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 거짓"과 함께 살기: 한계, 『고고보이』 > 전지적 퀴어시점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지적 퀴어시점

"허접 거짓"과 함께 살기: 한계, 『고고보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백종륜 댓글 0건 작성일 20-06-24 23:04

본문

9c1df3be27d0ae49444fdb9ac9de4215_1593007174_0732.png

?한계, 『고고보이』, 어패류, 2019


사랑에 대한 경구(警句, aphorism)는 좀처럼 낡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문장(자주, 75) 따위.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다. 한계의 두 번째 시집 고고보이(어패류, 2019)는 예의 경구를 당연한 상식(사업 아이템)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감정의 길잡이, 특정한 감수성()을 자연스러운 것(the natural) 것으로 승인하고 유포하는 시()라는 제도를 의심의 눈길로 쏘아본다. 그러나 서둘러 덧붙이건대 고고보이속 화자들이 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양가적이다. 자주의 화자는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문장 / 하나에 평생 위로를 받으며사는 삶이란 저 멍청한 / 멀쩡한 남자 여자들의 것일 뿐, 자신은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오래된 문장 하나만으로 평생을 견뎌 낼 수 있는 멀쩡한[straight]자들의 삶,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 삶을 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저주(자주, 75). 


시에 대한 마음은 왜 자주 저주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몸 붙이고 살아가는 이 세계가 정말이지 망해도 좋을 것 같은 허술한 세계인 까닭이고(사랑은 남풍을 타고, 66), “쓸모없는 문장으로 가득한 세계, “문장으로 정리할 필요가 없는 것을 / 굳이 정리하여 / 쌓아두고 먼지 털고 / 닦고 심지어 자랑까지 하는세계이기 때문이다(잠지 자지 보지 엉덩이 똥 찌찌, 88). 이 세계에서 남들이 공들인 말로 제각기 / 멋진 탑을 쌓아 올리는 동안에도 / 나는 탑 주변만 배회한다(말로는 못 먹고 산다, 84).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 살아가(사랑은 남풍을 타고, 67),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은 / 잠지 자지 보지 엉덩이 똥 찌찌 / 같은 말뿐이다(잠지 자지 보지 엉덩이 똥 찌찌, 89). 고고보이속 화자들의 시심(詩心)저주인데, 기존의 시라는 지배적 관념과 불화하는 화자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말들이란 돈으로 환전이 불가능한 이상한(queer) 것들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시는 를 빈곤으로 몰아넣으며, 그 빈곤에 진절머리가 날 때면 멀쩡하고아름답다 여겨질 만한 진짜말들을 지절대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고고보이의 화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혹은 친구들의 입을 빌려 그 말을 간접적으로 발화하면서) 오히려 허접한 가짜 사랑과 로맨스를 고수한다(사랑은 없다, 48).

 

친구가 말했다 / 영원한 건 없지만 / 지나온 순간을 돌이켜 봤을 때 / 그것이 영원으로 느껴질 순 있다고 / () / 어깨 좁고 지질한데 이기적이기까지 한 저 남자가 / 내 애창곡을 흥얼거리자 / 삶은 이거면 충분하다는 생각 / 영원을 위한 낭만, 로맨스는 허접이 되고 / 진짜 낭만과 진짜 영원이 완성되는 순간이 온댄다 // 사실 그러나 나는 / 허접한 가짜 사랑과 로맨스가 필요하다 / 습관적으로 관계를 정의하고 가치를 말로 올려치며 / 둥둥 떠다니는 집에 나 / 살아야 한다 발도 못 딛는 가짜 바닥 / 가짜 조명 가짜 물고기 가짜 온돌 / 사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에 사랑을 느끼고 / 불행을 견딜 수 있다

― 「사랑은 없다(47-48)

 

자신의 사랑이란 거짓이자 가짜라고 짐짓 농담조로 투박하게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경계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뿐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거짓이라고 선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랑을 거짓으로 규정하는, 사랑을 둘러싼 규범 그 자체를 거짓으로 선언할 수 있다. 그러나 고고보이내 사랑이 거짓이면 네 사랑도 거짓이다라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으로 치닫지 않는다. 차라리 이 시집은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을 나누는 경계를 끊임없이 교란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듯 보인다. 예를 들면, 사랑은 없다에서의 허접한 가짜 사랑과 로맨스파트너에서 삶을 살아가며 / 완벽히 서로를 이해하고 / 행복하게 만드는 상대를 / 찾기야 원래 어렵다는 말은 거짓 / 그러나 있긴 있다는 말도 거짓 / . 버티기만 하기에는 / 삶은 짧고 / 투자 대비 성능 구린 거짓 / 중에서도 허접 거짓으로 변주된다(파트너, 107). 그런데 파트너는 이 투자 대비 성능 구린 () 허접 거짓을 추구하지 않는 것, 호감 있는 상대로부터 / 사랑 같은 게 싹트는 순간 / 만난 적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영영 / 만나지 않을 각오로 이별하는 것(진짜) 삶을 사는 지혜라고 이야기한 뒤, 곧바로 이것은 가짜로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미 우리가 온통 가짜인 세상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 가짜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 되는 것이라고 쓴다.


사랑은 없다파트너를 함께 읽을 때 새삼 도드라지는 것은 고고보이가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순간과 영원 등의 개념쌍을 끊임없이 저글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바로 이 지점에서 고고보이의 퀴어함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이를 간명하게 설명해 낼 재주가 나에게는 없으므로, 일단은 고고보이가 수행하는 이 개념-놀이가 결국 시라는 형식에 대한 물음으로 합류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나의 작은 기대를 고백하는 것으로 갈무리하려 한다. 인류의 생존과 관련해서라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시라지만(커피 한 잔), ‘우리=퀴어가 언어의 갱신을 포기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이 생각 끝에 나는 시인 한계의 다음 시집을 조금 기대하게 되었다.


?백종륜 

?옛날 소설 읽는 사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메일 : rainbowbookmark@hotmail.com   |   트위터 : @rainbowbookm 후원계좌 : 국민은행 061701-04-278263   |   예금주 : 이다현(무지개책갈피)
Copyright © 2018 무지개책갈피.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
Warning: Unknown: open(/host/home2/rainbowbookmark/html/new/data/session/sess_6529m5nkvc022lrrq180500dn4, O_RDWR) failed: Permission denied (13) in Unknown on line 0 Warning: Unknown: Failed to write session data (files). Please verify that the current setting of session.save_path is correct (/host/home2/rainbowbookmark/html/new/data/session) in Unknown on line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