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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리뷰 : 그럼에도, 회생의 글쓰기 - 김봉곤 「A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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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배 댓글 0건 작성일 16-01-1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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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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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회생의 글쓰기 - 김봉곤 「Aut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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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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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다.

그럼에도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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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나쁜 한국식으로 벌써) 한 살을 더 먹었습니다. 한 해의 성과를 억지로 확인해야 하는 연말을 겨우 보내고 나면, 이번엔 목표를 강제로 세워야 하는 새해입니다. 서로를 위로할 틈도 주지 않고 시간은 가장 꼿꼿하게 흘러갑니다. 이런 와중에 책상 앞에 앉아 (혹은 저처럼 침대에 엎드려) 읽거나 쓰거나 읽고 쓰는 여러분, 새해를 어떻게 맞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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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을 읽는지 모르겠어. 비교적 젊은 나이에 비교적 많은 돈을 벌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습니다. 저의 새해 풍경입니다. 분명 책은 읽어도,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읽거나 쓰는 일은 적어도 전력을 다해 몰두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대충 읽고 대충 쓰는데도 가끔 외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막막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당연히 어떤 직업과 취미를 가진 누구에게나, 내게 난데없는 질문을 던진 그 지인에게도, 그런 순간은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선 유독 읽고 쓰는 일 때문에 막막해지는 당신들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1월 1일, 새해 벽두부터 반가운 메시지를 던진 김봉곤의 신춘문예 당선작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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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LGBT 친구들 모두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연대와 지지의 손을 내밉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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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언론의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접하리라곤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따뜻한 놀라움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찾아 읽은 중편소설 <Auto>는, 가끔 우리를(적어도 저를) 웅크리게 하는 퀴어 정체성 + 애서가 취향에 톡톡 어깨를 두드려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반가웠고, 공감이 갔고, 그러면서도 새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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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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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는 오토픽션autofiction3)의 형식으로, 삶의 각종 단면과 감정을 내밀하게 묘사하는 퀴어 문청의 자전적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오토픽션 글쓰기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메타소설4)이기도 합니다. 게이 작가 지망생 ‘나’가 사랑하는 ‘그’와 보내는 일상, 이별하는 날, 글쓰기 수업에서의 일화, 유년 시절의 기억 등을 조각난 글로 풀어내면서, 동시에 ‘이 글’을 쓰는 과정에 대해 첨언하며 글 속의 글로서 ‘커밍아웃’합니다. 이처럼 화자 ‘나’는 ‘이 글’을 쓰는 저자이며, 그렇기에 <Auto>를 쓰는 작가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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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픽션, 메타소설 같은 (쓸모없는) 용어를 모른다 해도,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형식의 차이라는 점은 알아챌 것입니다. 영화의 한 신scene같은 조각글이 늘어서 있고, ‘~것 같다’라거나 ‘~하고 말았다’처럼 (문단에서 기피하는) 불확실한 만연체가 이어지며, 사전을 직접 인용하거나 ‘ㅋㅋㅋ’가 포함된 휴대폰 메시지 내용을 삽입하기도 하죠. 신춘문예 심사평에서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세대 작품의 점(點)적 구성의 흐름”과 “점프 컷(장면의 급전환)과 소격효과 등의 기법”이 언급되었는데요.5) 사실 이런 형식은 이전에도 많이 쓰였고, 이제 혁명적일 만큼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법이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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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소설의 형식적 기법은 새로움이 아니라, 회생(回生)을 위한 것입니다. 소설은 빈틈없이 완벽하게 축조된 구조물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벗어나, 그 질서에서 떨어져 나간 언어와 삶을 되살리려는 복원의 시도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auto>의 글쓰기는 사랑을?살려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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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에서 정의한 사랑은 (중략) 올 들어 그 범위는 다시 ‘이성’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나의 동성애 중심적 사고를 반성하며, 다른 시각으로 ‘사랑’의 사전적 정의를 이해해 보려 상상력을 발휘하고 의미를 쪼개고 합쳐 보아도, 사랑을 정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느낀다. 정의해야 할 것이 책도, 사과도, 영화도 아닌 바로 사랑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불능일지도 모른다. 이 불능에 가까운 정의를 전형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협소하게 뜻을 재정의하는 것은 오히려 사전의 기능에 역행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사랑에 보편을 요구하고 정의하려는 것은 언어의 영역에서 벗어난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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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사전 등재를 위한 경제적인 단어로서의 ‘사랑’ 바깥에 존재하는 사랑을 증명합니다. “도저히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나와 나의 남자친구”의 사랑을 <Auto>의 언어를 통해 노출합니다. 