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한 사이 ― 임철우, 「나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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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혜 댓글 2건 작성일 16-06-12 19:21본문
로맨틱한 사이 ― 임철우, 「나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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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퀴어 무성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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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퀴어문화축제에서 북적이던 에이로그 부스가 아직 눈에 선하다. 거기에 힘을 얻어 이 소설을 나의 정체성과 가깝게 읽으려 하니 간단하게라도 젠더퀴어 무성애자에 대해 쓰고 본격적인 리뷰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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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젠더퀴어는 자신의 지정성별에 관계 없이 자신을 여자/남자 중의 하나가 아닌 다른 성별로 정체화한 사람, 혹은 여자/남자 중 어떠한 성별로도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이다.[1] 뉴트로이스, 젠더플루이드, 안드로진 등 다양한 하위분류가 있다.
?다음으로 무성애자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2] 무성애자는 로맨틱지향성[3]에 따라 나뉘며 로맨틱지향성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끌리는 양상을 성 또는 젠더에 기반하여 나타내는 용어 혹은 그 수단’을 말한다.[4] 그 유무와 대상에 따라 무로맨틱과 이성/동성/양성/범성로맨틱으로 나뉘며, 후자는 연애나 결혼을 지향할 수 있지만 '사랑'이라는 단어에 성애를 포함시키지 않는다. 로맨틱이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국어에서 성애를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유성애 중심으로 사용하기에 좋은 번역어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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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뉴트로이스[5] 범성로맨틱 무성애자이고, 이렇게 생각한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입밖으로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 어색하다. 각각의 단어를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고 그냥 레즈비언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분명 레즈비언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데. 참 오래 디나이얼 젠더퀴어로, 디나이얼 무성애자로 살았다.
?한편 픽션에서 좋아하거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등장인물이 있더라도 지정성별에 따라 여자와 남자로 구분되기 일쑤이므로 그 인물을 젠더퀴어라고 말하기 어렵다.[6] 또 한국문학에서는 그 인물의 정체성이나 지향과 상관없이 성애묘사가 생략되어 있으므로 콕 집어 무성애 서사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랑이 당연히 성애로 이어진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으므로, 성애묘사가 없더라도 로맨틱 무성애자로 읽기보다는 동성애/이성애/양성애로 읽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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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에서 다룰 소설 <나비길> 기병대와 양성구의 관계 또한 동성애를 염두에 두고 쓰였으리라. 하지만 기병대와 양성구가 서로의 경험과 감정을 털어놓고 가까워지는 장면에서도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와 마을 사람들의 목격담에서도 성애 묘사가 전혀 없다. 호모포비아 혹은 성 엄숙주의를 이유로 쓰이지 않았을 개연성이 분명히 있으나 이 글에서는 로맨틱 무성애 관점으로 읽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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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선생과 이발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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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서,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가 가장 어렵습니다. 인간의 언어, 인간들의 말에 항상 지독히도 서툴렀어요. 난 아무리 해도 그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고, 그들은 또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나이들어서야 깨달았는데, 사실은 내가 불구였더군요. 잘못된 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어요. 물론 애당초 불구인 탓에, 내겐 세상 사람들의 언어를 배울 능력 역시 없었습니다. 결국 난 입을 닫고, 내 언어를, 내 식으로 말하는 법을 영영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불구가 아닌 척 세상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가려면, 그 길 말고는 달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그 말씀,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 역시 인간의 말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또 두렵습니다.” (pp.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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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나비는 항상 정해진 길만 따라서 날아다니는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걸 가리켜 ‘나비길’이라고 부릅니다.”(p.92)
