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농담이 (아니)야, 이은용] 웃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마냥 웃지만은 마시고: 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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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리뷰팀 댓글 0건 작성일 2025-08-26 20:10본문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 이은용, 2023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 감히 묻고 싶다. ‘웃음’은 과연 모두에게 평등할까? 우리 모두는 웃거나 ‘웃김’ 당하는 관계 속에서 평등해 본 적 있는가?
앞의 두 질문에 대해, 본지에서 소개할 첫 번째 퀴어 문학 「우리는 농담이(아니)야」1)는 일말의 해답이 되어 준다. 이 작품은 동명의 희곡집에 수록된 장막극으로, 2021년 작고한 극작가 이은용의 유고작이기도 하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가 전세계를 장악했던 2021년은 세계인 누구나 질병과 죽음 앞의 두려움을 통렬하게 체감한 시기였으며, 퀴어들에게 있어서는 이에 파생되는 혐오와 죽음을 직면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또, 한국의 퀴어들에게 그 해는 유난히 죽음과 가까운 해였다.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이 죽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조롱하고 죽음의 무게를 묵과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속 등장인물들에게서도 죽음에 대한 은유를 드문드문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정신과에 가서 한 20만 원 하는 검사를 받아 진정한 트랜스젠더임을 인정받으면 성전환증 진단 서류가 나왔습니다. ―웃으라고 한 농담인데 아무도 안 웃으시네요.― (<1. 월경>, 26쪽)
무대 위, 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를 이루는 6편의 짧은 이야기 중 두 번째 이야기 <월경>의 주인공인 ‘진희’이다. 그가 가상의 관객과 주고받는 대화와 질의응답은, 진희가 자신이 트랜스 남성임을 고백하며 시작된다. 진희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경험한 트랜지션의 과정을 설명하고, 이내 자신이 던진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는(어쩌면 웃지 못하는) 상황을 능청스럽게 꼬집는다.
이처럼 듣는 이로 하여금 ‘웃지 못할’ 상황을 유발하는 것은 비단 진희의 농담뿐이 아니다. ‘웃지 못할’ 이야기의 정의는 젠더 규범에 불화하는 존재로서 경험하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것을 언어화하는 고백, 나아가 그 모든 진술의 주체인 트랜스젠더라는 기표를 전부 아우른다. 차마 웃어넘길 수 없는 언술은 <월경>의 진희를 비롯해 6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로부터 시시때때로 터져 나온다. 소위 ‘시덥지 않은’ 말장난쯤으로 치부되곤 하는 농담이라는 자조에 빗대어 인물들이 던지는 말들은 다양한 주제와 목적을 아우른다. 그들의 농담은 소수자로서 겪는 차별에 대한 고백이자, 성별 이분법적 사회에 대한 저항이자, 애도조차 될 수 없었던 퀴어들의 죽음을 세상에 기록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되기도 한다.
사람2 그거야 뭐, 너무 어두운 농담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사람1 어두운가? 그냥 웃었으면 좋겠는데. (<4. 유언장 혹은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76쪽)
네 번째 이야기 <유언장 혹은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언장 쓰기 워크숍을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죽음의 밑그림을 그린다. 위의 인용문에서, “인공지능이라는 거 참 대단해”(76쪽)라며 시작된 사람1과 사람2의 대화는 언뜻 인공지능이 장악하게 될 정보사회에 대한 막연한 잡담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숨은 의미는 결코 막연하지도, 신변잡기적이지도 않다. 친구의, 연인의, 혹은 어떤 관계로도 정립되지 않는 주변인의, 종국에는 자기 자신의 죽음이 언제나 가까운 곳에 함께 있는 삶은 그야말로 퀴어한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납골당, 상조회사, 유언장과 같이 죽음과 연결된 상징들이 그들의 ‘알고리즘’을 장식하고 있는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또한 퀴어의 죽음은 손쉽게 우스갯소리로 소모되는 퀴어의 삶과도 대비된다. 소위 ‘퀴어스러운’ 모습이나 상징은 손쉽게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 되지만, 그들의 일상과 죽음은 그야말로 ‘너무 어두운’ 농담으로 여겨지며, 듣는 이로 하여금 웃지 못할 불편함을 유발한다. 이은용의 희곡은 바로 이러한 퀴어 농담의 역설을 전면화한다. 이로써 그동안 곤란한 것, 어두운 것, 불편한 것으로 일단락되었던 퀴어 농담이 그러한 속성 그 자체로 도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사람1 선생님, 미친 사람과 제정신을 갈라놓는 기준이 있나요?
의사 글쎄요. 그런 기준을 가지고 계시나요?
(중략)
사람1 같이 갈래?
사람2 그러자.
사람2, 침대에서 일어나 사람1의 손을 잡는다. 둘은 같이 문밖으로 나간다. 문이 밀려 닫힌다. (<2. 이인실>, 62쪽)
물론 가끔씩 그들은 말해요. 너는 꼭 계집애같이 군다, 가끔 게이 같을 때가 있다……. 재밌죠. 성별의 벽이라는 건. 어쩌면 그 벽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견고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3. 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 72쪽)
시간도, 장소도, 상황도 연결되지 않는 여섯 편의 짧은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계속해서 벽을 넘고, 문을 여닫고, 선 안과 밖을 오간다. 그렇듯, 웃긴 이야기와 웃지 못할 이야기를 교란하는 그들의 ‘농담’은 성별 이분법의 테제를 온몸으로 휘젓는 트랜스젠더의 정체성과도 닮아 있는 듯하다.
보았듯, 「우리는 농담이(아니)야」가 선택한 기술은 명확하다. 트랜스젠더의 퀴어한 삶을 웃음과 자기 풍자로 우회하고, 한차례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 끈적한 불편함을 남기는 방식이다. 이 불편함은 퀴어 문학을 태동하게 한 궁극적인 의문과도 닮아 있다. 이성애 규범성에 대한 저항과 전복을 희구하고, 퀴어의 ‘존재함’과 ‘살아 나감’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 속에서 역동하는 퀴어들의 불편한 존재와 그보다 더 불편한 웃음은, 우리가 결코 쉽게 웃어넘길 수 없는 촌철살인의 농담이 되어 책장 위에 끈적하게 자리 잡는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우리 모두는 웃음 앞에 평등한가? 마음 편히 웃는 사람과 속절없이‘웃김’당하는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인력이 존재하는가? 더해서, 누군가의 어두운 농담은 그저 어둡고 불편해서 자리를 벗어나고 싶게 할 뿐인가?
이은용의 희곡은 앞의 질문들을 향한 불편한 해답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누군가에게만은 평등하지 못했던 웃음의 역설은 인물들에 의해 통렬한 자조와 풍자로 탈바꿈된다. 그들의 삶은 무대 아래의 관객을 단 한번 시원하게 웃기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어두운’ 농담이지만, 어쩌면 그 자리에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숨겨야만 했을 존재들에게 보내는 초대장이자 애도의 작별인사일 것이다.
1) 이은용,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제철소, 2023. 이 희곡은 <0. 매일의 죽음>, <1. 월경>, <2. 이인실>, <3. 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 <4. 유언장 혹은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5. 그리고 여동생이 문을 두드렸다>로 구성되는 6편의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의 인용에서는 인용문 뒤 <제목>, 쪽수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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