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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의 언어 ? 조해진, 『한없이 멋진 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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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브 댓글 2건 작성일 16-05-0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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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의 언어 ? 조해진, 『한없이 멋진 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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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주의자인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지적한 바 있듯이 구조로서의 언어는 촘촘하지 않다. 언어를 구성하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언제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호로서의 언어는 실존하는 것 위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지며, 어떤 방식으로도 대변되지 않는 부분을 잔여물처럼 남긴다. 언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기억할 때, 이와 같은 불완전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형성과정에서부터 이미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언어구조 속에서,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언제나 충분히 또는 정확히 말해질 수 없다. 그래서일까? 조해진의 작품 속 ‘나’는 계속되는 소통의 부재 속에서 완전히 명징화되지 못한 대상으로 남아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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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야, 난 누구니?”

야옹, 매기는 오랜만에 스스로 고양이임을 인정하는 울음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그러니까 난 누구냐고. 야옹, 녀석도 언어의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화가 났는지 좀더 큰 소리로 야옹,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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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나’와 고양이 매기의 대화는 인상적이다. 이들은 서로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두 언어간의 소통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고양이의 언어는 ‘나’의 모습을 정의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해진은 이것이 비단 인간과 다른 종(種) 사이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같은 문화권 안에 살아가며 같은 언어를 공유한다 하더라도, 남성 중심, 이성애 중심뿐만 아니라 모노-섹슈얼리티 중심, 유성애 중심으로 이루어진 언어 구조는 그로부터 빗겨난 개체의 정체성을 충분히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언어 구조 속에 완전히 포함되지 못하는 존재란 ‘나쁜’ 혹은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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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지 않기 위해 페이스를 조절”하고 “야유를 받지 않기 위해 정상적인 포즈를 취해주”는 ‘나’처럼(207),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성의 범주에 편입되고자 한다. 그것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향해 쏟아지는 사회적 시선과 힐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상성의 범주 안에 꾸역꾸역 맞추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아는 소거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정해진 정형성”을 따라가는 한 “전체 인테리어에 디자이너의 고유한 숨결을 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병원 인테리어(99)나, “옷에 모델을 맞”추기 위해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감행해야 하는 준(76)의 입장과도 비슷하다. 기존의 범주에 맞추려 하다 보면, 고유한 존재는 사라지고 사회로부터 강요 받은 이미지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가 유경(여성)과의 과거와 준(남성)과의 관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이와 같은 강요는 개체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또 다른 이름의 폭력일 수밖에 없다. 조해진은 양성애자인 ‘나’의 정체성을 내세워 이와 같은 명징화의 폭력성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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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하나의 단어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껏 경험해 온 역사의 축적이다.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그 축적된 역사 속에서 고유한 개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패턴화할 수도 없는 것이고 특정한 언어로 단순화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가령, ‘나’는 유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준으로 ‘일탈’한 것이 아니다. 유경과 준을 각각의 방식으로 사랑한 것이다. 그 모든 역사를 껴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불완전한 언어 구조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을 때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선택을 강요하는 언어의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퀴어들의 아침」이라는 조해진의 첫 번째 소제목이 상기시켜주듯이, 퀴어(queer)란 그와 같은 선택을 거부하고 ‘이상하게’ 혹은 ‘모호하게’ 남기로 선택한 집단이 아니었는가? 물론, ‘나’가 결국 “진짜 악몽이 시작되는 곳”인 도심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221), 우리는 언어의 구조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나 불완전한 언어로 인한 소통과 대변의 불가능은 패배나 좌절의 신호가 아니다. 애당초 소통이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던 언어와 구조에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안에서 내부적 변혁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퀴어들이 가진 힘인 것이다. 하여 퀴어는 새로운 언어로 말한다. 기존의 언어로 정의되기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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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해진, 『한없이 멋진 꿈에』, 문학동네, 2009, 53p. 이후는 페이지 수만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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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브 (zcyclamen@hotmail.com)

바이로맨틱 그레이-에이섹슈얼, 문학도, 애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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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나무님의 댓글

나무 작성일

시브님께선 참 깊이 있는 글을 쓰시네요.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시브님의 댓글

시브 작성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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