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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는 순간에도 ― 앤 카슨, 『빨강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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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혜 댓글 0건 작성일 17-01-1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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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는 순간에도 ― 앤 카슨, 『빨강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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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온은 어렸을 때 잠자는 걸 좋아했는데 잠에서 깨는 건 더 좋아했다.[1]

 

 게리온은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을 위해 신화 속에 등장한다. 붉은 소들과 붉은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던 그의 생에서 헤라클레스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비중이었을지 굳이 상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살해당하기 위해서 헤라클레스와 조우한 것이다.

 

 그러므로 빨강의 자서전은 게리온이 어린 시절 형과 함께 등교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 날은 평범한 날이었지만 오래 기억에 남았다. 시간순으로 배치한다면, 우리 각각each의 자서전도 가장 오래되고 인상적인 기억은 아마 형제와 또는 친구와 학교에 등교하던 때부터 시작할 것이다.

 

 게리온의 어린 시절을 구성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일상적인 형의 멸시, 식탁 위에 언제나 비어 있는 과일 그릇, 그의 빨강 날개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문 밖으로 등을 떠미는 어머니. 부모가 없는 시간을 지키는 베이비 시터. 그리고 글을 떼기도 전에 시작한 그의 자서전.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소떼를 차지하기 위해 괴물 게리온에게 화살을 쏘아 죽였고, 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이 지속되기는 버거울 것임을 독자는 처음부터 예감하거나, 혹은 이야기를 읽어 가면서 알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빨강이 아니라 노랑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우리가 운 좋게도 게리온의 자서전을 읽게 되었고, 그가 그 자서전의 제목을 빨강의 자서전이라고 지은 덕택에 그가 노랑이 아니라 빨강임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 자서전에서 그는: 돌 하나하나의 삶을 상상하고, 조롱당하고, 만들고, 사랑하고, 쓰고, 사랑받고, 읽고, 고집을 피우고, 허기지고, 먹고, 마시고, 집을 떠나고, 나이 들고, 아카시아 나무를 내다보고, 노랑수염 남자의 강연을 들으러 가고, 회의주의자와 대화하고, 샌드위치의 철학자가 되었다가, 사랑한 사람과 재회하고, 질투하고, 질투하지 않고,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서 그는 살해당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미움 받는 애처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몇 개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루어진 사랑, 그 전, 그 후, 그 사이.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보통 날들. 사랑이 없는 순간에도 문장은 계속되며, 그 문장이 사랑하는 순간의 문장보다 덜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결말.

온 세상에 아름다운 빨강 바람들이 계속해서

불었다 손에 손잡고.[2]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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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눈썹이 예쁜 사람과 시를 좋아합니다

가스비가 무서워서 방이 추워요


[1] 앤 카슨 저, 민승남 역, 『빨강의 자서전』(한겨레출판, 2016), 35쪽.

[2] 앞의 책,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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