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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첫 ㅡ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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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혜 댓글 2건 작성일 16-03-1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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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첫 ㅡ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페이지 표시는?어문각에서 2006년 발행한 『수레바퀴 밑에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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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첫 사랑은 달콤쌉싸름한 기억일 테지만,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퀴어가 경험하는 첫 사랑은 정체성 확립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 보다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퀴어라는 단어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변환될 수 없듯, 어떤 이는 첫 사랑을 만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인식하는 데 성공하지만 누군가의 첫 사랑은 첫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나가기도 한다. 이 리뷰에서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누군가의 첫 사랑에 대한 서사로 읽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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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만 존재하는?세계에서의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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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들에게 권장도서로 읽히기도 하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신학교를 중퇴한 경력이 있는 저자의, 변형된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 한스는 헤세와 마찬가지로 신학교를 입학했다가 자퇴하며 그 과정에서 하일러라는 소년을 만난다. 선생님들과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차석으로 신학교에 입학한 한스와 달리 하일러는 문학에 빠져있는 소년으로, 애초에 강제로 입학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일이 없었다. 우연한 계기로 하일러와 친해진 후로 한스는 점차 의무감으로 하던 공부에서도 손을 놓아버리고, 둘은 더더욱 다른 무리들과 어울리는 대신 서로에게만 의지하게 된다. 서로 입을 맞추고(130) 하일러가 공부하는 한스를 꾀어서 함께 침실로 가자고 졸라대기도 하는(137) 식으로. 어느 날 하일러가 한스에게 “너는 젊은 여자의 뒤꽁무닐 따라가 본 적이 있니?”(185)하고 묻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일러는 이 물음 이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다른 도시까지 탈주를 하는 바람에 학교에서 퇴학조치 당하고, 한스는 하일러의 탈주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으며 과하게 부진한 성적으로 선생님들과 학생들로부터 적대시되다가 이전부터 좋지 않던 건강이 더욱 쇠약해져 학교를 자퇴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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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의 이야기는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로도 이어져서 엠마라는 외지 여자와 짧은 연애를 맛보기도 하지만, “당신도 나를 사랑해요?”(262)라는 엠마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했으면서 다음 날 그녀가 자신에게 말도 않고 떠났다며 그녀의 문란함을 탓하는(268) 모습을 보인다. 학교를 떠난 후로 하일러는 한스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지만 한스의 꿈에서(255), 무의식에서(270) 하일러가 엠마와 함께 등장하는데, 한스에게 하일러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친구밖에 없다. 소설에서는 ‘게이’라든지 ‘동성애’라는 단어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한스의 주위에는 사실상 자신을 제외하고는 동성애를 부정적으로조차 설명해 줄 사람이 하나 없다. 동성애가 없는 세계에서의 동성애는 그리하여 유별난 우정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정이라는 단어에, 친구라는 단어에 하일러를 끼워맞추는 일은 한스에게는 버거워 보인다. 한스에게 하일러는 첫 사랑이라는 단어를 찾지 못한 첫 사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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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가 엠마에게 느낀 감정은 하일러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의 착시였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좋아하는 남자애 이야기를 하는 데 끼어들고 싶은 여자애가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애 이야기를 그 애 앞에서 즐겁게 하는 것처럼. 하일러에게 한스는 소년기의 방황 중 하나였던 것도 같지만 한스에게 하일러는 가까이 있어도 잡히지 않는 동경이었다. 동경하는 상대가 권하는 일이라면 마땅한지 따져보지도 않고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상대는 내가 그와 같다고 오해한다면. 한스에게 하일러는, 어쩌면 누구나의 처음이 그렇듯, 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이전까지 어른들이 주입한 공명심을 꺼리면서도 정해진 직선의 길을 성실하게 걷던 한스가 직선 밖으로, 돌부리와 강가에게로, 하일러에게로 이동한 것을 단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삶을 바꿔놓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이면서 사랑 이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그러나 동성애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한스는 하일러를 친구 이외의 이름으로 정할 수가 없어서 그저 막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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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 마을 전체가 필요하듯 한 아이를 해치기 위해서도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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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일 때, 중학생 권장도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한스에게 하일러의 입맞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을지?자꾸 의문이 들었고?시간이 지나서는 이런 책을 읽히면서도?동성애를 있을 수 없는?일처럼 묘사했던 서평에 배신감이 들었다.?『수레바퀴 밑에서』는 반어적/모순적 서술이 두드러지는 작품인데, 신학교를 나서고 아마도 이성애 사회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적응했을 하일러에 대한 소설의 마지막 서술은 이렇다. "그 정열적인 소년은~어엿한 한 인간이 되었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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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반에도 한 명쯤은 있었을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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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vl0327@gmail.com?로 피드백 주시면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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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보배님의 댓글

보배 작성일

잘 읽고 갑니다. 반어 서술법이 두드러지는 작품인지는 읽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네요. (아니면 그냥 기억을 못하는 건가?) 마지막 문장까지 저렇다니, 다음엔 한 번 그 점에 주목해서 읽어봐야겠어요 :)

지혜님의 댓글

지혜 작성일

앗 저것은 하일러가 학교를 나간 이후 3인칭 서술자 시점에서의 문장이어요. 이후로는 한스 생각 속에서만 종종 나옵니다. 올리고 발 동동 굴렀는데 잘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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