언어에서 탈락된 사랑이 제 언어를 안고 회생하는 순간, 우리는 언어와 글의 의미를 질문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것을 쳐낸 언어의 축조물, 그 완벽함을 위해 희생된 공백에는 무엇이(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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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 기법을 강조하는 글쓰기 수업 교수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수는 세월호 희생자의 1인칭 시점으로 글을 써오라는 지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립니다. 좋은 글쓰기에 필요한 테크닉을 자신감 있게 설파합니다. 반면 ‘나’는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절망을 어떤 언어로 써내야 할지 도무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타인의 절망을 언어로 옮기는 작업은 공백을 삭제하는 폭력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을, ‘나’는 통감합니다. 그렇기에 나(Auto)에 대한 글을 쓸 수밖에 없으면서도, “왜 난 고작 나이며, 나의 기억만을 할 수 있”는지,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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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나’조차, 시간 속에서는 불확실하기만 합니다. 스스로의 기억들은 점차 희미하게 변해갈 따름입니다. 기억이란 필연적으로 단편적이죠. 따라서 하나의 이어진 글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잘 정리된 하나의 구조적 서사란, 실제 현실에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가고, 나의 기억은 여러 파편으로 흩어져 날아가고, 시간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계속 흐릅니다. 미니멀한 글을 쓰다니요. 화자의 말대로, "나는 하나도 미니멀하지 못한 인간"입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나’가 할 수 있는 작업은 그저 떠오르는 대로, "아마도 ~것이다"처럼 불확실한 문장뿐임에도, 필사적으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노스탤지아, 즉 "되돌아가지 못하는 고통"을 좇아 단편적으로나마 되짚어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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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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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는 생산적인 재화로서의 글을 피하고 공백과 거리를 되살리는 작업을 시도하는데, (예상하시겠지만) 이건 사실 불가능한 실험입니다. 언어는 자신의 팬들을 허무하게 만들 만큼 본질적인 폭력성을 가지고 있죠. 특정 개념을 묶어내고 다른 것들은 가차 없이 쳐내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더하지요.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읽고 쓴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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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적인 틈은 매끄럽게 포장되고 이음매는 재단되어 이렇게 한 문장, 한 문단을 이룬다. 그 사이의 공백을 거리를 아무도 모르고, 나도 당신의 것을 모른다. (중략) 하지만, 어쩌면 이 문장은 또 매끄럽게 이어져 있고, 매끄럽게 읽히고, 우 리는 가 끔 이 어 져 있 기도 하고, 당신은 이어주었고, 나도 다시금 힘을 내어 잇기를 계속한다. 나의 글쓰기만큼 내밀한 사랑을 당신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나의 사랑만큼 내밀한 글쓰기를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고, 시작되고, 어느 순간 이어져 있음을 기뻐하다 다시 끊어졌다, 이으려 하고, 우리는 이어질까?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나는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이어져 있었음을, 그 환희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하고 글을 쓴다. 그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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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서로의 공백과 거리를 알 수 없는 절대적인 불가해(不可解).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 이어지고(혹은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기에 ‘나’는 문장을, 문단을 잇습니다. 다시 사랑하고, 잇다가, 다시 끊어지고, 결국 이어지게 될까 질문하고, 그럼에도 잇습니다.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이어져 있었음을, 그 환희의 순간"을 잊지 못하기에 씁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철저히 공백으로 취급한, 사전 상 '사랑' 바깥에 위치한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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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 언급되는 다양한 텍스트 (영화, 음악, 문학) 역시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문단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열거하여 보여주는 것이죠. 그 중 많은 수가 퀴어 텍스트인데, 서로를 사랑하는 퀴어 서사가 이렇게 많고, 그 언어에 공감하는 누군가에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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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의 말대로 모든 글은 오토픽션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쓰기에 Auto, 내가 '쓰기'에 Fiction." 하지만 세상의 질서는 Fiction만을 살리고 내밀한 '나'(그것이 누구이든)를 공개하기 꺼려하지요. 김봉곤의 <Auto>는 자꾸 흐려지는 '나'의 공백의 순간들을 언어로써 불러 세웁니다. 삶과 글의 경계가 투명해지는 오토픽션은, 특정 서사만 구조화하는 글쓰기 질서를 전복하면서 퀴어한 글쓰기의 좋은 예시를 보여줍니다. 결국 사람은 반드시 죽으며 ‘시간 속에서는 오직 현재만 돌출’할 뿐이라면, '어떤 순간을 가지는' "일순간의 영생"을 위해 나(auto)는 그저 자동(auto)적으로 쓸 따름입니다. 그렇게 순간들을 붙잡는 '나'의 언어는 종이 위에 물질로 굳어지고, “끔찍하고 행복”한 글의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나'(Auto)들을 호명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경이롭게 이어지는, 어떤 순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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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신춘문예 홈페이지(http://www.donga.com/docs/sinchoon/2016/01_1.html)에서 작품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2) 김봉곤, "당선소감" 인용. 원문: http://www.donga.com/docs/sinchoon/2016/01_3.html

3) 오토픽션: 한 작가가 실제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하나의 개성과 삶을 상상해내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문학 장르. 소설화한 자서전이라기보다는 부분적 혹은 전체적으로 자전적 성격을 내장한 허구다. - 김화영,「파트릭 모디아노 혹은 기억의 모험」,『계간 문학동네』, 2015년 봄호(82호) 수정발췌

4) 메타소설: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허구의 장치를 의도적으로 그리는 것을 가리킨다. 메타픽션은 그것이 픽션임을 의도적으로 독자에게 알리는 것으로, 허구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시한다. - 위키백과 “메타픽션” 수정발췌.

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D%83%80%ED%94%BD%EC%85%98

5) 구효서, 은희경, "심사평" 인용. 원문: http://www.donga.com/docs/sinchoon/2016/01_2.html

6) 김봉곤, 「Auto」, 페이지 없음, 이후 출처표기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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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보배 @blueriox

퀴어문학 마니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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