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리뷰 : 김려령 <트렁크> - 가장 평범한 이방인을 관찰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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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배 댓글 0건 작성일 15-07-14 18:07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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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창비, 201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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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발간, 김려령의 <트렁크>는 트렁크를 들고 홀연히 여행을 떠나는 소설이 아닙니다. 주인공 ‘인지’가 일하는 곳인 NM(New Marriage)은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비밀 자회사로, 회원들에게 아내와 남편을 기간제로 임대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일명 계약 결혼이죠. 결국 <트렁크>는 인지가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끝낼 때마다 여닫는 트렁크 안, 결혼과 사랑과 삶에 대한 비밀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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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계약 결혼을 마치고 회사에 돌아온 인지. 마지막 남편이 재계약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시 다섯 번째 결혼을 시작하는데요, 나름대로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는 인지의 앞에 능글맞은 스토커같은 남자 ‘엄태성’이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나-남편-엄태성-NM회사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언뜻 호러 스릴러물(!)을 연상시킬 만큼 지극히 ‘성인 소설’적입니다. 동시에 20대 후반 여성들이 쏟아내는 각각의 섹스론은 경쾌한 키치물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패자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분위기도 풍겨내면서, “김려령 성인소설”이라는 기묘한 마케팅 문구를 단번에 해독하기 어려울 만큼 혼합적인 서사를 보여줍니다. 작가의 전작 중 하나인 <완득이>에서 보았던 발랄한 문체를 벗어나지 않는데 내용은 섹스와 죽음을 다루면서 독자를 약간 헷갈리게 하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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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이 책에 약간의 불신(?)이 생길 때 즈음, 퀴어 서사가 튀어나옵니다. 먼저 인지와 절친 ‘시정’, 죽은 친구 ‘혜영’ 사이의 레즈비언 서사가 있는데, 일명 진성 이성애자인 인지에게 시정이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오고, 고등학교 때 시정과 혜영이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이성애자 화자의 ‘알고보니 절친이 레즈비언이고, 날 짝사랑해’라는 서사는 매우 뻔해 보이지만, 시정의 대응은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보여집니다. “단지 사랑하는 대상이 동성일 뿐인데, 특이한 제스처를 취한다던가, 독특한 취향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대부분은 눈치챌 수가 없어요. 시정은 아주 평범한 아이에요”라는 작가의 인터뷰*를 참고해 보면, 동성애자 시정을 일부러 소설 전체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정은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지도, 강요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죠. 다만 이 소설의 화자가 이성애자이다보니, 이성애 화자가 주위의 ‘가깝지만 먼’ 이방인으로서의 성소수자를 관찰(?)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고, 어쩔 수 없이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랑을 하는 사람, 대하기 다소 어려운 이방인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인지는 여자끼리의 섹스를 상상하지 못하며, 시정의 사랑을 (언제나) 안타깝고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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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극히 까다로운 독자인 제게 시정의 짝사랑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대학시절 인지의 연인이었던 남성 양성애자 선배 이야기였습니다. 국내에서 남성 양성애자 정체성이 나온 예가 거의 없기도 하고,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의 양성애자 차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거든요! (너무 짤막해서 아쉬울 정도.) 사실 가장 불만인 것은, 책에서 ‘양성애자’라는 단어를 분명히 명시하는데도 불구하고 포털의 모든 책소개에선 ‘게이’나 ‘동성애자’로만 묘사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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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즈비언 친구들과 양성애자 전남친을 둔 시정은, 이성애 결혼제도 안에서 (본인이 말하듯) 신개념 성노동을 수행하면서, ‘모든 사랑’을 적극적으로 응원합니다. 작가가 말한대로 이 소설은 결국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김려령의 <트렁크>를 읽으며, 우리의 사랑들을 볕에 보송하게 널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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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모두 꺼내어 볕에 널고 싶다. 누구라도 보송보송 잘 마른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사랑 때문에 우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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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소설이 딱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결말이 다소 생뚱맞더군요. 당신에겐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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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문화웹진 채널예스 인터뷰 : 김려령 “트렁크, 사실 버려도 되는 거잖아요” http://ch.yes24.com/Article/View/28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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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 @blueriox
퀴어문학 마니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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