“이발사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비길이라. 그는 지금껏 자신의 삶 또한 호랑나비처럼 빤히 정해진 길만을 따라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여 한 발짝이라도 벗어날까 두려워, 스스로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외면하려 애쓰면서, 세상이 정해준 길을 위태위태하게 따라가야만 하는 삶.”(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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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인용한 부분은 소설의 중반, 사건 이전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만나 사랑하게 되는 계기에 해당하는 장면이다. 인간의 언어로부터 괴리감을 느낀다는 두 사람의 고백과 스스로 나비처럼 정해진 길만 따라왔다고 생각하는 양성구의 심리는 어떤 퀴어 서사에 들어가도 위화감이 없다.[7]
?양성구는 장교 이발을 맡았던 군대에서 일병시절 친해진 중위에게 고백하는 편지[8]를 썼다가 그 편지를 다른 장교들이 보는 바람에, 고백했던 상대에게 경멸당하고 옆 중대에서 근무하던 고향 선배에게 구타당한 후 군인병원 정신과로 호출되어 검진을 받고 이후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트라우마이겠지만, 한편으로 양성구는 인간들의 말에 ‘항상’ 서툴렀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자신을 어떤 부분에서 ‘불구’라고 여겼는지 그는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으며 서술자 또한 양성구와 기병대가 공유하던 비밀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양성구를 양 마담이라고 부르며 희롱하는 나수칠의 태도(p.64~66), 기병대와 교감을 나누고도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을 돌며 외쳐야 했던 ‘나는. 남자다.’라는 구호를 공포감으로 떠올리는 양성구의 모습(p.93)이 성별 이분법적인 이성애 중심 사회가 성적지향과 성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작태와 같으면서도, 양성구에게서 젠더퀴어적인 모습이 관찰되는 것으로도 읽힌다. 가는 곳마다 나비가 따르고 나비를 연구하기도 하는 중학교 생물선생 기병대에게 ‘나비선생’이라는 별명에 더해 ‘변태선생’이라는 별명이 붙은 후 언제부턴가 ‘그의 걸음걸이, 목소리, 제스처, 웃을 때의 버릇, 손발짓에서 드러나는 다소 여성적인 요소 또한 변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p.101)는 것 또한 그렇다.
?한편 마을 주민들이 기병대와 양성구에 대해 수군거리며 나누는 목격담은 모두 손을 잡고 있었다든지, 학교 과학실에 들어가 한참씩 나오지를 않는다든지, 이발소 안에서 껴안고 있었다든지 하는 것밖에 없다(p.102~103). 즉 마을 사람들은 둘이 자주 어울리며 남들을 의식하는 모습에 의심을 품고 수군대지만, 성애 묘사는 단 한 단어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양성구는 사실 여부를 따져 묻는 아내에게 둘이 단순한 말벗 관계일 뿐이라고 강조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에서 매장될 것을 두려워하며 기병대를 멀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런 묘사만 보면 둘의 관계는 로맨틱 무성애 관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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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이후, 침묵하는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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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기병대가 근무하던 학교의 학생들이 자살한 그의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3년이 지난 어느 날 양성구가 나비에 이끌려 둘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것 같은 기병대의 목소리를 듣는 장면으로 맺는다. 양성구는 ‘힘없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을 뿐이다. 서술자는 기병대가 자살한 이유를 체육대회날 모두 앞에서 학부모이자 동네의 자율방범대장인 나수칠에게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로 얼굴이 끔찍하게 부어오를 정도로 얻어맞았는데 누구도 그의 편을 들지도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았다는 점이라고 암시한다. 기병대가 지정성별 남성임에도 남성적이지 않다는 것이, 동성인 양성구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괴롭힘을 당해 흙투성이가 된 학생을 씻기던 모습을 찍은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정신지체 장애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추문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모두가 목격한 폭력이 가해자를 처벌하는 대신 피해자가 사라지기를 바라며 일단락되고, 피해자는 그리하여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전체 소설의 내용이다.