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횡단하기 ― 버드폴더, 『고양이인 척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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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혜 댓글 0건 작성일 16-09-17 15:59본문
정체성 횡단하기 ― 버드폴더, 『고양이인 척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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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폴더, 『고양이인 척 호랑이』(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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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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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방영을 시작한 한국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을 보시나요? 여자아이가 모종의 이유로 남자로 길러져, 내시로 입궁을 하여 조선의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담은 팩션 사극입니다. 여주인공 홍라온은 스스로를 홍삼놈이라 칭하며 여러 사내들의 연애 고민을 들어주고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는 조선판 시라노 드 벨주락이지만, 타고나기를 여자인지라 고운 선과 아름다운 미모는 가릴 수가 없어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신데렐라에 남장여자 설정을 끼얹은 사극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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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 드라마의 남장여자는 양념처럼 등장할까요? 왜 그녀들의 크로스드레싱은 그녀들의 성 정체성과는 무관한 것이 될까요? 왜 한국 드라마는 퀴어 서사로부터 ‘안전’할까요? 왜 ‘남장여자’ 홍삼놈을 사랑하게 된 세자는 그의 성별을 확인하고 ‘안전’한 이성애 세계로 돌아올까요? 왜 ‘남장여자’ 여주인공들은 항상 이성애자이고,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고, 여장을 한 모습이 잘 어울리게끔 설정되어 있을까요? 저는 주인공의 정체성이 퀴어가 아님을 확인하여 안심하기 위해 창작자가 퀴어코드를 이용하는 모습이 지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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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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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어두운 할머니가 주워온 고양이가 실은 호랑이인데, 할머니가 놀랄까봐 고양이인 척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단지 이 설정을 접한 것만으로 읽고 싶었던 그림책을 얼마 전 우연히 얻었습니다. 할머니가 눈이 어둡기 때문에 시작한 고양이 노릇이라지만, 아주 작은 아기 시절부터 스스로 고양이라고 생각해온 호랑이는 채식을 하고 고양이 요가 수업을 듣는 등 ‘완벽한 고양이가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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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고양이인 척하는 호랑이가 호랑이인 척하는 고양이를 만나면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고양이치고는 무늬가 진하고 덩치도 컸지만 분명 고양이’인 그는 언제나 “어흥! 어흥!”하고 울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고양이를 호랑이가 도와준 것을 계기로, 둘은 할머니네 집에서 술을 마셨지요. 그렇게 어느정도 밤이 무르익었을 즈음, 고양이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나 실은 호랑이가 아닐지도 몰라. 키가 더 안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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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일 적에는 성별을 무시하기가 쉬웠습니다. 초등학생은 성별에 따라서 분반이 이루어지지도 않으니까요. 남자애들은 축구를 하고 여자애들은 피구를 한다고 해도, 학교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친구가 여자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젠더퀴어라는 단어를 얻지 못한 지정성별 여성으로서 그 성별을 가장 여실히 자각한 때는 키가 멈춘 때였죠. 체육시간에 땀에 흠뻑 젖으면 티셔츠에 브래지어 모양대로 땀자국이 묻어납니다. 키가 더 자라지 않고, 이도 작고, 턱도 약해서, ‘내가 조금 큰 고양일까봐 무서워’라며 고양이가 엉엉 우는 장면에서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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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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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 동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둘은 다음날 일어나, 호랑이는 고양이에게 맛있는파이 만드는 법을, 고양이는 호랑이에게 물고기 여러 마리 한 번에 잡는 법을 알려주며 힘든 일도 즐거운 일도 둘이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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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를 납치하려던 서커스단에서 실수로 고양이를 잡아가는 일이 생겼어요. 서커스단에서 고양이에게 호랑이 옷을 입히자 고양이는 순식간에 ‘진짜 호랑이가 된 것 같’다고 기뻐하지요. 그러나 서커스단에 새로 들어와 실수를 연발하는 고양이 ‘호랑이님’을 보는 다른 동물들의 시선은 곱지 않고, 고양이는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빨갛고 작은 콩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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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양이가 보낸 편지를 받고 서커스단을 찾은 호랑이는 ‘호랑이님’으로 오해받습니다. 이전의 ‘호랑이님’과 달리 호랑이는 요가로 단련된 덕분에 묘기를 잘해요. 그렇지만 불쇼를 해야 하는 순간에는 불이 너무 무서운 나머지 실수를 하고, 불이 나자 우리에 갇힌 동물들을 뒤로 한 채 도망가는 사람들 대신 동물들을 구한 건 거대한 콩나무입니다. 동물들은 고향 숲으로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콩나무에게서 내려진 호랑이는 콩에서 고양이 냄새를 맡습니다. 까맣게 탄 콩을 보고 호랑이는 엉엉 울었지만, 놀랍게도 이 황당한 서커스단 이야기는 고양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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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호랑이는 할머니와 행복하게 살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고양이와 호랑이는 함께 잘 살았더래요. 특히 할머니를 잃은 슬픔에 빠진 호랑이를 돌보던 고양이는 아주 늠름해져서 이제는 누가 커다란 고양이인지 누가 조그만 호랑이인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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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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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다 읽고 나서 보게 되는 책의 뒷날개에서 작가 버드폴더는 이 이야기를 ‘2차 성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고양이와 호랑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성장 이야기’라고 썼습니다. 저는 호랑이가 호랑이로 오해받는 이야기도 흥미로웠고, 호랑이가 되고 싶었던 고양이를 호랑이 가죽 안에 가둬서 호랑이 서커스를 시키는 폭력을 묘사하는 방식도 재미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양이가 완벽한 호랑이가 되었다든지, 호랑이가 완전한 고양이가 되었다는 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분열적이기에, 그들은 서로 ‘-인 척’을 하여 둔갑했다가, 정체성의 경계를 횡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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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TV드라마를 정말 좋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TV드라마에서 지정성별과 무관하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지하고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등장인물들을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남장을 했지만 성별을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인 네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사실 여자야’라고 안심시키기 위한 소재로 쓰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성애자 남성임을 강조하기 위해 폭력성을 남성성으로 포장하는 일도 그만하기를. 젠더퀴어의 분열적인 정체성을 미디어가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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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fkvl03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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