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의 책장 : 퀴어문학‘들’의 정체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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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배 댓글 0건 작성일 15-05-14 19:22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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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책장 : 퀴어문학‘들’의 정체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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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책갈피가 부족하게나마 수집/분류한 퀴어문학으로 국내 장편소설이 100권 이상, 단편이 70편 이상 존재한다. 번역된 해외작품들은 너무 많아서 행방을 쫓아가기도 바쁘다. 매년 국내에서만 적어도 5권 이상의 퀴어문학 신간이 출간된다. 어느새 우리는 수백 권에 달하는 책들이, 각자 개성적이면서도 의미 있다고 주장하면서 꽂혀 있는 기묘한 책장을 갖게 됐다. 지금 우리의 책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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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퀴어문학은, 비장한 표정의 무사(武士)가 손에 쥔 라이벌가문의 가계도를 닮았다. 한 번 대화를 나누어보지도 않고 확정된,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증오. 언뜻 복수심과 분노의 악취를 풍기는 이 작품들 안에서, 우리는 ‘정상적인’ 인물을 ‘어둠의 세계’로 꼬여내는 역할을 맡는다. 우리는 아주 튈만큼 매력적이고(이건 좋아해야 하나?), 술이나 마약 아니면 섹스에 미쳐 살며, 비뚜름한 가정사 때문에 상처가 많다. 현명한 제3자라면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할, 지극히 사적(私的)인 이 호기심과 편견의 가계도는, 슬프게도 불과 얼마 전까지 퀴어문학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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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어떤 퀴어문학은, 유명구호단체의 돈 냄새나는 CF같다. 하얀 얼굴의 아름다운 연예인이 지저분한 흑인 기아소녀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그 뻔하디뻔한 명화(名?). 이 작품들은 ‘불쌍하고’ ‘힘든’ 세상 모든 성소수자를 구원하겠다는 복음주의적 서사를 자랑한다. 말 그대로, 자랑한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가 성소수자라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세상에 절망하다가 외로이 죽어간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아주 아름답고, 슬프고, 모두의 주목이 ‘필요한’ 것이 된다. 독자들은 ‘이런 사람들도 살아간다’는 비극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살만하다’는 자기위안을 찾는다. 물론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로 살아갈 때 맞닥뜨리는 구체적인 어려움은 분명히 존재하며,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체성찾기와 자기혐오에만 매몰된, 극히 불행하기만 한 성소수자 이야기는 지나치리만큼 많았고, 주로 작가의 선자적 사명감을 증명하는 데 활용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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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다른 퀴어문학은, 윤이형의 「루카」를 인용하자면, “죽음을 각오하고 폭포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새들의 절박함과 시리고 날카로운 열정이 아니라 생활이 만들어내는 무해하고 보드라운 거품들과 건강한 웃음이 더 많”은 이야기이다. 겸허한 작가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조심스레 펼쳐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퀴어한’ 우리로서, 현실적으로 절망하고 구체적으로 사랑하면서 힘껏 살아간다. 독자는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는 가면 쓴 광대를 지켜보는 대신, 풀밭에 마주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성소수자를 소재로 쓴 문학이 그 자체로 쿨하고 의미있던 시대는 지나갔다. (지나갔길 바란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기쁘게 읽을 수 있고, 우리들이 추천할 수 있는 책. 이 당연함이 가능한 작품은 슬프게도 많지 않지만, 2010년대 들어 눈에 띄게 늘면서 우리의 책장을 보다 무지갯빛으로 빛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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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배 @blueriox
퀴어문학 마니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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