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랑하는 아이야, 뭐가 진짜인지 너는 아니?”
예술과 성과 사랑,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지넷 윈터슨의 위험한 물음표들.
독실한 기독교도인 양부모 밑에서 자라며 열여섯 살에 레즈비언임을 깨달은 후,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스물다섯 살에 발표한 첫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로 휫브레드상 데뷔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한 지넷 윈터슨. 이후 30년 넘는 세월 동안 다양한 장르에서 종교?예술?성적 정체성 등을 소재로 글을 써온 그녀가 시 같기도 산문 같기도 한 소설 《예술과 거짓말》에서 선택한 소재 역시 그녀의 상상력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들이다. 피카소가 여자라면? 사포의 작품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헨델이 현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피카소?헨델?사포라는 거장들의 이름을 주인공 삼아 성의 전환을 소설의 한 소재로 삼은 지넷 윈터슨은 이 성별의 차이에 어마어마한 사회적 법률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윈터슨은 당연하게 통용되는 세상의 이치에 수많은 물음표를 던지며 그물망 같은 권력들이 더께처럼 굳어진 기존의 질서를 뒤흔든다. 예술과 거짓말의 영역에서 뚜렷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틈새의 진실을 찾기 위해, 윈터슨은 페미니즘과 문학, 성과 정체성, 가족 안에서의 성폭행, 종교음악과 거세, 아동성애 등의 날카로운 주제들을 그녀만의 대담하고 시적인 산문으로 유연하게 다룬다.
이 책의 주인공은 세 명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전직 신부이고 최고의 유방 절제술을 갖고 있는 암 전문의 헨델. 어려서부터 오빠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자살 기도 전력이 있으며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어두운 성격 탓이라고 말하는 가족과 절연하고 사는 화가 피카소, 고대 그리스의 레즈비언 시인으로 스스로를 호색가로 주장하며 ‘언어와 욕정의 결합’을 좇는 사포. 특히 윈터슨이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라고 말한 사포는, 철학과 예술과 성에 관한 질문과 모색을 공유하고자 한 작가의 의지를 가장 잘 대변하는 주인공이다. 시간을 초월한 근미래의 런던에서 이들 셋은 각자의 도시에서 도망쳐 같은 열차에 탑승하게 되고, 흥미로운 한 권의 책을 통해 서로에게 끌리게 된다.
세 명의 주인공 외에, 《예술과 거짓말》에는 윈터슨이 ‘어느 창녀의 철저하고 정직한 회고록’이라고 이름 붙인 흥미로운 책이 등장하는데,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어느 창녀의 철저하고 정직한 회고록>을 통해 우리는 18세기 창녀인 돌 스니어피스라는 여인의 황당무계한 연애를 엿보고, 언어가 치유능력을 갖는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이야기를 읽는 독자일 수도 있는 창녀 돌 스니어피스(스니어피스Sneerpiece라는 성姓 자체가 남자의 물건을 비웃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인형’이라는 의미의 이름 돌Doll과 충돌한다)는 전통적으로 남성이 차지한 전지적 화자와 독자의 역할 모두를 대체한다.
지넷 윈터슨은 특이하게도 이 책의 마지막에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깔리는 배경음악처럼 악보를 싣고 있다. 이 악보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의 화려하고 퇴폐적인 상류사회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장미의 기사>는 연상의 귀족부인이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17세의 젊은 미남귀족의 연애를 도와주는 이야기로서, 공연에서는 전통적으로 미남귀족 옥타비안 역을 메조소프라노 여성이 맡는다. 삼중창을 부르는 주연 세 명이 모두 여성이고 그중에 남자 역할을 하는 여성도 있는 셈이다. 윈터슨은 이 오페라의 유명한 ‘최후의 삼중창’에서 이 책의 구조적 모델을 따 왔다고 밝혔다.
음악 작품처럼 배열된 챕터들 속에서 윈터슨은 피카소?사포?헨델 세 사람이 돌아가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예술과 역사와 종교를 논하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고백하게 한다. 각자의 목소리를 갖고 있으나 그들의 테마는 우연인 듯 서로 얽힌다.
이 소설은 피카소와 사포와 헨델이라는 세 캐릭터가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사랑을 이야기 한 아름다운 미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을 찾아 미로를 더듬어 나가는 체험이다. 그러다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출발한 등장인물들이 한데 모이고 어지러운 이야기의 가닥들이 하나의 타래로 엮이는 순간, 퍼즐을 풀고 미로를 탈출하는 후련한 쾌감이 기다린다. 그리고 소설 전편에 걸쳐 세 명의 주인공을 태우고 어딘가로 질주하는 황금빛 열차의 마지막 목적지, 탁 트인 바다,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꿈꾸는 각자의 낙원, 그 자기만의 풍광에 다다른다. 얽히고설킨 플롯이 최후의 아름다운 삼중창에서 완벽한 조화를 찾는 오페라처럼 말이다.
그래서 독서의 여정을 끝마치면 “우리 모두 예술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술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진실이 주어질 때 그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짓말이다.”라는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 그대로 가슴에 와 닿는다. 발표하는 작품마다에서 삶의 심연에 덮여 있는 문제들을 과감히 끌어내어 빛을 비추고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넷 윈터슨의 과감한 시도가 또 한 번 빛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