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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전경린의 『엄마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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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복숭아 댓글 2건 작성일 16-04-07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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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전경린의 ?『엄마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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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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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을 시켜 먹을 때마다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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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느릿느릿 고춧가루와 간장과 식초를 부어 탕수육 장을 만들었다. 아무리 느리게 해도 탕수육 장은 이내 만들어졌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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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 장에 들어가는 양념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고춧가루와 간장과 식초. 서로 어울리는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양념은 탕수육 장이라는 이름 아래, 결국은 섞여서 탕수육을 찍어 먹기 좋은 장의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아무리 느리게 해도 탕수육 장이 이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 작품 속 세 명의 여성―주인공 호은과 그녀의 엄마 윤진(혹은 미스엔), 그리고 윤진이 낳지도 않고 호은과 피가 섞이지도 않은 '딸' 승지는 서로 거부하고 밀어내고 '눈곱만 한 정도 들일 생각이 없는 듯이(p.49)' 외면해도 결국 '엄마의 집' 안에서 하나의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 이 집에 왔었거나 오는 사람들은 모두 이름에 알파벳 N이 들어간다. 이름에 N이 세 개 들어가 호은이 '미스엔'이라고 부르는 (노)윤진부터 호은(Ho Eun), 승지(Seung ji), 윤진의 애인인 민경(Min kyuong), 호은과 승지의 아빠이자 윤진의 전 남편인 헌영(Heon young)까지. 이곳은 알파벳 N이 모여 사는 곳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등장하는 인물 중 알파벳 N이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K, 오로지 호은만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호은과 연인 관계였다. K가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작품의 초반부로, '아직도 유효한 상처(p.37)' '이젠 보고 싶지 않았다(p.38)' 등의 서술을 통해 묘사된다. 그러나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p.79)'라는 거듭된 서술에도 불구하고, 호은은 계속 K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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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의 웅얼거림을 들으며 납작 누워서 처마 아래 군자란을 보니 시시각각 바뀌는 다양한 장면 속에서 K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하게 표정을 지으며 떠올랐다. 이젠 보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려보았다.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K가 더 생생하게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그 시절에 대한 혐오와 그리움이 똑같은 밀도로 육박해왔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좋은가 싫은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K는 해결이 필요한 내 감정의 과제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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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K와 호은의 고등학교 시절 연애 과정이 10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히 설명된다. 하지만?그 긴 서술 동안 둘의 성별이 동성이라는 사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마치 성별이 중요한 사항이 전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런 태도는?엄마의 집을 구축하고 있는 다른 두 여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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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비혼족이니?"
"그게 뭐야?"

"결혼 않고 사는 사람."

"하든 말든 상관 없어."

"너 게이니?"

"상관없다니까, 그런 건."

꼬마가 아주 맹랑하게도 심하게 쿨한 척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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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만 내가 양성애자라면 어때?"

"어떻긴? 그런가 보다 하지."

엄마는 의외로 쿨했다.

"엄만 왜 그렇게 관대한 거야? 내 친구 엄마들은 끓는 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펄펄 뛸 텐데. 잘못 발설했다간 집에 갇히거나, 쫓겨나. 그래서 다들 상자처럼 입을 꾹 닫고 최후까지 가족에겐 비밀로 하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 저마다 자기 생긴 대로, 행복을 찾아야 한다구. 그게 인생인걸. 범죄가 아닌 이상, 누구도 그걸 억압해서는 안 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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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윤진은 호은에게 "그리고,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이 꼭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보다 덜 위험한 것도 아니야(p.148)"라든가 "하지만 네가 정말로 양성애자라면, 사회적 소수로서 피할 수 없는 불이익과 차별과 편견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알아야 해(p.148)"라는 말을 남긴다. 작가 자신이 성소수자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가 엿보이는 문장이다. 앞서 던진 호은의 질문이 가벼운 커밍아웃이었다면 윤진이 보인 반응은 나쁘지 않다.?앞서 윤진은 전 남편인 헌영과 그의 친구 경자의 관계를 의심했었다는 말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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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에 말이야. 경자 아저씨와 니 아빠가 어찌나 붙어 지내던지, 난 두 사람이 애인이 아닐까, 의심했었어."

"동성애?"

"그런 거."

"아니었어?"

