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이에 대한 순하고 맑은 기록―최은영의 「먼 곳에서 온 노래」 > 전지적 퀴어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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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이에 대한 순하고 맑은 기록―최은영의 「먼 곳에서 온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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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복숭아 댓글 0건 작성일 17-02-0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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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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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문학평론가는 「먼 곳에서 온 노래」가 포함되어 있는 단편집 『쇼코의 미소』 을 두고 '순하고 맑은 힘(p.277)'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 표현에 걸맞게, 「먼 곳에서 온 노래」 역시 '미진'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화자 '소은'의 순하고 맑은 기록이다. '소은'과 '미진'은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마다 마로니에 광장에서 공연을 하는 대학의 노래패에서 선후배 관계로 처음 만났다. 그때 '소은'은 노래하는 '미진'의 모습을 보고 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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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야외 공연을 했던 4월의 저녁을 잊을 수 없다. 준비한 레퍼토리가 다 끝났을 때, 미진 선배가 계획에 없던 독창을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췄고, 나도, 다른 동기들도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맑고 여린 목소리에 강단이 있었고, 멜로디나 가사를 떠나서 목소리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선배의 노래가 날카롭고도 부드럽게 내 속으로 들어오자 내가 겨우 감추고 숨겨온, 모른 척하고 싶었던 내 속의 한 조각이 속수무책으로 떠올랐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선배의 노래는 나를 부끄럽게도, 슬프게도 했다. 선배의 가느다란 어깨를 두 손으로 누르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얹고 싶었다. 그 자그마한 입속으로, 어둠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선배의 세계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었다. 선배와 가까워지기 전의 일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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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의 눈에 비추어진 '미진'은 순수하고도 맑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곳은 '소은'이 소위 '콩깍지'를 쓴 채 사랑하는 사람으로 '미진'을 대했기 때문은 아니다. '미진'이라는 인물 자체가 순하고 맑기 때문에 그렇게 비추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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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진심을 말할 때, 선배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금씩 떨렸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백 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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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소은'이 '미진'을 그렇게 바라보았기 때문에 '미진'이 한없이 순하고 맑은 사람으로 남았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등장한다. 5월 축제 기간, 노래패에서는 홈커밍데이 후에 뒤풀이 자리를 가진다. 그곳에서 '소은'은 자신을 감싸며 80~90년대 학번 선배들과 부딪치는 '미진'의 모습을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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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놓으세요." 미진 선배가 기자 선배의 손을 뿌리쳤다. "학번이 벼슬입니까? 해마다 나타나서 제일 어리고 만만한 여자애 붙잡고서 주정하는 인간도 제 선배입니까? 신경석씨, 민주주의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이 작은 집단에서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 위에 서야 후련한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 운운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은 차라리 독재가 편할 거야. 인간이 평등하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솔직히. 씨발, 이 더러운 꼴을 꼭 쟤한테까지 보여야 합니까? 전 이제 그러기 싫어요, 싫습니다."

?"넌 항상 이렇게 감정적이었어. 그게 네 약점이고, 그거 극복 못하면 너 사회생활 못해." 기자 선배가 말했다.

