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 거짓"과 함께 살기: 한계, 『고고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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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종륜 댓글 0건 작성일 20-06-24 23:04본문
?한계, 『고고보이』, 어패류, 2019
사랑에 대한 경구(警句, aphorism)는 좀처럼 낡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문장”(「자주」, 75) 따위.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다. 한계의 두 번째 시집 『고고보이』(어패류, 2019)는 예의 경구를 ‘당연한 상식’(「사업 아이템」)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감정의 길잡이, 특정한 감수성(만)을 자연스러운 것(the natural) 것으로 승인하고 유포하는 시(詩)라는 제도를 의심의 눈길로 쏘아본다. 그러나 서둘러 덧붙이건대 『고고보이』 속 화자들이 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양가적이다. 「자주」의 화자는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문장 / 하나에 평생 위로를 받으며” 사는 삶이란 “저 멍청한 / 멀쩡한 남자 여자”들의 것일 뿐, 자신은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오래된 문장 하나만으로 평생을 견뎌 낼 수 있는 “멀쩡한[straight]” 자들의 삶,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 삶을 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저주”다(「자주」, 75).
시에 대한 마음은 왜 자주 “저주”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몸 붙이고 살아가는 이 세계가 정말이지 “망해도 좋을 것 같은 허술한 세계”인 까닭이고(「사랑은 남풍을 타고」, 66), “쓸모없는 문장”으로 가득한 세계, “문장으로 정리할 필요가 없는 것을 / 굳이 정리하여 / 쌓아두고 먼지 털고 / 닦고 심지어 자랑까지 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잠지 자지 보지 엉덩이 똥 찌찌」, 88). 이 세계에서 “남들이 공들인 말로 제각기 / 멋진 탑을 쌓아 올리는 동안에도 / 나는 탑 주변만 배회”한다(「말로는 못 먹고 산다」, 84).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 살아가”며(「사랑은 남풍을 타고」, 67),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은 / 잠지 자지 보지 엉덩이 똥 찌찌 / 같은 말뿐”이다(「잠지 자지 보지 엉덩이 똥 찌찌」, 89). 『고고보이』 속 화자들의 시심(詩心)은 “저주”인데, 기존의 시라는 지배적 관념과 불화하는 화자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말들이란 돈으로 환전이 불가능한 이상한(queer) 것들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시는 ‘나’를 빈곤으로 몰아넣으며, 그 빈곤에 진절머리가 날 때면 “멀쩡하고” 아름답다 여겨질 만한 “진짜” 말들을 지절대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고고보이』의 화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혹은 친구들의 입을 빌려 그 말을 간접적으로 발화하면서) 오히려 “허접한 가짜 사랑과 로맨스”를 고수한다(「사랑은 없다」, 48).
친구가 말했다 / 영원한 건 없지만 / 지나온 순간을 돌이켜 봤을 때 / 그것이 영원으로 느껴질 순 있다고 / (…) / 어깨 좁고 지질한데 이기적이기까지 한 저 남자가 / 내 애창곡을 흥얼거리자 / 삶은 이거면 충분하다는 생각 / 영원을 위한 낭만, 로맨스는 허접이 되고 / 진짜 낭만과 진짜 영원이 완성되는 순간이 온댄다 // 사실 그러나 나는 / 허접한 가짜 사랑과 로맨스가 필요하다 / 습관적으로 관계를 정의하고 가치를 말로 올려치며 / 둥둥 떠다니는 집에 나 / 살아야 한다 발도 못 딛는 가짜 바닥 / 가짜 조명 가짜 물고기 가짜 온돌 / 사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에 사랑을 느끼고 / 불행을 견딜 수 있다
― 「사랑은 없다」 (47-48)
자신의 사랑이란 거짓이자 가짜라고 짐짓 농담조로 투박하게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경계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뿐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거짓이라고 선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랑을 거짓으로 규정하는, 사랑을 둘러싼 규범 그 자체를 거짓으로 선언할 수 있다. 그러나 『고고보이』는 ‘내 사랑이 거짓이면 네 사랑도 거짓이다’라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으로 치닫지 않는다. 차라리 이 시집은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을 나누는 경계를 끊임없이 교란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듯 보인다. 예를 들면, 「사랑은 없다」에서의 “허접한 가짜 사랑과 로맨스”는 「파트너」에서 “삶을 살아가며 / 완벽히 서로를 이해하고 / 행복하게 만드는 상대를 / 찾기야 원래 어렵다는 말은 거짓 / 그러나 있긴 있다는 말도 거짓 / 존.나 버티기만 하기에는 / 삶은 짧고 / 투자 대비 성능 구린 거짓 / 중에서도 허접 거짓”으로 변주된다(「파트너」, 107). 그런데 「파트너」는 이 “투자 대비 성능 구린 (…) 허접 거짓”을 추구하지 않는 것, 즉 “호감 있는 상대로부터 / 사랑 같은 게 싹트는 순간 / 만난 적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영영 / 만나지 않을 각오로 이별하는 것”이 (진짜) “삶을 사는 지혜”라고 이야기한 뒤, 곧바로 이것은 ‘가짜’로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미 우리가 온통 가짜인 세상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 가짜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 되는 것이라고 쓴다.
「사랑은 없다」와 「파트너」를 함께 읽을 때 새삼 도드라지는 것은 『고고보이』가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순간과 영원 등의 개념쌍을 끊임없이 저글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바로 이 지점에서 『고고보이』의 퀴어함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이를 간명하게 설명해 낼 재주가 나에게는 없으므로, 일단은 『고고보이』가 수행하는 이 개념-놀이가 결국 시라는 형식에 대한 물음으로 합류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나의 작은 기대를 고백하는 것으로 갈무리하려 한다. 인류의 생존과 관련해서라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시라지만(「커피 한 잔」), ‘우리=퀴어’가 언어의 갱신을 포기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이 생각 끝에 나는 시인 한계의 다음 시집을 조금 기대하게 되었다.
?백종륜
?옛날 소설 읽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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