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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되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는 ― 한야 야나기하라, 『리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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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혜 댓글 4건 작성일 16-12-16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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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되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는 ― 한야 야나기하라, 『리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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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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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 또는 어떤 삶에 익숙했던 사람에게 전혀 다른 일, 또는 전혀 다른 삶이 발생한다. 이전 것은 최악이고, 다음 것은 최선이다. 인생이 역전되었을 때, 기쁨만큼 들이닥치는 것은 불안이다. 이렇게 좋은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날 리가 없어. 이렇게 좋은 사람을 내가 만날 리가 없어. 이렇게 선한 사람이 내 곁에 있을 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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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이 거짓이면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삶이 거짓이기를 바란다. 하루 빨리 거짓이 밝혀지면 언제 이 삶이 끝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이 사람들이 본색을 드러날까, 언제 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인 걸 알아볼까, 언제 나를 비난하고 경멸할까, 겁먹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 삶이 진짜일까? 실감이 나지 않는 날에는 자해를 한다. 그것은 매일이다. 매일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에 매일 팔을 긋는다.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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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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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친구들이 있다. 배우 지망생 윌럼, 로스쿨 학생 주드, 예술가 제이비, 건축을 공부하는 맬컴. 넷은 대학 신입생 시절 우연히 기숙사 룸메이트가 되면서 알게 되었다. 어쩌면 넷 사이의 접점 또는 공통점이란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의 과거를 몰랐고 각자 밝히기로 한 과거에 대해서만 알 수 있었다. 한편, 그들에게는 가능성이 전 재산이었기에 과거는 몰라도 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무수한 기회가 주어졌고, 그 무수함이란 정녕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굴곡이야 있었지만, 40대에 접어든 네 사람은 모두 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잃은 것, 또는 그 이전에 이미 잃어버린 것은 흉터처럼 장애처럼 남아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처럼’ 남아있고, 주드에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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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하라는 특히 주드에게 초점을 맞춰 소설을 진행한다. 주드의 이야기는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을 소비시키는 포르노로 여겨질 만큼 혹독하다. 그럼에도 “그는 낙천주의자였다. 매달, 매주, 그는 눈을 뜨고 세상에서 또 하루를 살기를 선택했다. 때로는 모든 게, 그렇게 잊으려 애쓰던 과거조차 회색 수채물감처럼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고통이 너무 심해 다른 세상으로 옮겨지는 것처럼 끔찍한 기분일 때도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런 주드의 곁에서 윌럼은 긴 우정을 선택한다. 윌럼에 따르면 “우정은 상대방의 더딘 불행을, 길고 긴 지루함을, 간간이 찾아오는 승리를 목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장 비참한 순간들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 자기도 그 사람 옆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이다.” 윌럼과 애인이 미래를 계획하고 상상할 때조차, 윌럼은 그 가족 안에 주드를 포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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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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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럼과, 또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염려 안에서, 주드가 만나게 되는 사람은 어이없게도 주드가 대학 이전에 만난 사람들과 같은, 학대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연인에게 학대받았다는 사실이 발각되고 그 폭력적인 관계가 끝나면서 그는 “자유”를 느낀다. “다시는 사람을 사귈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했다고. 학대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고,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너무나도 고마운 사람들을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그러나 몇 가지 우연의 일치로 그의 자살은 시도에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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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가 자살을 시도했을 때 영화촬영차 해외로 떠났던 윌럼은 주드를 돌보기 위해 공식적으로 휴식기간을 가진다. 그리고 예전처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불현듯 윌럼은 주드에게 연애감정을 느낀다. 이전에는 분명히 아니었는데, 이전 애인들은 모두 여자였는데, 심지어 게이인 친구 제이비와 호기심으로 애무를 했을 때 서로 전혀 감흥이 없었는데. 윌럼은 자신의 고백이, 그리고 연애로 새롭게 시작한 관계의 전개가 주드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영향에 대해 고민한다. 그 후, “두려운 섹스 그 자체는 없되, 서로를 사랑하고 섹스를 하고 있는 건강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온기가 주드와 윌럼의 관계에 부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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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 너무나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사랑의 증거인 양,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섹스는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으러 등장한다. 주드는 “윌럼 옆에서 잠을 깨는 매일 아침을 위해, 윌럼이 주는 모든 애정을 위해, 그와 같이 있는 편안함을 위해서 참을 수 있었다.” 다만 “윌럼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행복한 시절”, 주드의 몸에는 스스로 낸 상처가 터무니없이 늘었지만, 결국 윌럼은 섹스를 주드와의 관계에서 포기하고, 둘은 오롯이 다정한 연인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주드와 윌럼의 관계는 보스턴 결혼[1]과도 유사하다. 자해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많이 줄었고, 주드는 여전히 건강하지 않지만 자상한 양부모와 상냥한 애인과 함께 삶을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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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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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고 진술되는 주드의 심리 탓에 그가 결국 자살하지 않을지 마지막 장까지도 걱정한다. 위에서 요약한 줄거리는 소설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으며, 딱히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함은 아니지만 주드의 삶의 결말은 적지 않았다. 다만 소설을 다 읽고도 기억에 남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던 주드 시점과 스스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주드를 이해하지 못한 양부 헤럴드, 친구였고 애인이었던 윌럼 시점 사이의 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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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사이에는 거대한 유리벽이 있어 애정은 도달하지 못하고 반사되기만 한다. 그 벽은 무너지지 않고?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달하지 않는 애정을 기어코 전하고자 애쓰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전해지지 않는 애정이지만,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모습은 벽의 건너편에서도 보인다. 그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어느 편에서도 마음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리틀 라이프』는 치유되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는 삶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사람들의 기록으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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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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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서는 <동성애자끼리 우정은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이 책의 리뷰를 썼다.[2] 퀴어 서사를 ‘퀴어 서사임에도 불구하고’라거나, ‘이것은 퀴어 서사가 아니다’라고 평하는 것만큼이나, 작가가 부각하지 않은 소수자성에 방점을 찍어 읽는 것 또한, 의도적인 오독이다.[3]?물론 리틀라이프는 퀴어 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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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많은 사람에게 두려워하면서 권한다. 등장인물의 육중한 고통이 독자에게 삽화의 계기가 될까 두렵지만, 이 소설을 읽는 누구나?행복을 보장받는 사람은 없지만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있음을 확신하며, 그러나 치유에 대한 희망 없이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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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fkvl03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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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맨틱하면서도 성적이지 않은 여성들 간의 관계, 격한 감정을 성기 섹스로 환원시키지 않는 관계’(에스더 D. 로스블럼 & 캐슬린 A. 브레호니, 『보스턴 결혼』, 알·알 옮김, 이매진, 2012년, 9쪽)

