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 ― 한강, 「에우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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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혜 댓글 0건 작성일 16-07-17 14:36본문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 ― 한강, 「에우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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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표기는 『노랑무늬영원』(문학과지성사, 2012)를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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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을 최근에 처음 읽었다. 작년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단편을 처음 읽었는데, 수상작보다 작가 선정작으로 읽은 「에우로파」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는 다른 소수자들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자주 상징으로 비유로 쓰이고 읽히는데, 에우로파의 화자인 ‘나’의 목소리는 같은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닿을 수 있으면서도 상징에는 그치지 않아서, 내가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내 생각을 누가 알아채고 활자로 옮겨놓은 것 같아서 여러 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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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기도 한 에우로파는 목성의 위성 이름이다. 나의 친구이자 내가 되고 싶었던 여자인 인아가 부르는 노래 제목이기도 하고, 인아가 나를 처음 만난 날 부른 그 노래는 내가 억눌러왔던 갈망을 불러내기도 했다. 에우로파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인아와 나의 관계가 결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것이 꼭 목성과 에우로파처럼 보였다. 나와 인아는 친구의 소개로 만난 후 6년을 지냈지만 다소 피상적인 관계로 머물렀는데, 서로 처음으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 둘의 변형된 관계 또한 사랑이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인아를 사랑한다고 해도, 인아가 나와 입맞춘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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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언제나 너를 특별하게 생각했어. 지금 이 순간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나는 너처럼 되고 싶어.”(76)
“너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고, 너 같은 몸을 갖고 싶어. 어떤 밤에는, 그 갈망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어.”(77)
나는 인아가 싫어하지 않을 만큼 이따금, 잠깐씩 조심스럽게 입맞춰보지만, 그 이상을 인아가 원하지 않는 것을 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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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와 내가 여전히 친구이고 자매인 까닭은 내가 원피스를 입고 힐을 신고 진하게 화장을 하는 지정성별 남성이어서도 아니고, 인아가 이혼한 이성애자여서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것은 성정체성과 성지향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인아라는 여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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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되고 싶은 것이 되는 것 말이야. 도울 게 뭔지 생각해볼게.”(92)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태어났다면 뭘 했을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다 살아낼 수 있다면 뭘 할 것 같아?”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미칠 듯 뜨겁게 치밀어 오른 말들을 내가 입에 담았다면, 우리는 처음으로 싸웠을지도 모른다. 그게 마지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답을 네가 나한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닥쳐. 닥치라고. (93)
세면대 위의 거울 속에서 나를 건너다보는, 친숙하고도 낯선 사람의 얼굴을 마주 건너다본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한 번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사람이 저기 있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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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에 인아가 보인다면,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 어린 시절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을 내다보며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저녁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우산이 없어 강당 처마 아래 서서 잦아들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던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 그런 순간 막연히 만나고 싶었던 모르는 누군가의 얼굴(87)이 거울 속에 보인다면, 내가 바라는 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인아를 사랑하고, 혹시 인아도 나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언제나 바라던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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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리뷰를 쓰고 있는 나의 거울 속에도 언제나 친숙하고도 낯선 사람이 있다. 내가 단 한 시도 되고 싶었던 적이 없는 사람. 굳이 미워할 이유는 없지만, 가끔 미워지는 사람. 거울 속에 있는 몸, 지금 타이핑을 하고 있는 몸이 이것과 다른 형태였더라면, 불가능한 상상을 가끔 하게 될 때가 있다. 마법이라도 써서 남의 몸을 뺏을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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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종하듯 스위치를 내린다.(96) 인아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어둠을, 인아의 허락 없이는 걷을 수 없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낯선 나의 얼굴이 있고, 언제나 그리운 인아의 얼굴은 거기에 없다. 단지 목성의 곁을 맴도는 에우로파처럼, 혹은 에우로파에 결코 닿을 수 없는 목성처럼, 멀지 않은 곳에 언제나 그리운 얼굴이 있다는 것만이 저 불분명한 어둠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96)을 억누르는 것이다. 사실 나와 인아는 목성과 에우로파가 아니어서 서로를 깊게 상처 입히고 아주 멀어지는 일이 있을 줄도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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