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는 삶 ― 지넷 윈터슨, 『시간의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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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혜 댓글 0건 작성일 17-04-20 00:59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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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는 삶 ― 지넷 윈터슨, 『시간의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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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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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1초에 지구를 세 바퀴 돌아. 나도 그렇게 할 수 없을까?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때로 우리를 데려가 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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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은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현대 소설로 각색한 것이다. 원작의 줄거리가 프롤로그처럼 삽입되어 있지만, 이 리뷰에서는 『시간의 틈』에 등장하는 리오와 지노, 미미의 삶을 중심으로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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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난주에 같은 게시판에 리뷰가 업로드된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무츠키와 곤, 쇼코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고 설명하면 얼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중학교 도서실에서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따뜻한, 불가능한 동화 같은 이야기라면, 리오와 지노, 미미의 이야기는 그보다 신랄하다. 또는 모질다. 아주 끝에 가서는 그래도 용서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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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렇게 어긋나 버린 걸까. 인생에서 단서 또는 계기가 되는 순간들은 영화에서처럼 클로즈업되어서 눈에 잘 띄는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단순히 싫다, 좋다, 끔찍하다, 같이 분명한 방향성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폭탄처럼 터진 후에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우리는 슈퍼맨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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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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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틈』에서 그렇듯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리오이다. 그 잘못을 저지른 시점을 현재라 한다면 과거1, 과거2, 현재, 미래로 작품의 시간은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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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1) 리오와 지노는 열세 살에 기숙학교에서 만났다. 둘은 한때 섹스하는 친구 사이였다. 지노가 ‘너, 나랑 할 때 여자 생각해?’라고 물었을 때, 리오가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더라도, 지노는 자기가 게이일까 봐 걱정을 했더라도, 둘은 친구 사이였다. 어느 날 둘은 자전거를 타고 누가 절벽 가장자리 제일 가까이로 제일 빨리 갈 수 있는지 내기했다. 지노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리오는 꼬드겼기에 경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노가 떨어졌다. 지노는 절벽을 구르고 또 굴렀다. 지노는 남은 학기 내내 병원에서 지냈고, 리오는 제일 친한 친구를 죽일 뻔했다는 사실에 비현실적으로 울었다. 마치 영화에서 그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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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2) 그 후로도 둘은 계속해서 친구였다. 스물다섯의 리오는 사업차 파리에 갔다가 미미라는 매혹적인 여자의 노래를 듣게 된다.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리오는 지노를 떠올린다. 그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떠올린다. 죽더라도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리오는 지노와 자신 사이에 15미터 정도의 거리가 있음을 느낀다. 지노는 결코 리오를 탓하지 않았지만, 리오가 먼저 거리를 두었다. 아니, 리오는 거리가 거기에 있었고, 틈을 좁히는 방법을 몰라서 더 넓혔다고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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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떨어지고 있나요? 아니면 사랑에 빠지고 있나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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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는 미미에게 청혼한다. 리오의 신랑 들러리는 지노이다. 리오는 지노가 ‘자신을 미미에게 넘겨주는 사람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혼식 전날 밤, 지노가 리오에게 한 키스는 너무 재빨랐기 때문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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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미는 리오의 청혼을 한 번 거절했다. 그래서 리오는 떠났고, 둘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 즈음, 리오는 친구인 지노에게 미미를 찾아보라고, 자신이 쓴 쪽지를 들려 보낸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노는 미미와 자신이 그 주말에 사랑에 빠졌었다고, 잃어버렸던 아이들에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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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리오와 미미에게는 아들 마일로가 있고, 미미는 둘째 딸 퍼디타를 임신한 때다. 이때, 리오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는 미미와 자신의 친구 지노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한다. 미미가 임신한 아이는 지노의 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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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는 그래서 자신의 집에 웹캠을 설치하고,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지노와 리오의 모습을 찍은 영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러 번 반문하면서, 둘의 불륜을 확신한다. 그래서 지노의 차를 부수고, 미미를 폭행하고, 아이를 납치해 어떻게든 지노에게로 떠나 보낼 계획을 세운다. 