[2] 2016년 6월 25일 종합 18면 기사

[3] 윌럼에게 친구들과 동료들은 게이로서 커밍아웃할 것이냐 묻고, ‘남자와 사귀고 있는 게 아니’라 ‘주드와 사귀고 있’다는 윌럼의 발화를 비겁하다 힐난하기까지 한다.?윌럼의 이러한 태도가 현실에서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어떤 발화들과 닮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는 스스로를 게이로 정체화하지 않으며 주드 이전의 이성 연애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주드의 경우 윌럼과의 관계 전후 무관하게 에이섹슈얼, 또는 에이로맨틱으로 읽히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애초에 이 소설은?동성애자들에게 우정이 가능한지와?전혀 상관없는 소설이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우정이 가능한지 묻듯, 분명 동성애자 사이에서 우정이 가능한지 물을 수 있지만, 이 소설의 내용은 그런 질문과?정말 상관없다.

댓글목록

지혜님의 댓글

지혜 작성일

피드백 감사합니다!

라몽님의 댓글

라몽 작성일

졔님 글은 늘 읽고있답니다.<br />섬세한글 덕분에 리뷰만 읽어도 감동스러워요. <br />고생 많으셨습니다:)

독자님의 댓글

독자 작성일

문장이 무척 적확하고 적확해서 아름다운 리뷰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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