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소리쳐 주세요, 윤이형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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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숙_ 댓글 0건 작성일 15-10-21 23:39본문
대신 소리쳐 주세요, 윤이형의 <절규>
사람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상처는 마음에 쌓이고, 어느 순간에는 절규가 된다. 절규는 시끄럽다. 누군가의 절규를 다른 사람들은 소음이라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타인의 절규에 담긴 상처를 온전히 알아차릴 수 없다. 절규는 그 자체로 날카롭다. 날카로운 것은 감싸 안기보다는 상처 입히기에 바쁘다. 절규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상처 입고 입히며 다가갈 수밖에 없다. 모두가 다 아는 그 초록창의 검색 결과에 따르면, '절규란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고 애타게 부르짖음'이라 했다. 비슷한 말은 열규라고. 그래서 괴로우면 그토록 열이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누군가는 절규한다. 비단 소설 속에 드러난 형태가 아니더라도, 누구의 마음속에든 절규는 존재한다. 속에 쌓인 절규는 마음을 긁고, 마음을 파내어 상처 입힌다. 그래서 '의뢰인'들은 아마도 카페 '절규'에 모였을 것이다.
대신 절규하는 값, 이십일만 원.
어떤 빛깔과 냄새와 무게의 고통이든 의식의 비용은 똑같았다. 21만 원. 그것은 서울 시내 산부인과에서 4주 반 정도 된 태아를 중절할 경우 드는 기본 비용의 평균치였다.
(157p, 첫 번째 문단 첫 번째 줄)
'꽉 움츠러든 성대가 꿈틀꿈틀 움직이는(158p)' 형태로 뱉어지는 절규를 듣고 대신 내질러 주는 값, 이십일만 원. 돈으로 환산했으되 돈으로 충족할 수 없는 연약한 치유가 이루어졌던 공간에서, 소설 속 사람들은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고 말한다. 스스로 울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에 대신 울어주는 것은 고귀한 희생임과 동시에 얄팍한 사기다. 만약에 필자가 실제로 그 카페를 마주쳤다면 아마 '뭐야 그런 이상한 것도 있네?'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필자의 절규는 아직 이십일만 원 어치에 못 미쳤던 모양이다. 혹은 필자에게는 아직 직접 절규할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악은 절규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렸거나.
어쨌거나 아직 상처를 드러내는 방법을 아는 이들은 온라인 공간에 모였고, 화자는 <혜안>과 함께 대신 절규한다. 최초의 절규는 혜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혜안이 떠나감으로써 종결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유대감이 존재했고, 또 일방적인 감정이 존재했고, 또 어느 정도는 비즈니스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정의는 176p 마지막 문단과 177p에 걸쳐 화자의 시야로 정의되어 있다. 그 관계는 식상한 듯 또 새롭다.
혜안은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던 자신의 사촌 동생이 울고 소리치고 온몸을 떨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중략) 혜안과 나는 서로를 이상한 청동 거울처럼 이용하는 사악한 흑마법사들에 불과했을까. 붙들고 소리치고 한 번도 우리에게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이들을 거울 위에 불러내, 목소리로 혹은 온몸으로 그 얼굴 위에 날 비린내 나는 것들을 퍼붓는. (중략) 하지만 입을 벌리고 있어도 그런 말은 결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소리치는 건 그렇게도 쉬웠는데.
(176p 마지막 문단 - 177p 첫 번째 문단)
필자는 '청동 거울'이라는 표현이 참 섬세한 상징이어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윤이형의 소설에서 필자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은 이러한 상징들이 상당히 감각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곱씹을수록 가슴 한구석으로 점점 파고드는 듯한 표현은, 이 소설에서 필자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다.
물론 그 외에도 매력적인 부분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저번에 리뷰 했던 윤이형의 <루카> 역시도 사람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었는데, 이번에 리뷰하는 <절규> 역시도 특유의 담담함이 매력적이다. 또, 하필이면 화자와 함께했던 여자의 이름이 '혜안'인 것도 어떠한 상징을 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혜안'은 화자에게 혜안을 통해 엿본 것과 같은 지혜, 혹은 혜안을 통해 엿본 것과도 같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남긴다.
절규하는 여자님, 님의 목소리는 그런 곳에만 쓰기에는 아까워요. 부디 건강하세요, 너무 탄식하지 마시고. 그러다가 후두에 이상이 생겨요.
(179p, 두 번째 문단 끝)
그건 화자에게 남기는 말이자, 독자에게 남기는 말이 아닐까. 당신의 목소리는 탄식하는 데만 쓰기에는 너무 아까워요. 그 말을 듣고 탄식을 멈추어주기를.
그러면 이제 약간의 쓴소리를 해보고자 한다. 어쨌거나 퀴어 시점의 리뷰이니. 이 소설에서 드러난 퀴어는 분명 주목할만한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일부는 너무나도 전형적인 퀴어다. 짧은 머리, 피어싱, 훤칠한 키 따위는 사실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동성애자 여자'의 형상에 가깝다. 기독교라는 요소와 연관되어 있는 점 또한 '교회로부터의 상처'라는 점에서 동일 선상의 지루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때로는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기 위한 장치가 오히려 몰입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 현실은 그렇게까지 철저한 논리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므로. 물론 윤이형은 혜안을 '남자'의 구실을 하는 인물로 그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혜안'은 반항하려고 일부러 자신이 사회를 통해 주입 받았던 전형적인 동성애자의 모습을 흉내 냈을 수도 있겠다. 이는 '혜안'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 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다.
뱀눈나비. 가끔씩 그 창백한 얼굴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파충류의 잔인하고 공허한 눈동자가 아니라, 험악한 세계를 견디기 위해 순한 나비가 제 날개에 새겨 넣은 커다란 가짜 눈동자였다.
(178p, 밑에서 6번째 줄-밑에서 3번째 줄)
그러니 사실 이 쓴소리는 까기 위해 깐다, 고 느껴질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필자가 굳이 이 부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의 다른 작품인 <루카>에서도 종교 때문인 갈등이 주요한 요소로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꽤 다수의 종교이며, 이래저래 영향력이 크고 막대한 권력을 가진 것은 맞지만, 글쎄. 굳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퀴어를 별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아 하더라. 그런 지점에서 그래도 '이유'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이던가. 형태도 없는 불신 속에 절규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점에서. 물론, 이렇든 저렇든 썩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 내일의 절규는 오늘의 절규보다 조금은 더 줄어들기를 바라며, 언젠가는 이십일만 원의 값을 치르고서라도 절규를 내뱉고 싶은 마음을 조심스럽게 내비쳐 본다. 언젠가는, '후두에 이상이 생겨요'를 전해 들을 수 있기를.
윤이형 씨의 소설을 즐겁게 본,
숙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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