"하긴 동지애와 동성애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어. 동성애와 꽤 비슷한 거였을지도 몰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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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을 보면 윤진이 동성애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며 어느 정도의 오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엄마의 집』의 주 소재는 동성애가 아니다. 21세기형 새로운 가족이 생성되어 봉합되는 과정 사이에 작가인 전경린은 운동권 세대의 몰락과?주체적인 여성 등의 소재를 끼워넣었고 젠더퀴어도?그 중 한 가지다. 이 작품도 앞서 언급했듯이 '탕수육 장'인 것이다. 탕수육 장은 하나의 양념으로서 맛을 가지지만 온전히 액체로 녹아들어 섞이지 못한다. 작품 내의 모든 소재 역시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젠더퀴어란 소재는?간장 위를 동동 떠다니는 고춧가루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호은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K를 만나 오해를?푼 뒤?온전히 끝을 내고?윤진과 헌영의 이혼을 떠올리며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된다.?과거 K와 호은은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고, 그때 호은은 이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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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떠나버린 괴괴한 기숙사 방에서 밤을 새우는 동안, 몸을 무는 벌레처럼 질문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K는 왜 내게 다가왔을까? K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렇게 냉담할까? 무엇을 피하는 것일까? 무엇을 부정하는 것일까? 대체 진심이 뭘까? 우린 무엇을 한 것일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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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2년 4개월 만에 호은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재회한다. 호은은 K가 '근본적으로, 그러니까 생리 화학적으로 달라진 것 같(p.171)'다고 생각하지만 K는 호은에게 "선밴 여전하네(p.171)"라는 말을 던진다. 하지만 호은 역시 그때와는 다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반문하던 2년 4개월 전과 달리, 그녀는 '진실은 실은 표면에 드러나 있는데, 보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그 많은 진실들을 다 놓쳐버리고, 우린 무지와 오해 속을 살아간다(p.176)'라는 독백을 남긴다. 또한 그때의 서로를 '그때 우린 불우했다. 그리고 어렸다(p.177)'고 평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호은은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보는 데에 성공하며, 이것을 스스로의 문제의식으로 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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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와의 관계에서 내가 후회하는 것은 우리 관계가 시련에 처했을 때, 친구들의 여러 가지 말과 비난과 그들의 측도에 휩쓸려 내 진심의 갈피를 잃었다는 것이다. 나와 K의 가치를 저버렸을 때 우리 사랑의 생명은 물거품처럼 꺼져버렸다. 그러니, 오래 나를 괴롭혔던 실연의 아픔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사랑이 다시 온다 해도 나는 뒷걸음질칠 것만 같다. 사랑은 나를 격정적으로 만들고, 균형 잡힌 관계들을 훼손시키고, 내 일상의 페이스를 무너뜨린다. 내 사랑에 대해 내가 보는 눈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눈은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반드시 끝이 난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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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호은의 사랑에 대한 고뇌는 작품 중후반부 내내 이어진다. 이것에 대해 답을 주는 것은 윤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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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사랑이란?"

엄마는 대답하기를 망설이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호은아. 사랑이든 삶이든, 난 그게 내 몫의 강물을 헤엄쳐 건너는 일 같아. 그 물은 내 존재로부터 솟아나와 큰 강을 이루어. 누구에게나 혼자 건너야 하는 강이 있는 거야. 언젠가 아저씨와 내가 헤엄쳐 건너야 할 물을 다 건너고 햇살 따스한 기슭에 닿아 옷을 말리면 좋겠다. 그게 결혼이라도 좋고 아니라도 좋아. 넌 사랑의 결실이 뭐라고 생각하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흔히 말하듯 아이, 하나의 가정 같은 거 아닐까…

"사랑의 결실은 변태야. 변화를 겪고 달라지는 것."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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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의 말에 따르면 호은 역시 K와의 사랑의 결실을 맺은 셈이다. 그녀는 승지와의 만남과 K와의 재회 등을 계기로 변화하여, 사랑의 공포에서 벗어나 '나만의 강물(p.280)'을 꿈꾼다. 헌영이 승지에게 "호은이를 언니라고 불러(p.43)"라는 말을 남겼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다고 해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란 말은 할 수 없(p.44)'다고 말하던 호은은 작품 후반부에 "나를 언니라고 불러(p.244)"라는 말을 남긴다. 젠더퀴어는 단순히 호은이라는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호은을 정립시키는 데 필요한 것, 즉 정체성이다. 그녀는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작품 내내 끝없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끝끝내 그 결실을 맺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엄마의 집』은 이전의 전경린 작품은 물론이고 순문학 계에서도?다른 맥락에 서 있는 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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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경린, 『엄마의 집』, 열림원, 2007, p.21.

2) 위의 책, p.79.

3) 위의 책, p.41-42.

4)?위의 책, p.147.

5) 위의 책,?p.70-71.

6)?위의 책, p.89.

7) 위의 책, p.182.

8) 위의 책,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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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둥그리님의 댓글

둥그리 작성일

흥미롭게 잘 읽고 갑니다~ 전 책의 주장(?)대로 호은이 바이섹슈얼이구나, 라고 생각했지 젠더퀴어 맥락으로 읽진 못했네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박복숭아님의 댓글

박복숭아 작성일

감사합니다! 그냥 이런 관점도 가능하구나- 하는 마음가짐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오독한 부분도 있을 수 있고, 무리하게 끼워맞춘 부분도 분명 있을 테니까요. 다시 한번 댓글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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