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 성석제,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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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리 댓글 0건 작성일 16-05-27 12:23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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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사랑은 다섯 번 이루어졌다. 개중에서 오늘 이야기할 첫사랑은 내가 처음으로 ‘받는’ 사람이었던 첫사랑이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았을 때 나는 그에게로 회귀하기를 강렬하게 소망했다. 사실 그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나를 처음 사랑해준 사람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부터 시작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사랑이란 귀하고 특별하면서도 가장 친밀한 것으로 여겨지니까.
?모두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옳은’ 사랑에 초점을 맞춰 말한다. 그러나 첫사랑이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만이 아닌 누군가가 나를 진실로 사랑해준 순간도 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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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쓰인 1996년부터 지금 2016년까지도, 여전히 퀴어에게 첫사랑이라는 키워드는 ‘깨워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이야기가 첫사랑을 다루고 있다.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를 통해 놀라운 갈망을 경험하는 이야기, 붙잡지 못할 사랑을 표현할 방법도 몰라 삼키는 이야기, 지나고 보니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이야기.
?첫사랑은 모든 퀴어들에게 대체로 중요한 계기로 작용해왔다. 동성에게건 이성에게건, 한 사람에게건 두 사람 이상에게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지난날을 돌이켰을 때 우리에게 그렇게 기념할 만한 사람이 있었음을, 우리는 종종 떠올리고는 한다.
?또한 한국, 일본 등지에서 퀴어의 첫사랑 서사는 ‘BL(boys’ love)’ 문화와 더불어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사회상의 북풍을 맞아 더욱 미완성된 분위기를 조성했다. 많은 스토리텔링의 시작이 그러하듯 실제가 가상을 만들면 그 가상이 언젠가는 또다시 실제에 영향을 미친다. 시스젠더 헤테로 첫사랑 서사(‘로맨스’ 장르라고 일축되는)에 비해 퀴어 첫사랑 서사가 훨씬 애틋하고 드라마틱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석제의 <첫사랑>은 이런 점들을 묵묵하게, 하지만 고집스럽게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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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였다. 네가 나에게 사랑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것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명백히 너는 나를 괴롭혔고 우악스럽게 굴었고 나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너는 나에게 우스울 만큼 솔직하였다. 사실은 나의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인 행동들도, 하얀 눈밭처럼 솔직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사랑을 주고 내가 그것을 받은 건 아니었으나, 너는 나를 사랑하였고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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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와 사랑에 빠질 만큼 어리석은 중학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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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의 첫사랑. 스스로를 모르는, 스스로를 누르는, 그러나 가슴 아프도록 정직한, 비겁한 말. “나는 빵이 싫어. 너도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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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를 처음 사랑해준 사람에게 나 역시 비슷한 말을 하곤 했다. 나에게 왜 이러느냐고.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게 매일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서-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도- 내가 그와 사랑에 빠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기이한 자기 방어를 했다.
?생각해 보면 분명 그가 나를 사랑하는 모습에는 그때의 내가 봐도, 지금의 내가 봐도 서툴고 갑갑한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은 이렇게 됐다. 그만큼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이후로는 없었고, 나는 그에게 착하게 굴지도 않았으면서 이젠 소식도 모르는 그를 자주 떠올린다.
?사랑했구나. 그때 네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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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몇 시간 전부터 그곳에 와서 담 위에 올라가 한 사람이 앉을 자리만큼 유리를 부수어 놓았다. 네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했는지, 왜 그런 일까지 했는지 내가 생각하는 동안 너는 문득 내 발을 받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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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주인에게 허리를 잡혔고, 주인의 의기양양한 욕설을 들어가며 구두를 찾았고, 찾고 나서는 주인을 떠밀어 나동그라지게 했고, 구두를 들고 우리 집 대문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네가 말했다.
“미안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너에게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모두 네 차지였다. 나는 구두 한 짝을 건네받았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단 한 마디 말만 했다.
“너는?”
?너는 말없이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내게 보여주었다. 발목에서 무릎까지 시퍼렇게 멍이 든, 털이 무성한 네 다리를.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 말이 네 입에서 나왔다.
“다음에 더 멋있는 걸 보여 줄게.”
?그 말도 너의 입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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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의 첫머리를 ‘나’와 ‘너’가 자란 지옥에 대한 묘사로 열었다. 나는 한사코 그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그 지옥이 어땠는지, 그 지옥에서 만난 네가 어땠는지, 매일이 똑같았던 지옥 속에서 왜 너만큼은 기억하는지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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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맑은 햇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너를 보았다. 너는 두껍고 커다란 외투를 입고 보기에도 멋진 모자를 쓰고 있어서, 딴 세상에서 온 부자처럼, 기차 기관사처럼, 원양어선 선장처럼, 우주인처럼 보였다.
“어디 가니?”
“너는?”
?우리는 운동장에서 마주섰다. 네가 천천히 다가왔다. 너를 보는 게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든 건 왜였을까. 네 얼굴을 비추는 노란 햇빛은 내가 가게 될 다른 좋은 세상에서 오는 것 같았다. 해를 등지고 있는 내 몸에서 뻗은 그림자는 짧고 짙었다.
“한번 안아보자.”
“그래.”
?나는 처음으로 너의 부탁을 받아주었다. 너는 나를 안았다가, 안았던 팔을 풀고 외투 단추를 급하게 풀면서 말했다.
“너, 다시는 안 오겠구나.”
“그래.”
?너는 외투를 벌렸다. 나는 네 품안에 들어갔다.
“사랑한다.”
?너는 나를 깊이 안았다.
“나도.”
?지나가던 아이들이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옥의 빵 공장에서 빵 트럭이 쏟아져 나오고, 딴 세상 바다에선 고래들이 펄쩍 뛰어오르던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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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쓴 대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았을 때 나는 그에게로 회귀하기를 강렬하게 소망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었던?나는?돌아와 우두커니 섰다. 그리고 너의 기억 속으로 회귀하였다. 네가 아쉬워서, 너를 아직도 사랑해서가 아닌, 나에게 네가 첫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했구나. 헤어진 이후에서야 나도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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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의 첫사랑. 혹은 퀴어적인 첫사랑. 모든 이상한 것과 정직한 것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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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것을 읽었으며, 인용은 팟캐스트 <오디오북 소라소리>의 ‘성석제-첫사랑 (1/2)’,?‘성석제-첫사랑 (2/2)’를 통하여 페이지 표기가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첫사랑> 리뷰를 요청해주신 아타(@an_chui_hatdago)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 리뷰의 제목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는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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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track7of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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