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 침묵이 오히려 가장 강한 혐오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은 소문이 퍼져 나가는 동안 누구도 기병대에게 정말로 학생을 성추행했느냐고 묻지 않았고, 말이 아닌 분위기로 ‘차라리 자기 쪽에서 먼저 알아서 정리하고 더는 소리소문 없이 떠나주길 바’랐다. 군대에서 편지 한 장 이후로 보직 변경을 당한 양성구의 경험은 양성구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침묵하는 혐오자가 되는 법을 배웠다. 양성구에게 쓴 편지에 기병대는 이렇게 썼다. ‘저 자신을 사랑할 힘을, 용기를 잃게 될 것 같아 두렵습니다. 도와주세요. 잠시만이라도, 곁에서 저를 지켜주십시오.’ 양성구는 이를 외면하지만 3년이 지난 후에도 그 말을 기억한다. 이제 그의 트라우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배신한 경험이 더해졌다. 스스로 정체화하지 못하고 정체화를 지지할 기반이 없으면 혐오에 대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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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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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 기병대가 겪었듯 “이 정신병자 새끼. 너 같은 놈들은 모조리 죽여버려야 해.”(p.108)라며 죽일 듯이 폭력을 휘두르는 일과 무성애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다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쓰인 폭력은 지정성별 남성 동성애자에게 역사적으로 계속되었다. 소설의 서술 방향은 둘의 관계보다도 소규모 공동체에서의 소문과 폭력을 다룬 인상이 짙으며,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은 서술에서 전혀 감춰지지 않았다. 둘이 시스젠더 남성 게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텍스트에서 보이지 않는 동성애를 상상하기보다 보이는 관계를 읽어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유성애를 표현하고 싶으면 유성애를 제대로 묘사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유성애가 보이지 않으면 무성애도 보이지 않으니까.
?처음부터 비극을 예정하고 달려나가는 서사여서 로맨틱 무성애 소설로 추천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지만, 기병대와 양성구가 서로 사랑하는 단 몇 페이지 때문에 여러 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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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fkvl0327@gmail.com
[1]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행자> 블로그에서 인용했으며 트랜스젠더binary trans와 젠더퀴어non-binary trans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다양한 하위분류 용어정리를 다음 링크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다. http://blog.naver.com/gender_voyager/220504062266
[2] 에이로그 팀, 『에이로그(A-LOG)』(2016), p.8
[3] 무성애 이론은 성지향성과 로맨틱지향성이 독립적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유성애자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로맨틱지향성과 성지향성이 일치하는 이성로맨틱 이성애자, 동성로맨틱 동성애자가 있는 한편 양성로맨틱 동성애자나 무로맨틱 이성애자인 유성애자도 있다. 에이로그 팀, 앞의 책, p.23~24
[4] 에이로그 팀, 앞의 책, p.15
[5] <여행자> 블로그 용어정리 링크에서 설명하는 것 중 ‘신체 부분 중 성별 관념과 관련 있는 곳을 전부 없애고 싶어하는 경우’
[6] 예를 들면 영화 <뷰티 인사이드>의 주인공은 매일 변하는 몸을 지녔는데, 어디까지나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설정이다. 언론에서는 “남주인공만 21명”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매일 몸이 변했다면 젠더플루이드일 수도 있을 텐데, 서사는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7] 양성구가 스스로 불구라고 말하고 기병대가 그에 공감하는 등 일련의 장면은 퀴어를 지나치게 비극적으로 그려내는 편향적 시선과 닿아 있어 아쉽기도 하다.
[8] 실제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으로 유추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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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보배님의 댓글
보배 작성일지혜님, 이 바쁘신 와중에 이런 고퀄의 리뷰라니요...!! 저의 제안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군요. 늘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우고요.<br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지혜님의 정체성을 리뷰 말미의 소개에서 처음 알게 되고, 제 안에 분명히 있을 (그래서 무책 회의 등의 자리에서도 공공연히 드러날) 유성애중심적, 시스젠더중심적인 무지에 걱정이 들더군요. 나름대로 신경쓴다고 하지만 안밖에서 바가지가 샐 경우엔 ;ㅅ; 꼭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br />여튼 이번 리뷰도 감사드려요!
지혜님의 댓글
지혜 작성일와 고퀄이라니>_< <br />저야말로 그간 주저주저하며 제 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글로나마 쓴 것이에요! 말을 제대로 안 하고 있으니 약간 거짓말하고 있는 기분도 들고 하여8_8 활동가이면서 너무 오래 쭈뼛대고 있는데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랍니다. 다음 회의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