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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문학 리뷰어가 좀비 소설을 읽는 방법 – M. R. 캐리 <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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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배 댓글 0건 작성일 20-06-2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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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R. 캐리 <멜라니 : 구원의 소녀>

박나리 역, 은행나무, 2016




안녕하세요. 저는 퀴어문학 마니아이자, 사실은 좀비 소설 애호가입니다. 좀비라고 하면 앞뒤 안 재고 읽곤 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읽게 된 <멜라니>는 그야말로 뒤늦게 발견한 보석. 나름의 결점이 있지만 그간 읽어본 좀비 소설을 단연코 뛰어넘는 작품이라고 하면, 혹시 읽어볼 마음이 드실까요? 꼭 읽어보세요. (영화도 있다고 해요.)


가장 중요한 말은 했으니 이제 다른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멜라니>에는 표면적인 퀴어 서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퀴어 문학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주인공이 겪는 정체성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멜라니는 일반적인 좀비('헝그리'라고 불려요)와는 다르게 높은 IQ로 사고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사랑, 연민 등의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는 어느 순간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무서운 '허기'를 마주하고 겁에 질립니다. 그 맹목적인 욕망으로 인해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저스티노 선생님을 해칠 수도 있을까봐 두려운 것이죠. 모두 멜라니를 헝그리 실험체로 취급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인간 아이로 대해준 사람이니까요.


선생님은 내 빵이에요, 내가 배가 고플 때. 아, 선생님을 잡아먹고 싶다는 뜻은 아니에요, 선생님! 정말로 아니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릴 거예요. 전 그저…… 노래 가사에서 빵이 그 남자에게 해주는 식으로 선생님이 제 안을 채워준다는 뜻이에요. 선생님은 제가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해주세요.


멜라니의 정체성 고민과 분투는 퀴어 독자에게도 익숙한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좀비와 퀴어는 속성상 닮은 구석이 제법 많은 것 같아요. 좀비는 삶과 죽음 사이, 퀴어는 젠더 이분법 사이를 넘나들며 질문케 하는 존재지요. 기괴한 괴물 취급을 받기도 한다는 점도요. 재밌지 않나요?

​더불어 <멜라니>는 퀴어 문학에 대한 오래된 기억 하나를 끌어올려주었습니다. 그 기억이란 퀴어 문학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종종 들려오던 말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퀴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이상의 깊이를 담고 있다.'


퀴어 그 이상. 호평 또는 절찬을 의도한 그 말이 저는 늘 불편했습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듣는 퀴어 기분 나쁘다 였겠죠. 흐린 눈으로 그 말의 저의를 의심스레 곱씹고 있노라면 퀴어라는 의미(혹은 범주, 삶까지)가 점점 하찮고 작은 영역으로 축소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저조차 어떤 작품을 퀴어문학이라고 부르는 데에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실제로 퀴어문학이란 범주를 부담 또는 오류로 생각하는 창작자들도 제법 있으니까요. 


그러다 <멜라니>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읽어본 좀비 소설들과 많이 달랐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액션 장면과 아름다운 문장, 결말의 반전까지 마음에 드는 부분은 너무나 많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물이었습니다. 주요 인물은 총 다섯 명. 앞서 말한 멜라니와 저스티스 선생님, 유능한 군인 팍스 중사와 유약한 이등병 갤러거, 그리고 좀비 연구에 집착하는 캘드웰 박사가 있죠. 흔한 좀비물은 선한 영웅들 사이사이에 비열하거나 한심한 인간을 집어넣어 좀비(절대악)와의 격돌을 주춤하게 만드는 데 치중합니다. 반면 <멜라니>속 인물은 각각의 빛과 어둠을 안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선하지만 때로 강하게 냉정해지고, 주로 비열하다가도 순간의 따뜻함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왜냐하면 상자 안에는 선과 악이 다 들어 있었으니까. 모든 것은 언제나 선인 동시에 악이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으려면 상자를 열어야만 했다.


그리고 헝그리들은 단순한 괴물에 불과할까요? 독자는 헝그리들이 주인공을 덮칠 때 함께 혐오감에 떨다가도 멜라니를 따라 헝그리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멜라니>는 공격하는 좀비 괴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좀비물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해 다른 무엇도 아닌 좀비가 필요한 소설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좀비가 가장 맞아떨어졌던 이 소설, ​<멜라니>를 '좀비물을 뛰어넘은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좀비 소설은 ‘정상인’들이 사악한 좀비를 죽이며 도망치는 상투성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멜라니>처럼 좋은 좀비 소설도 있습니다. 

다수의 퀴어 소설은 부욱 찢어진 종잇조각 같은 퀴어 인물을 그려내 소재로만 소비합니다. 하지만 좋은 퀴어 소설도 많습니다. 퀴어소설 이상의 의미를 가져서 좋은 것이 아니라, 퀴어 소설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더욱더 빛나는 작품 말이죠. 


그런 작품들에 좀비/퀴어 소설을 “넘어섰다”고 평하는 대신 “좋은 좀비 소설이다” “좋은 퀴어 소설이다”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 간단하고 정확한 진실이죠.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기죽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으며 더 많은 작품을 퀴어문학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더 많은 작품을 좋은 퀴어문학으로 소개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럴 거라 믿습니다. 겸사겸사, 좋은 좀비 소설도 많이 읽을 거라는 다짐을. 




보배

퀴어문학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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