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 퀴어한 소설로 비누 목욕을 ? 가쇼이 〈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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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배 댓글 0건 작성일 17-11-03 12:35본문
가쇼이, 『가발』
어패류, 2017 (독립출판물)
리뷰어의 기쁨: 좋은 책을 소개할 수 있다.
리뷰어의 슬픔: 좋은 책을 제대로 소개할 능력이 부족하다.
처음 20페이지로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확신하기까지 말이다. 책은 총 160페이지다. 나머지 7/8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내내 웃다가 찡하다가 무릎을 탁탁 쳤다. 그래서 쓴다. 능력 부족의 슬픔을 안고, 하지만 리뷰어만 품을 수 있는 기쁨을 악용하여, 가쇼이 <가발>을 소개한다. 이 리뷰는 여섯 글자로 요약된다. <가발> 읽으세요.
퀴어 소설은 뭘까? 나도 모르겠다. 영원한 미스터리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퀴어 정체성(처럼 보이는 것)이나 퀴어 인물(처럼 보이는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를 퀴어 소설이라 칭한다. 하지만 영 썽에 차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모든 퀴어 소설이 퀴어한 것은 아니다. 퀴어 소설과 퀴어한 소설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겐 퀴어 소설만 너무 많아서,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퀴어한 소설이란 뭘까?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소설을 읽으면, 몇 만 개의 비누 사이에 파묻힌 기분이 된다. 인간은 규범 덩어리다. 규범은 신체를 구획삼아 빈틈없는 행정을 선보인다. 비누에 발을 담그기 전까지 내 몸 안에는 규범들이 꽉꽉 들어차있다. 그러다 비누 속에 빠진다. 나는 자꾸만 미끄러진다. 미끌미끌, 이러다 내 몸까지 다 허물어질 것처럼, 규범의 행정이 거품으로 사라질 것처럼 미끄러진다. 규범적인 인간으로서 제대로 땅 딛고 서지 못하게 하는 비누 같은 소설이, 나는 반갑고 좋다.
<가발>은 아주 미끄럽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무무를 주인공으로, 이 소설에는 많은 살인과 섹스가 나온다. SF 판타지 스릴러라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이 아주 귀엽다. 인간을 집어삼키는 무무조차 귀엽다. 무무가 인간 행세를 하려고 뿔 같은 머리 방패와 커다란 다리들을 몸 안에 꾸역꾸역 넣는 것도 귀엽고, 여자는 이렇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는 인간들의 성별 규범을 비웃는 것도 귀엽고, 섹스와 식인을 번갈아 즐기는 모습도 귀엽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나는 무무가 만들어내는 비누 같은 세계에 가만히 몸을 맡긴다.
내가 숲을 지나서 도시에 오고 이렇게 지하철을 탈 수 있으려면 단단하게 잘 구워진 쿠키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성별과 나이가 기입된) 날카로운 쿠키 틀로 나를 푹푹 찍어버려야 합니다. 여자 쿠키 또는 남자 쿠키가 되어야만 합니다. 여기는 바삭바삭한 쿠키를 위한 곳입니다. (80쪽)
그들과 나의 차이점만을 부각해서 생각했을 때 이 과정은 훨씬 더 빠르고 쉬워집니다. 그들이 나와 같다면 나는 그들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나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면에서 다르다고 믿어버린다면 나는 그들을 먹을 수 있습니다. (98쪽)
몇 부분만 인용해도 분명해진다. <가발>의 미끄러움은 영리함에서 나온다. 어디를 어떻게 문질러야 거품이 나오는지 작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이쯤 되면 프로 세신사다. 웃기고 귀엽고 영리한, 하지만 생각도 연민도 많은 외계인 무무는 말한다. 아주 정확하게 말한다. “규범은 거짓입니다.”(107쪽) 자, 그래서 다시 말합니다. <가발> 읽으세요. 같이 비누 속에서 헤엄칩시다.
보배
간만에 미끌거리는, 퀴어문학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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