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리뷰 : 아무에게나 선물해도 되는 시집 - 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다홍 댓글 0건 작성일 20-03-16 17:56본문
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
지난 4월, 황인찬 시인과 함께했던 창작 교실 <슬픔과 함께 웃으며 읽고 쓰기>를 진행했다. 벌써 1년이 되어가는 일이다. 그 후에도 2019 퀴어문학포럼에서 발제를 부탁드렸고, 연말 파티에서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제 벌써 3월 중순이고, 봄이 시작된 시점에서 지난 12월에 나온 시집을 신간이라 칭하기가 약간 머쓱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전전긍긍하며 몇 달에 걸쳐 시집을 완독하고, 리뷰를 쓰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이 있었다. 시를 쓰지 못하는 시간도, 시밖에 쓰지 못하는 시간도 징그러워서 시집을 펼쳤다가 덮기를 반복했다. 『사랑을 위한 되풀이』는 반복되는 '오래된 미래'와 어느 한 '장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가며 읽은 시집이었다. 어느 장면에선 운동장이, 어느 장면에선 여름의 한낮이, 어느 장면에선 책상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는 교실이 떠오른다. 그리고 슬프고 아름다운 문구가, 서로 반대쪽 손을 들고 있는 듯한 문장들이 나긋한 호흡으로 이어진다. 아래의 인용문은 익숙하면서도 매번 위로가 되는 신기한 구절이었다.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
- 「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 中
비주얼문예지 모티프(MOTIF) 3호에 실린 황인찬 시인의 에세이에서 언급된 경험들은 그를 '공식 퀴어 시인'으로 만들었다. '첫 커밍아웃 에세이'라는 홍보문구와 함께였다. 그리고 이번 리뷰에서 다루는 시집인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 실린 평론에서 (드디어) '동성애와의 관련성'이 언급된다. 시에서 비교적 직접적으로 퀴어를 읽어낸 작품으로는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와 「떡을 치고도 남은 것들」이 있다. 전자의 제목은 2017년에 열렸던 성소수자 촛불문화제의 표제에서 차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시편과 비교하면 조금은 감정이 실려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감정이 문장에서 시작되었는지, 독자인 나에게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읽었고, 복잡한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미처 글로 정리하지 못해 엉킨 실타래와 같은 감정을 곱씹어야 했다. 이런 경험을 혼자 하기는 아까워서 굳이 리뷰를 썼다. 전문적인 비평으로 이 작품을 깊게 분석할 실력도 없고 (사실 그 전문적인 비평도 퀴어 적인 면에서는 피상적인 접근에 그쳤다는 감상을 남기긴 했지만) 시를 읽고 느낀 점을 조리 있게 쓸 자신도 없었다. 그래도 권하는 말은 할 수 있으니까. "한 번 읽어보세요!" 하고.
나는 퀴어 문학으로서의 나의 시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의심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다. 퀴어인 내가 쓰는 시가 퀴어 문학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어쩐지 당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 「그런데 제 시가 퀴어 문학 맞나요: 질문은 있지만 답은 없는, 퀴어 문학의 쓰기와 읽기에 대하여」 中, 『2019 무지개책갈피 퀴어문학포럼 자료집』
조금 부끄럽지만, 남몰래 뿌듯해했던 일이 하나 있다. 2018년에 현대시학에 '퀴어 시'를 소개했던 일이었다. 황인찬 시인의 시집 『희지의 세계』에 실린 작품들을 퀴어 시로 소개한 적 있었고, 무지개책갈피에서 진행했던 팟캐스트 <무책임 라디오> 8화에서도 신나게 소개했던 바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동료(?)가 숨겨놓은 비밀 암호를 찾는 데 성공한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 실린 시를 읽으면 한 사람으로서, 퀴어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아무튼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남길 수 있는 문장들은 어떤 일관된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여러 장면으로 구성된 영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노랫소리라고 비유하고 싶었다. 고민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문장을 읽고 있으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가셨다. 어떤 문장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은 좋은 작품을 읽을 때마다 깊은 고마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사랑 같은 것은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리면 된다.
이 시집을 묶으며 자주 한 생각이었다.
- 시인의 말 中
리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글을 마치며, 시집을 읽으며 되뇌었던 생각 중 하나를 꺼내 보고자 한다. 사람이 타인을 대할 때, 그 타인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마음으로 느낀다면, 좀 더 서로를 너그러운 얼굴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피곤하다는 불평과 일말의 의무감도 들었다. 한 마디로, 마음이 복잡했다. 우리는 좀 더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결국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시집 리뷰, 너무 어렵다!
활동가 다홍
dalmoon422@naver.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