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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리뷰 : 사랑이라는 사인(死因)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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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배 댓글 0건 작성일 17-08-0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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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민음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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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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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로맨스를 싫어한다. 사랑 이야기는 진부하다. 추측컨대 남성 중심적인 시스-이성애 연애서사에 질린 모양이다. 사랑이란 단어만 들어도 약간 이골이 난다. 사랑은 타인에 대한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응시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손쉽게 선택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어딘지 매끈한 표백제 냄새를 풍긴다. 나는 사랑을 도무지 모르겠고, 사랑을 좀처럼 사랑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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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영의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사랑해.” 라는 세 음절의 단어로 끝난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죽어가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렇게 마지막을 그리는 소설의 마지막이 사랑이다. 그렇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이라기보다 사랑 소설이다. 그래서 포스트-아포칼립스라는 설정만을 보고 최진영 소설을 선택한다면 SF 장르로서는 아쉬울 수 있다는 평가[1]는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반면 “사랑은 남는다.”라는 작가의 말에 감동할 독자라면 이 끈질긴 사랑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무너질 것이다. 무너지며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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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사랑하기는 쉽다. 영국의 소설가 G. K. 체스터튼의 말이다. 세계 전체가 죽음으로 허물어지는 곳에서 주인공들은 삶을 다시 응시한다. 삶의 의미, 그 깊숙한 곳에서 그들은 사랑을 채굴한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 ‘류’는 남편과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힘들어 죽겠다는 말로 죽음을 밀어”(99쪽)내는 한국의 도돌이표 같은 삶과 달리, 종말 직전에야 류는 ‘소중한 사람을 미루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한편 소년 ‘건지’는 한국에서 언제나 폭력의 피해자였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맞았다. 바이러스가 퍼진 후 유일한 친구이자 구원자인 ‘도리’를 따라 러시아로 왔다. 건지는 도리를 사랑한다. 도리와 헤어진 후, 건지는 도리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생존해간다. 한국에서 건지는 늘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제 건지에게 삶은 ‘좋은 것을, 소중한 것을, 내 중심에 있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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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죽음이 드리워진 곳에서 삶을 구원한다. 사랑을 이야기한다. 상투적이다. 그러나 사랑이 진부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사랑을 이미 너무 많이 접했다는 뜻이다. 나의 인생이 죽음보다 삶에, 증오보다 사랑에 가깝다는 뜻이다. 상투적이라는 평가는 권력이다. 그래서 두려워진다. 사랑이 진부하다는 태도를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사랑을 입에 담지 못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바이러스 없는 여기, 한국. 사랑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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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사인(死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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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뿔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있다. (시를 모르기에 시를 쓸 수 있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무릎에 뿔이 달린 사람의 이야기다. 걷기만 해도 사람이 다친다.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빌 줄도 모른다. 이 자화상은 오만하고 정확하다. 상대가 누구든 그와 나 사이에는 뿔만큼의 영원한 거리감이 있었다. 스스로의 퀴어 정체성에 자부심보다 두려움이 컸을 때고, 그에 대한 반동처럼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꿈이 지금보다도 강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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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때 <해가 지는 곳으로>의 도리와 지나를 만났다면 나는 조금 변할 수 있었을까? 도리는 지나의 빨간색 머리를 보자마자 한눈에 사로잡힌다. 둘은 사랑한다. 처음 키스를 한 순간, “추위도 허기도 불행도 재앙도 모두 우리의 키스에 놀라 자취를 감춰 버렸다.”(58쪽) 둘은, 이 엄청난 풍경 속에서, 사랑을 한다. 지금 나는 시금치를 처음 입에 넣어보는 아이처럼 일부러 사랑, 사랑, 사랑을 곱씹고 있다. 다행히 최진영은 체하지 않도록 등을 도닥일 줄 아는 작가다. 잔혹한 풍경과 아득한 사랑도 그의 글에서는 부드러운 미음으로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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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 인물을 그려낼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랑은 특별하면서도 평범”하기에 도리와 지나의 사랑 역시 “모두의 사랑 중에 하나”로 그려냈다는 작가의 말[2]에서처럼, 도리와 지나의 사랑은 도리와 지나의 사랑일 뿐이다. 다분히 특수하면서도 어딘지 무성적인 둘의 사랑에 강하게 매혹될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것이 (우연히) 두 소녀라는 표면적인 사실을 제외하면 이 소설은 퀴어 소설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나는 퀴어의 사랑이 ‘다를 게 하나 없다’는 태도가 위험하고 시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사랑은 다르다. 하지만 ‘퀴어이기에 다른’ 지점을 다양하게 이야기하는 소설이 지금 우리에게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해가 지는 곳으로>는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대신, 그저 사랑일 뿐인 도리와 지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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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장면을 보자. 혼란 통에 헤어졌던 도리와 지나가 다시 만나 키스를 한다. 강제 수용된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상태다. 누군가 둘에게 욕을 하며 침을 뱉는다. 그러나 침을 뱉는 자들은 퀴어-포비아라기보다 사랑-포비아 같다. 소설 속 세상은 이미 아비규환이다. 생존에 집중하면서 삶은 오히려 죽음보다 추해진다. 약한 자에 대한 폭력이 난무한다.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러시아. 멀고 먼 배경임에도, 사랑이 사어(死語)가 되는 이 풍경은 낯설지만은 않다. 도리와 지나는 사랑이 소거된 곳에서 사랑을 하는, (성적 지향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아주 이질적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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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 시작할 무렵에 인물들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때 죽음은 사랑의 대척점이다.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갈 것(건지). 살아서 사랑할 것(도리와 지나). 더 많이 사랑한다고 얘기할 것(류). 하지만 점차 죽음이 아닌 삶이 사랑을 방해하는 상황으로 변해간다. 삶은 억압적인 것, 인정사정 보지 않는 것, 결국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아도르노). 삶에 대한 숭배는 사랑을 죽인다. 그래서 일련의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과 달리 이 소설의 핵심은 주인공들의 생존 여부가 아니다. 삶보다 사랑이 중요하다. 남겨지는 삶보다 함께하는 죽음이 나을지 모른다. 소설의 결말에서 도리와 건지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채, 삶과 죽음이 모호한 채로 “사랑해.” 라는 세 음절만을 남기고 함께 출발한다. 둘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든 상관없다. 둘은 함께이고, 둘은 사랑을 한다.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박준)고 말한 시인이 있었다. 이들의 사인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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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듀나, 「그들은 어떻게 러시아로 갔을까… ’한국 SF의 핸디캡’」

http://news.bookdb.co.kr/bdb/Column.do?_method=ColumnDetail&sc.webzNo=30070#

[2] 반디앤루니스 작가인터뷰: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소설가 “무너지는 세계,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document/45959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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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알러지, 퀴어문학 마니아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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