리오의 동업자인 폴린은 묻는다. “지노한테 질투하는 거야, 미미한테 질투하는 거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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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미미와 리오의 아들 마일로는 죽고, 아이를 맡아 지노가 있는 뉴보헤미아로 데려온 리오의 정원사 토니는 부재중인 지노를 만나지 못하고 불량배들에게 살해당한다. 토니가 베이비박스에 미리 놓아둔 아이, 리오와 지노와 미미의 잃어버린 아이 퍼디타는 토니의 죽음을 목격한 솁과 그 아들 클로에게 발견된다. 병상에 누워 있던 자신의 아내를 제 손으로 죽이고 우울에 시달리던 솁은 자신이 빼앗은 아내의 생명 대신 새 생명이 온 것 같다고 느낀다. 이것이 그에게는 용서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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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어여쁜 소녀?퍼디타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는 남자 젤과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런데 솁의 생일 파티에 젤이 초대된 날, 젤의 아버지가 나타나 솁의 비밀을 밝힌다. 젤은 지노의 아들이다. 미래 시점에 지노는, 리오는, 미미는, 그들이 아이를 잃어버린 시점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져 만나지 않고, 다만 지노가 만든 게임 <시간의 틈>을 지노와 리오는 계속해서 플레이하고 있다. 지노는 토니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날 사실 집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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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시간의 틈>은 미미의 노래 Dark Angel의 영감이 되기도 한 프랑스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이 꾸었다는, 하늘에서 천사가 추락하여 좁은 뜰에 갇히는 꿈을 모티프로 한다. 이 천사는 어둠의 천사이고, 가장 중요한 게 없어진 세상에서 저항군인 인간들은 가장 중요한 것,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야만 한다. 공교롭게도 리오는 이 게임에서 어둠의 대천사를 플레이한다. 이 게임을 개발 중이던 현재에 지노는 천사가 뱀파이어처럼,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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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와 지노는 각자 두문불출하고, 리오는 회사 경영에만 정신을 쏟는 나날이 계속되지만, 마침내 지노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리오의 딸 퍼디타가 지노의 아들 젤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리오가 운영하는 회사 <시칠리아>를 방문하고, 솁과 클로는 여전히 실의에 빠져 집 안에 갇힌 지노를 데리고 또 같은 곳을 향한다. 퍼디타와 젤, 두 아이를 중심으로 미래의 시간은 돌아가고, 지노와 리오, 미미 세 사람도 드디어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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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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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모든 것은 되찾을 수 있어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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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처럼, 퍼디타를 잃어버리기 전 갓 태어난 퍼디타와 함께 입원중인 미미는 병원 간호사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지넷 윈터슨은 소설 말미에서 ‘하나의 이야기에 가능한 결말은 세 가지밖에 없다.’고 썼다. 복수. 비극. 용서. 리오가 용서받는 까닭은 그가 16년간 자신을 미워하며 진정하게 회개했기 때문이다. 즉, 시간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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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렇게 인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잘못을 곱씹으며 이미 지나간 현재, 과거가 되었어야 하는 현재에 붙들려 있던 세 사람은 잃어버린 아이를 찾음으로써 지금 있어야 하는 시간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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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모든 잘못이, 용서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리오에게는 운이 좋게도, 퍼디타가 돌아온다. 리오는 용서받는다. 애초에 잘못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러지 않아도 리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잘못을 곱씹으며 살고 있는 지노가 꼭 같은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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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일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러고 보면 내가 한 선택들은, 다른 선택을 할 내가 없었기 때문에 했던 선택이었다는 기억이 나. 우리를 가두는 순간의 힘보다 우리가 더 강해져야만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 거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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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가 용서받는 까닭은 정말은 시간의 힘보다 더 강한 퍼디타와 젤, 미미가 용서를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리오가 원하는 용서를 내릴 이들이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질 단 한 번의 기회를 붙잡은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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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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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리오와 지노, 미미의 이야기와 무츠키와 곤, 쇼코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했던 것은 아주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리오는 무츠키가 아니고, 지노에게도 미미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겁쟁이다. 어쩌면 아름다운 삼각형을 그릴 수 있었던 시점에서, 리오는 겁에 질려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다. 상실이 두려운 사람의 선택 아닌 선택이다. 그 후에 그의 삶은 무기징역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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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된 이야기는 모두 그렇지만, 이것은 꼭 리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자유의지로 선택다운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때는 단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용서할 수도 용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라고 쓰면서 기한을 영영 유예하는 것은 여전히 너무 겁이 나기 때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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