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 당신이 놀라게 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놀랄 수밖에 ? 구묘진, 『악어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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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난 댓글 0건 작성일 19-07-01 02:02본문
구묘진 저, 방철환 역, 『악어노트』(1994), 움직씨, 2019.
?1.
이 노트는 독자를 두 가지 위치에 노출시킨다. 하나는 ‘라즈拉子’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악어’의 세계이다. 우리는 주로 라즈의 세계에 있지만,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악어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라즈의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은 대학 졸업으로부터 시작해서 대학 시절을 지나 대학 졸업 후에 몽생을 만나고 달려가는 것으로 끝나는, 한 점이 밖으로 삐져나온 원형의 형태를 이룬다. 악어의 세계 속 시간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시작해 ‘악어의 달’을 지나 악어의 죽음(또는 죽음 직전)으로 끝나며 구불구불한 선 끝이 새카맣게 타고 있다. 두 가지 시퀀스가 병렬되어 현상해내는 몽타주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정말…… 정말 여러분을 좋아합니다”1).
2.
나는 이 노트를 하나의 편지로 가지고 있기로 했다. 이건 여러 번 고쳐 쓰게 될 답장이다.
악어는 때때로 그리운 사람 목록 한 장을 뽑아 들고, 그로부터 답신이 왔다는 상상을 하면서 다시 연서의 속편을 쓰기도 한다. (노트 4-2. 152쪽)
3.
버지니아 울프는 『올랜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억이란 재봉사다. 그것도 변덕스러운 재봉사다. 기억은 안으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오고 아래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가며 이쪽저쪽으로 재봉사의 바늘을 움직여 나간다. 우리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뒤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따라서 세상에는 가장 흔한 동작, 이를테면 테이블 앞에 앉는다든지, 잉크병을 끌어당긴다든지 하는 것들은 많은 다른 일을 떠오르게 할지도 모른다.”
어떤 기억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갑자기 현재의 나의 몸과 나의 동작을 결정짓는다. 가끔 이럴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현실로 닥쳐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몸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의심하고 지금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모르는 사이에 큰 소리로 울고, 큰 동작으로 넘어지고, 나 스스로를 큰 곤경에 빠뜨린다.
온갖 것들에게 위협받고 있다.
4.
그러나 갑자기 미소를 지을 때도 있다. 온갖 것들의 간지럽힘에 안심하면서.
5.
회신을 기대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새로운 피(프로이트는 리비도라고 했고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했던 것)를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빠져나가 창백해지고 감각마저 상실하게 될지라도.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말…… 정말.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의 편지란 어떤 전략적인 가치도 갖지 아니하며, 다만 표현적인(expressif) 것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영합적이라고나 할까(그러나 이 영합도 이해타산적인 것은 전혀 아닌, 헌신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 사람과 더불어 시도하는 것은 하나의 관계이지 교신이 아니다. 그런데 관계란 두 이미지를 함께 있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도처에 있으며, 당신의 이미지는 전부이다라고 베르테르는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로테에게 편지를 쓴다.2)
벼랑으로 향하는 검문소에서 네가 내 마음에 커다란 작용을 했어. 이 망망한 세상에서 그래도 유일한 한 사람,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지. (노트 5-3, 193쪽)
시간이 직진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때, 나는 당신의 편지를, 당신의 사랑을 반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6.
편지를 감추고 싶지 않아요. 편지를 도둑맞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도망칠래요?
아니. 당신은 단호히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7.
원형에서 삐져나온 점 속에서 달려가며 라즈가 말한다.
반드시 막겠다. (노트 8-8, 351쪽)
무엇을 막는가? 불타고 있는 선 끝의 배를?
8.
이제 대만에서 결혼할 수 있어요. 우리는 다른 위치로 갈 수 있어요. 기대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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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묘진 저, 방철환 역, 『악어노트』(1994), 움직씨, 2019, 353쪽. 이하 본고를 인용할 시 인용문 뒤 괄호 안에 각 노트의 번호와 쪽수를 표기한다. 예시: (노트 1-1, 15쪽)
2) 롤랑 바르트 저, 김희영 역, 「사랑의 편지」, 『사랑의 단상』(1977), 동문선, 2004, 232쪽.
신난
어제 저녁에는 천도복숭아를 다섯 개나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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