?"김연숙씨나 잘하세요. 여자인 게 그렇게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었어요? 여자들은 감정적이고, 분란 일으키고, 이기적이어서 조직 배반하기 쉽고, 여자의 적은 여자고, 그런 자기부정이 김연숙씨가 말하는 건강함이었습니까? 여자 후배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배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들고 나갔다. 나도 부랴부랴 책가방을 메고 선배를 따랐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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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진'이 분연히 일어서기 전까지 선배들의 모든 화살은 '소은'에게 향하고 있었다. '소은'은 그 당시를 두고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 가는 목소리, 낯가리고 내성적인 성격, 여자라는 성별까지…… 그 자리에 앉아 나는 나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p.197)'고 표현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미진'에게서 '소은'은 '차가운 분노(p.198)'를 읽었다. '미진'이 순하고 맑다는 것은, 그녀가 그저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미네랄 성분 등 불순물이나 이온 물질이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물분자를 냉각시키면, 일반적인 얼음보다 훨씬 단단하고 잘 녹지 않은 얼음이 탄생한다. '미진'은 순수하고 맑기 때문에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 더 단단하고 잘 녹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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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맑은 '미진'은 2009년,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객사로 생을 마감한다. 순간적인 심장마비였다. 세상은 순하고 맑은 사람이 살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미진'과 '소은'이 만났던 곳, 노래패만 해도 그랬다. '엄격한 선후배 문화, 남학생 중심으로 운영되는 집행부, 상명하복식 문화에 선배는 하나하나 문제제기를 했(p.200)'던 사람이었고 '개인의 자율적 선택과 평등한 관계맺음, 여성주의 교육을 주장하(p.200)'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미진'은 노래패에 꿋꿋하게 남아 있었고 노래패는 그녀가 떠난 뒤에야 문을 닫는다. 노래패에 대해서 '미진'은 '소은'에게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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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대학에 와서야 토론할 수 있게 된 스물, 스물하나의 아이들이 그게 너무 아프고 괴로워 노래를 불렀어. 어떤 선배들은 노래가 교육의 도구이자 의식화의 수단이라고 했지만, 나는 우리 노래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고 생각해. 나만은 어둠을 따라 살지 말자는 다짐.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는 행복. 그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해. 나는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조회시간에 태극기 앞에서 부르는 애국가 같은 게 아니길 바랐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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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진'은 결국 그 다짐에 따른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고,?'미진'의 많은 적들은 그녀의 죽음 앞에서 하나둘씩 모여 장례식장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미진'은 떠났어도 그녀의 사랑은 '소은'에게, 또 러시아에 있을 때의 플랫메이트이자 같은 레즈비언인 '율랴'에게 오롯이 남아 있다.?제목처럼 먼 곳에서 왔던 '미진'의 노래는 이제 '소은'과 '율랴'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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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다시는 그렇게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배가 말했다. "네가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네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소은아." 선배는 선배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를 슬프게도, 부끄럽게도 했던 목소리로. 나를 보며 노래를 부르는 선배의 얼굴이 예전처럼 환하게 빛났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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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진, 네가 보고 싶어." 율랴는 선배 사진을 가슴에 품고 조용히 말했다. "너를 자꾸만 잊어가. 이제 네 모습, 잘 기억나지 않아, 미진." 나는 선배의 이름을 부르는 율랴를 안았다. 율랴의 몸은 크고 따뜻했다. 그 품에서 나는 율랴를 안아주는 선배를 느꼈다. 율랴, 율랴, 그렇게 가버려서 미안해, 라고 내 몸속에서 율랴를 위로하는 선배의 목소리를 들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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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랴와 내가 마주앉은 거실 바닥으로 부드러운 맞바람이 불었다. 율랴처럼 나도 선배를 잊어가고 있다. (……) 노래가 끝나고 테이프가 회전하는 소리를 잠시 듣다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율랴가 나를 보며 애써 웃고 있었다. 노래는 끝났고, 우리에게는 선배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유람선 난간에 기대서 다리와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주기로 했다. 그건 율랴와 나의 첫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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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순하고 맑았던 이에 대한 기록,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려오는 「먼 곳에서 온 노래」. 이 단편소설은 레즈비언들의 서사를 담담한 문체로 자연스럽게 써내려간 값진 작품이다.?2017년에는 「먼 곳에서 온 노래」과 같이?평범한 서사의 퀴어 문학을 좀더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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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은영, 「먼 곳에서 온 노래」,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p.189.

2) 위의 책, p.201.

3) 위의 책, p.198~199.

4) 위의 책, p.201.

5) 위의 책, p.205.

6) 위의 책, p.208.

7) 위의 책, p.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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