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집이 세다 ? 천희란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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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난 댓글 0건 작성일 18-09-30 23:04본문
천희란,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현대문학> 2016년 11월호 수록 / <제 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
비극적인 연인이 등장하는 퀴어문학을 읽으면서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등장인물과 나의 동일시를 기피하는 일도 아니고, 문단과 문단을 살피며 의미를 파악하는 일도 아니고, 두 사람의 사랑을 인류 보편적인 사랑으로 읽으면서 퀴어를 소재로 밀려나게 하는 일도 아니다. 나는 아주 성실한 태도로, 주어와 서술어와 목적어를 못 읽은 체 하고, 쓰이지 않은 이야기 쪽으로 생각하고, 오독한다. (오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러니까 적어도 안 헤어지는 이야기, 적어도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각자 가지게 되는 이야기, 아니면 상대방이 없어도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또는 아무도 죽지 않는 이야기였다고 읽는다. 왜냐하면 나는 퀴어이기 때문에, 나는 사랑해도 살아있을 수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나는 간절하게 읽는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는 ‘효주’와 ‘선생님’이 서로를 향해 쓴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효주는 선생님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묻는다. 효주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던 사람이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효주를 거둔 사람인 선생님은 효주의 어머니의 자살에 대해 ‘아름다웠다’고 써서 보낸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받게 된 뒤에도 효주는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낸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임신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효주는 선생님이 죽은 뒤에도 편지를 쓴다. 그리움을 전하기 위해서. 선생님 또한 효주에게 지속해서 편지를 보낸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를 읽지 않고 이 글의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독자 분들은 아마도 이 소설이 효주와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일 것이라고, 또는 선생님이 효주 어머니를 사랑해서 효주를 주워다 기른 애틋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실지도. 나도 그랬으니까.
선생님의 답장에는 효주의 편지와는 달리 아래의 인용된 부분과 같은 서늘한 기운이 곳곳에 박혀 있다.
‘나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너에게 들여야 하는 비용과 관심을 추후에라도 다른 곳에 돌릴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 눈에 비친 너라는 아이는 약간의 도움만 있다면 충분히 자신의 삶을 홀로 꾸려나갈 수 있을 만한 인간이었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건 내가 너에게 보인 작은 호의를 과장되게 평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천희란,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7, 293쪽. 이하 본 작품을 인용할 때는 쪽수만 표기한다. 예: 312쪽)
이러한 서늘한 기운의 원인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선생님의 부치지 않은-효주에게 바로 닿지 않도록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맡긴-편지에 드러난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자신과 효주어머니는 연인 사이였으나, 효주 어머니가 효주 외할아버지를 두려워해 선생님과 헤어졌고, 또한 효주 외할아버지의 바람대로 남자와 결혼하여 효주를 낳았다는 사실, 효주 어머니가 효주 아버지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이혼한 사실, 효주 어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분노한 선생님이 효주 어머니에게 찾아갔던 날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또한 효주에 대한 적대감이 직설적으로 드러난 문장들로 소설의 분위기는 긴장된다.
너는 한때 나를 원망했던 순간이 있다고 고백했지. 나는 그렇지 않았다. 너를 평생 원망했어. 네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한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312쪽)
나는 한때 네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너를 사랑했던 적은 결코 없다.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주리라 마음먹었지만, 그것은 네 엄마에 대한 속죄였을 뿐 너를 애틋하게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어. (312쪽)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끝난다.
내가 네게 용서받지 않기 위해 부러 내 마음을 가혹하게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게 진심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네가 많은 걸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 놀랍지 않니. 이런 두 개의 마음이 한 사람의 가슴속에 양립해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 말이야. 건강하렴. 이제 나를 미워해도 좋다.
바젤에서.
(314쪽)
이 소설을 처음으로 다 읽었을 때, 나는 절망하고 밤에 자다가 울었다. 선생님의 단호한 원망이 효주의 마음을 산산이 무너지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효주는 엄마를 죽게 만든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서였고, 효주의 엄마와 선생님은 서로 다시는 사랑할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서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읽었다. 서둘러 고집스럽게 잘못 읽을 용기가 나서였다. 그리고 소설 안에서, 작가노트에서 다르게 읽기 위한 실마리들을 긁어모았다.
“절대로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가진 것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한 작가에게 쓰고 싶지 않은 것은 곧 쓸 수 없는 것일 테다. 비열한 글쓰기란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팔아 연명하는 것도, 핍진한 허구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 지금까지의 절망이 모두 허위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304쪽)
기억을 선별하고 축조하여, 그로부터 인생을 건져올리는 행위는 얼마만큼은 기만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현실의 경험으로부터 연원하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나의 기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기억이지만 기억에 균열을 내는 기억이며, 벌어진 틈 그 자체이기도 하다. 내가 기억을 더듬어 나를 비추려고 할 때, 그 틈으로 내가 결코 의미화할 수 없는 이미지가 소실되거나 틈입하고 있을 것이다. (천희란, 작가노트 「기억이 나를 본다」, 위의 책, 317쪽)
이 문장들은 내가 편지 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중요한 것은 편지가 아니라 편지 밖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소설은 그들에 대해서는 서술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음 질문들을 불러 왔다.
선생님이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선생님이 ‘기억을 선별하고 축조하여, 그로부터 인생을 건져올리는’ 기만적인 행위를 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기억과 같은 허구의 등장인물이 쓴 편지들 사이 ‘벌어진 틈’에서 서성이는 이미지들은 무엇인가?
그 질문들의 답은 살아 있는 효주였다. 주어진 편지들 안에서 우리는 효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효주도 죽었을지도. 효주만은 살았을 수도. 살아 있다면 어떻게 살아있을지도. 그래서 다음엔 어떤 프렐류드를 연주하게 될지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만났을 때 마음껏 다른 것을 상상하자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선인장의 꽃을 피워내고 무사히 낙화시켰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또한 효주에 대한 나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랑의 당사자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신난
그리고 아직도 졸업 작품을 쓰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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