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발견 ― 지넷 윈터슨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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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림 댓글 0건 작성일 16-06-08 22:16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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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넷 윈터슨, 김은정 옮김,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2009,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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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것에 대한 맹목적 몰입, 그것은 평범한 일상을 파괴한다. 주인공 ‘지넷’의 엄마가 종교와 신에 몰입할수록, 그녀 자신의 일상은 물론이거니와 지넷의 일상마저도 촘촘히, 견고하게 파괴된다.
? 그녀는 지넷의 학교 입학을 거부하려 했다. 지넷에게 [제인 에어]의 결말을 자신의 마음대로 바꾸어 들려주었다. 언젠가 집으로 찾아온, 지넷의 친엄마를 매몰차게 쫓아냈다. 학교는 ‘그릇된 욕정’으로 가득한 ‘사육장’이기 때문에, [제인 에어]의 원래 결말은 성경의 교리와 맞지 않기 때문에, 지넷은 예수가 자신에게 보내준 아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모든 말과 행동, 그리고 판단의 기준은 자신의 신이다. 의심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겨버린 삶을 사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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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야 말로 유일한 과일이지.” / “오렌지를 먹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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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넷의 엄마는 지넷이 일생의 위험 혹은 정신적인 혼란을 겪을 때마다 오렌지를 권한다. 그녀는 지넷이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려는 순간을 오렌지의 이름, 신의 이름으로 봉쇄해버린다. ‘오렌지’는 교회와 성경, 신에 의해 나뉜 선과 악, 친구와 적과 같은 이분법적 세계다. 지넷의 엄마는 그 자신이 오렌지이기도 하고, 오렌지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지넷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의심을 철회하고, 공고히 하기를 반복하지만, 그것은 결국 ‘오렌지 껍질로 만든 이글루’ 안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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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그가 새로운 시도를 했다. / “사랑스러운 그대에게 하트 모양 사탕을.”
이렇게 말하고서 껄껄 웃은 것이다. 그날 나는 신경질이 나서 내 강아지를 질식시킬 뻔했고, 당황한 어머니가 나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사랑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러나 나는 어린 소녀이고, 그러므로 나는 사랑스러웠으며, 여기 그걸 입증하는 사탕이 있었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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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교사가 될 운명인 것은 좋은 일이었다. 이후로 얼마 동안 나는 남자 문제는 제쳐 놓고 성경 읽기에 집중했다. 마침내는 나도 다른 모든 이들처럼 사랑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 몇 년 뒤, 무심코, 나는 사랑에 빠졌다.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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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 처음으로 성적대상화를 경험한 지넷은 자신의 소녀성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시작으로 자신 주위의 남성, 후에는 남성성의 본질까지 의심을 거침없이 확산시킨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을 경험할 가능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신을 사랑하게 되었듯이 당연히 누군가와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지넷은 ‘멜라니’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세상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천천히, 혹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말이다.
? 하지만 지넷과 멜라니의 사랑은 ‘오렌지의 벽’에 가로막혀 버린다. 두 사람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 그리고 지넷의 엄마 모두 두 사람의 사이를 알아차리게 되면서 지넷과 멜라니는 ‘사탄의 주문에 빠진’, ‘욕망의 죄악에 빠진’ 소녀들이 되었다. 목사와 교인들은 두 사람이 ‘고통에 빠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과 그들의 사랑에 폭언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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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산스럽게 부엌을 빠져나왔고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기 위해 계단 위에 섰다.
“난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너를 사랑해.”
나는 웃어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멜라니의 눈이 잠시 흐려졌다.
“난 모르겠어.”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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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넷과 멜라니가 사랑을 나누던 이 장면은 꽤나 선명한 복선이었다. 신, 교회,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에 멜라니는 항복했다. 그녀는 지넷과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지라는 어른들의 통보에 동의했고, 후에는 직업군인인 남성과 결혼하게 된다. (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났을 때에도 멜라니는?지넷과의 사랑을 아예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는데, 지넷이 느끼는 무력감과 허무함은 문장 밖으로까지 절절하게 전달될 지경이다)
? 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자신의 신만큼이나 특별하다고 믿었던 지넷은 저항과 순응을 반복하다 결국 '히브리인'이 되기로 한다. 목사의 말에 따르면 ‘히브리인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회개하겠느냐는 목사의 마지막 물음에 지넷은 그의 눈을 마주하며 대답한다. “아니요.”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며, 자신의?마음에서 들려오는?소리가 결국 신의 음성이라는 것을 지넷은 깨닫게 된 것이다. 지넷의 부정은 오렌지만이 과일이라 믿으며 살아가는 선한 자가 되기보다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히브라인이 되겠다는 일종의 선언인 셈이다. 그리고 그 선언을 시작으로 지넷을 둘러싸고 있던 오렌지 이글루는 비로소 격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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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둔화제다. 사람들은 잊고, 지겨워하고, 늙고, 떠난다. (...) 세월은 매듭으로 가득한 끈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를 존중하는 것, 매듭을 더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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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이것 좀 봐라, 전자 오르간이다.”
(...)
“피아노는 어떻게 하고요?”
“아, 요즘은 모두 전자 쪽으로 바꾸는 추세다. 난 시류를 따라가는 것이 좋아.”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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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머니는 철학적으로 말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니까.”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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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의 자식을 키울 수 없다는 엄마를 떠나 자신 나름의 삶을 꾸려나가던 지넷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엄마와 자신이 살던 집과 동네, 그리고 교회를 찾는다. 크리스마스였다. 지넷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 지나간 시간만큼 늙어버린 지넷의 엄마는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있다. 지넷처럼 그녀도 자신의 오렌지 껍질 이글루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는 사건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교회의 비리라던가, 목사의 간통이라던가, 선교 사업의 실패라던가) 그 사건들은 지넷의 엄마에게 어떤 매듭이었을 것이고,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넷의 존재 자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듭은 시간 속에서 오렌지의 세계를 차츰차츰 으깨고 부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의 딸처럼 마침내 입 밖으로 꺼내게 된 것이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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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넷과 그녀의 엄마는 꽤나 오랜 시간 거짓말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면서 자신의 삶과 시간 속에 새로운 매듭을 만들었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조금씩 바로 잡게 되었다.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신에게 가까워질 것이다. 거짓말이, 결코 거짓말이 아닐 수 있다는 새로운 발견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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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 (o00itismi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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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젠더 판섹슈얼.
오렌지보단 자몽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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