이라는 구절도 와닿았어요.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 가보면요, 할머니가 아버지는 따뜻한 아랫목에 재우시고 본인은 차디찬 윗목에서 주무셨어요. 윗목이 정말 뼈가 시리도록 춥거든요... 엄마를 기다리는 순간을 그 시절 유년의 윗목에 비유했다는 게, 어린시절의 추억이 얼마나 차갑고 쓸쓸했는지... 이걸 표현하는 것 같아요.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1연 4행)'라는 표현도 좋았고요.
-보배: 설명이 예술적이세요.
-지연: 기형도 시에는 엄마나 누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없고.
-수덕: 그 시절 많은 아버지들이 폭력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소양: 저는 「그집 앞」이라는 시 읽어보고 싶어요.
(소양님의 시 낭독)
-지연: 아, 너무 슬프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16행)'...
-소양: 퀴어퀴어해서 읽고 싶었어요!
-다은: 제 게이 친구중에 만나자마자 "나 못생겼어?"라고 먼저 물어보는 애가 있어요.
-소양: 그런데 일반 이성애자 남성 중에는 자기 못생겼냐고, 외모에 대해서 자학하고 발언하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보배: 발제문 보면 아시겠지만, 이 시를 가지고 김현 평론가가... 그렇게 썼다니까요. 정말. 여자한테 상처를 줘서 그런 거다... 그런 식으로 해석했어요.
-손지인: 그렇게 읽으면 읽히는 면도 있겠죠.
-보배: 렌즈에 따라 다르게 보이겠죠.
-수빈: 왜 제목이 「그집 앞」 일까요?
-소양: 장소가 퀴어들한테 중요하지 않아요? 종로 앞이라던가 홍대라던가...
-손지인: 어떤 풍경과 장소는, 사람이랑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집에 누군가가 있어서 그 풍경이 되게 달라보이기도 하잖아요. '집이 그리워'라는 말은 엄마가 그립다는 얘기이기도 하고요. '키우던 바둑이가 그립다'는 것도 집이 그립다는 말이 되니까요. 그집 앞이 그립다는 말은, 그 사람이 그립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한 게 아닐까요.
-보배: 근데 내용은 술집 내용이에요. 그럼 이 술집이 기형도에게는 집이나 다름 없었다는 걸까요? 마음이 편안해지는, 집 같은 의미...?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7행)',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15행)' 노래하던 술집은, 과연 어떤 술집이었을까요?
-일동: (다시금 시 들여다보며 감상)
-보배: 여러분. 근데 눈이 침침하지 않나요? 시간이 많이 늦어서 공원이 어두워졌네요. 저는 시집이 잘 안 보이는데요.
-일동: 네.
-보배: 무지개책갈피 제1회 돗자리세미나, 이만 마치겠습니다. 모두들 나와주셔서, 의미 있는 말씀들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형도의 시를 퀴어적으로, 굉장히 성공적으로 읽어낸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