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기 위해 ― 강석경,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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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칠월 댓글 2건 작성일 15-12-26 01:36본문
?이 작품은 필자가 리뷰한 여섯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001년 제8회 21세기문학상 대상 수상작,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
?시나리오 작가인 관에게는 세 명의 주변인이 있다. 관과 관계를 가진 후 임신하자 관에게 결혼을 압박하는 ‘O’, 끈질기게 관에게 ‘수작하는’ 닥터 박, 관과 결혼하고 이혼했으며 ‘회의(懷疑)의 남매’인 ‘재연’. O는 눈살이 찌푸려지도록 노골적인 미래를, 닥터 박은 무의미로 치부하고 싶은 과거를, 재연은 관이 살고자 하는 환상, 꿈을 상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관에게 압도적인 짜증을 느꼈다. 관이 미래도 과거도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는 재연을 뒤늦게, 그리고 마치 차선책처럼 사랑하지만, 재연은 관의 사랑을 불길에 던져 꿈으로부터 내쫓는다. 허공을 지켜보던 재연이 목도리를 풀어 불길 속으로 던졌다. (중략) 내 사랑을 너는 액처럼 태워 버리는구나.(45p)
?세 사람은 각기 관이라는 혼란을 몰이해 진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관에게는 두 경우만이 있다. ‘시나리오’ 속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 발붙이거나, 스스로가 ‘거세’되었다고 믿으며 무너지거나.
?그리고 이 짤막한 소개와 더불어?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해보는 것이 글의 진짜 목적이다. 급진적 여성해방주의자라고 자처하는 O가 관도 밉지는 않았다. (중략) 적어도 O는 요조숙녀인 체하지 않아서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여성해방주의자 O는 임신을 알리면서 돌변했다. (중략) 네가 결혼하지 않겠다면 혼자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했다. 생명주의자로 돌변한 O 앞에서 관은 파렴치한이 되었다.(39p) 과연 작가가 이 문장을 어떤 사유로 적은 것인지.
?나는 두 가지로 큰 방향을 잡았다. 하나는 작가가 1900년대 중후반 사회상이 드러나는 가치관을 가진 명예남성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O를 여성 이미지의 압축으로 삼아 희화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급진적 여성해방주의 이론에서는 결혼 제도에 대한 집단적 문제제기와 성적자기결정권 등의 신체자유를 외쳤다고 하는데, 막상 ‘성적 억압을 공개적으로 무시하겠다고 공언했다'는 O는 “네가 뿌린 생명에 책임을 져라”라고 말하며 관에게 결혼을 강요한다. 즉 작가가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결여했거나, O에게 몰이해의 성격을 주어 ‘나쁜’ 여성 캐릭터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작가가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때문에 당시 남성상을 관이라는 캐릭터로 만들어 질타한 것. 관에게 치우친 3인칭 서술에서는 그의 마구잡이 혼란과 회피성?심사문에서는 현대인의 그것으로 말해지는?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딸을 사랑하게 됐는데 그 엄마와 무의미하게 몇 번 잔 적이 있다고 사랑을 포기해야 하니? 인간은 본래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야. 성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든 실수하고 죄도 지을 수 있어. 경박해서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과거 때문에 미래까지 저당잡혀야 하나?”(40p)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의 거세된 시체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 역시 이 경우에 연결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둘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전자의 의구심이 단지 나의 공부가 부족해서 드는 것일지, 아니면 충분히 논의의 소지가 있는 것인지도. 그리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로 뒤에 실린 작가의 자선작 <물 속의 방>을 뒤늦게 읽고서야 아무래도 후자 쪽에 가깝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너무 아슬아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것은 아니다. 작가의 이 두 작품만을 가지고 작품 전반에 나타난 그의 가치관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적어도 이삼십여 년 전의 사회상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는 점은 결코 2015년의 독자에게 실이 되지 않았다.
?필자에게 페미니즘을 연결지어 글을 쓰는 것은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었고 하나의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식이 부족해 여러 자료를 참고했지만 단기간의 공부로는 모자란 점이 많을 것이다. 모르는 것은 아예 쓰지 않으려 했다. 고작 이만큼의 사고과정을 드러내는 일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관처럼 회피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의 지표를?기록으로 남겨둔다.
김칠월
삶에 댄 접착력이 아주 문득 강해져 나 이제는 이제는 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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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칠월님의 댓글
김칠월 작성일보배님. 이번 리뷰 여러모로 엉망이고 허술한 것 같은데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ㅜㅜ 네에. 표지의 사진이 작가분이세요!
보배님의 댓글
보배 작성일아직 읽어보지 않은 작품인데, 흥미롭습니다. 제시해주신 두 가지 방향을 참고해서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여성 작가분이 쓰신 거 맞죠? (물론 작가의 성별과 페미니즘은 무관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