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기다리기, 박선우] 수치스러운 몸은 언제나 기다린다: 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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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리뷰팀 댓글 0건 작성일 2025-09-09 20:30본문

처음 맞은 ‘퀴퍼뽕’은 달콤했다. 그러나 몸은 다시 수치심으로 가득 찼다. 누구는 ‘퀴퍼뽕’으로 일 년을 버틴다고 하던데 나는 약발이 잘 안 받나 보다. 그럼에도 퀴어 퍼레이드에서 마주친 활기 넘치는 몸들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활력이 생겼다.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와 같은 구호를 함께 외치면 나도 싸울 힘이 생기는 것 같았고, 모두가 지인인 듯 인사하는 장소에서 나는 거리감 있는 친밀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곳을 떠난 내 몸은 무지개 타투를 지우고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퀴어 퍼레이드가 말하는 외치는 ‘프라이드’는 내 일상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1) 퀴어 퍼레이드에 다녀온 이후, 직장동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상사는 내게 왜 연애를 하지 않냐고,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냐며 꽤나 순수한(?) 질문을 했다. 나름 한국에서 살아가는 게이로서 거짓말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등이 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비정상’으로서 느껴야 하는 수치심,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내 몸에 대한 수치심으로 얼굴은 붉어졌고, 수치심을 내비친 내 몸에 또다시 수치심을 느꼈다. 수치심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신체적인 반응이다. 그렇게 자긍심을 가지는 데 실패하고 움츠러든 내 몸에서, 나는 살기 싫을 때가 있다.2)
박선우 작가의 소설집 『햇빛 기다리기』에는 수치심이 새겨진 게이-퀴어 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이야기에서 나는 내 몸과 동거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퀴어의 수치심
그렇다면 수치심은 어디서 발생할까. 「사랑의 미래」 속 ‘나’는 애인과 일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동대문 JW 메리어트 호텔에 묵기로 한다. 어떠한 무례나 불상사로부터 유리된 곳이라고 생각하며 들어온 호텔에서 ‘나’는 자신과 애인을 향한 호기심과 혐오 섞인 시선을 느낀다. 시선을 의식한 ‘나’는 체크인을 하는 애인을 두고 멀리 떨어졌다 데스크로 다시 돌아온다. 그때 나는 “소리내어 나를 부르지도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했”던 애인을 마주한다. 방안에 들어온 ‘나’는 잠시 혐오의 시선이 가득한 바깥세상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지만, 조식 뷔페를 먹던 중 옆 테이블 부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지하고 또 다시 경직된다. 일상으로 돌아온 이후 전염병이 심해지며 봉쇄 조치가 이어지자 몰래 만나자고 이야기하는 애인에게 ‘나’는 전염병에 감염되고 “서로의 몸을 만지고 입을 맞췄다는 정황 같은 걸 들”킨다면 어쩔 거냐고 따진다. 그건 “질병에 대한 걱정이랄까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고 “좀 더 근본적인 불안에 의해서였고, 오랫동안 견뎌온 공포의 무게를 끝내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수치심은 단순히 ‘나’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나’의 경계에서 발생한다. 실제로 옆에 있던 가족과 부부가 ‘나’를 어떤 시선을 바라보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나’의 수치심은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 ‘나’의 몸에 새겨진 ‘시선’에서 기인한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가 사회에서 감각하며 몸에 새겨진 자국(impression)이다.3) 사라 아메드는 “퀴어 느낌은 퀴어 느낌이 재생산하는 데 실패한 각본이 반복되는 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이 ‘정동’은 퀴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퀴어가 (이성애) 규범에 개입하는 것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알려준다. (중략) 퀴어 느낌은 삶과 사랑에 대한 기존의 각본과 불화하는 불편한 감각과 이 불편함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모른다는 불확실함 가운데 생기는 설렘을 함께 끌어안는다.”라고 말했다.4) 우리는 퀴어 느낌으로서 수치심을 사고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어딘가로 향할 수 있지 않을까.
미래 없음
그러나 아메드가 말한 설렘이 단순히 희망찬 이야기는 아니다. 표제작인 「햇빛 기다리기」에서는 중심 이야기가 서술되는 와중에 동시대 이슈들에 관한 기사 제목이 틈입한다. 대선 후보자들의 성소수자 혐오 발언, 동성 부부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소송 패소,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 퀴어축제조직위 법인 불허. 이러한 현실은 미래에 대한 퀴어의 상상을 빼앗는다. 소설 속 ‘나’는 신경정신과를 방문하여 검사지에 쓰인 괄호를 이렇게 채운다. “내가 어렸을 때는 (꽤 발랄했던 것 같은데)/정말 행복해지려면 (뭘 어떻게 할까요)/ 남녀가 함께 있는 것을 볼 때 (그런가보다 한다)/ 내가 저지른 (살아 있다는 것일지도)/평생 하고 싶은 일은 (그런 게 어딨어)/언젠가 나는 (죽겠지)”
이때 수치심 대신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퀴어의 생존에 중요한 것일까. 가령 커밍아웃은 수치심을 자긍심으로 치환하는 행위로 인식된다. 하지만 실제로 커밍아웃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소설 속 화자의 커밍아웃은 가족들에게 종종 무시된다.(「겨울의 끝」, 「햇빛 기다리기」) 「겨울의 끝」 속 ‘나’가 “듣기로는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고, 동성애 선언은 관 뚜껑에 못이 박혀도 뛰쳐나와서 해야 한다는데” ‘나’에게는 “그럴 만한 의욕이랄까 에너지가 없었다.” 커밍아웃이 마냥 가치 없는 행위라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질 때 당사자에게는 피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5) 그러니까 자신의 당사자성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어쩐지 불합리하다고 느껴지기도 하고(소수자의 가시성을 위해서 어쩌구 저쩌구…) 힘을 내어 한 발화가 힘을 잃고 아예 무시되기도 한다.
어쩌면 더 이상의 커밍아웃이 의미 없어진, 답 없는 상황(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지도 모르지만 「겨울의 끝」 속 ‘나’는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엄마와 분리되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엄마한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박선우 작가의 작품 속 화자들은 성숙한 어른이 되는 ‘정상적인’ 성장 서사를 만드는 데 실패한다.
이렇게 보면 현실을 살아가는 퀴어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정상적인’ 시간성에서 탈락한 퀴어의 몸엔 수치심이 새겨진다. 어쩌면 대부분의 퀴어 관련 행사에서 자긍심을 주요한 감정으로 내세우는 이유도 수치심을 유발하는 ‘정상성’을 거부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부정적인 것으로, 자긍심을 우리가 가져야 할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까. 수치심을 자긍심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수치심을 느끼는 지금!)를 삭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미래는 언제나 현재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오는가. 박선우 작가는 이를 거부하는 듯하다.
「햇빛 기다리기」 속 ‘나’는 신년을 맞아 애인과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 ‘나’는 새해를 함께 보내는 만큼 당연히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인 줄 알았지만, 애인은 ‘나’의 말을 듣고서야 그런 계획이 있었느냐며 ‘나’에게 맞춰주겠다고 말한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자신에게만 선택을 맡기고 뒷짐 지는 듯한 애인에게 화가 났지만, 그가 그저 “무엇이든 함께해줄 심산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일출 시각이 다가올 무렵 ‘나’는 잠에서 깨지 않는 애인을 재촉하기보다 그의 곁에 누워 침대에 머물기로 한다. 침대에 누운 두 게이의 모습은 일출을 보러 “한 방향으로 뛰다시피 걷는 사람들”과 대조적이다. 미래를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몸과 함께하기. 거기에는 밝은 희망을 보장하는 듯한 스펙터클로서의 일출 대신 “명멸하는 빛”이 있다.
퀴어의 감정을 자긍심으로 내세우는 작업은 나에겐 어쩐지 ‘치유의 폭력’과도 닮아있다. 이는 현재의 감정, 감각을 접힌 시간 안으로 넣어버린 채 오직 다가올 밝은 미래만을 바라보게 만든다.6) 물론 소수자들이 자긍심을 외치는 맥락(부정성을 떠안는 현재의 구조)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수치심(을 느끼는 나의 몸!)을 소거할 수도 없다. 박선우의 소설은 그 수치심에 머물면서 현재의 몸(을 둘러싼 감정, 감각, 그리고 또 다른 몸)으로 새로운 시간성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몸 의식하기
현재(의 몸)를 접지 않고 어떤 시간성을 만들 수 있을까. 박선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친구의 죽음을 다른 친구에게 숨기다 죽은 친구를 매일 같이 떠올리고(「이 세상의 것」), 지나간 연인을 곱씹다가도 끝내 그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하고(「결혼식 가는 길」), “어떤 관계는 작별을 통해 영원히 지속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남아 있는 마음」). 또 이별을 예측해보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남아 있는 마음」), “설령 그 끝이 아득한 나락일지라도,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실감과 절망뿐일지라도” 사랑에 뛰어든다(「우리 시대의 사랑」). 이들은 과거의 망한 관계를 애도하면서, 현재 곁에 있는 망할(?) 관계에 뛰어들면서 살아간다. 더글라스 크림프는 정체성이 관계적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고정된 정체성이 아닌 관계적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를 제안한다.7)
수치심이나 자긍심이 퀴어의 본질적인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정상성’이 그토록 지워내고자 했던 우리의 ‘몸’을 삭제하지 않는다. 감정을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몸’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8) 퀴어는 관계의 불확실함과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몸과의 관계에 뛰어들며 자신만의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엄마는 목련이 봄의 시작을 맞이하는 꽃이 아니라 겨울의 끝을 배웅하는 꽃이라 했다. (중략) 겨울이 떠나가는 풍경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비로소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웃음이 나왔고, 뭔가를 실감하는 일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 같았다.(「겨울의 끝」)
겨울의 끝을 배웅하는 것처럼 퀴어는 지나간 몸을 애도한다. 혹은 앞당겨 애도하며 곁에 있는 몸을 사랑한다. 그렇게 다른 몸들 사이에서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로 나아간다. 아니, 나아가지 않는다. 그저, 기다린다. 기다림은 대상이 도착하면 쉽게 잊힐 동작이다. 미래에 의해 삭제될 현재. 『햇빛 기다리기』는 그러한 기다림 자체에 주목하고 그 동작에 머물러 있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수치심을 느끼는 우리(몸)는 언제나 기다림의 시간에 머물러 있고, 나(몸)는 그것이 가끔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1) 퀴어 퍼레이드가 자긍심을 내세우는 방식에 대한 비판은 이연숙·남웅, 『퀴어 미술 대담』 (글항아리, 2024), 195-206.
2) “나는 이제 이 몸에 살기 싫어요/이게 나를 너무 힘들게 해요/나 이제 이 몸에 살기 싫어요” 우희준, 「넓은 집」, 2025.
3)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역(오월의봄, 2023), 34.
4) 사라 아메드, 앞의 책, 333~334.
5) 오혜진 “그런데 제가 식민지 시기의 문학을 공부해온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 발전론적인 서사로 다 수렴되지 않는, 한국 소수자 운동의 후기식민성과 지정학적 맥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하다못해, 가시화를 위한 필수적인 미션처럼 여겨지는 ‘커밍아웃’ 같은 것들도 저는 좀 어색해요. 이게 과연 유교 국가에서 MBTI I로 자라온 내향적인 나에게 맞는 정치인가?(웃음)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데 내가 막 나대면서 “저 성소수자예요”라고 말하는 게 되게 이상하단 말이죠. 아무튼 저는 퀴어 정치가 향하고 있는 제도화와 규범화의 흐름에 대해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싶었어요.”
6) 김은정,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강진경·강진영 역(후마니타스, 2022), 18.
7) 더글라스 크림프, 『애도와 투쟁』, 김수연 역(현실문화, 2021), 258.
8) “나는 당신을 만나 비로소 몸을 의식해요” 이랑, 「SHAME」, 2025. 이랑은 2022년 싱글 「삶과 잠과 언니와 나(Pride)」를 발매하고 3년이 지난 올해 싱글 「Shame」을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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