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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기다리기』의 가장 첫 자리에 놓인 「남아 있는 마음」에서 ‘나’는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두 관계 안에 있다. 생활을 공유하는 반려가 되기를 원하지만 ‘폴리아모리’로서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너’, 생애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했을 정도로 깊이 마음을 나누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결렬”로 이제는 멀어져 SNS로만 조용히 일상을 지켜보는 ‘해인’. “어쩌면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복기가 필요한 것 아닐까”라는 자문에서 시작된 ‘들여다보기’는 과거의 해인과 현재의 ‘너’를 연결시킨다. “사귀는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을 SNS 계정에 올리고 지인들에게 ‘좋아요’를 받는” 아주 사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너’와의 교제와 남편과 맞잡은 손과 함께 “♡♥출산 임박♥♡”이라 게시하는 해인의 세계의 간극은 선명하지만, 그럼에도 ‘나’와 ‘너’는 모종의 이해로 나아간다.
이어지는 「사랑의 미래」는 무심하게 소수자의 삶을 바꿔버리는 거대한 세계 속 한 연인을 그린다. 일주년을 기념해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한 두 사람은 전염병이 만연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장면들을 맞닥뜨린다. 두 사람은 호텔로 향하는 택시에서 자연스럽게 “적당히 간격을 두고 떨어져 앉은 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정도로 서로에 대한 사랑을 “은닉”하는 데 익숙하지만, 현실 세계의 감시와 제재로부터 유리된 환대의 공간이라고 믿었던 호텔에서도 어떤 종류의 고독감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아득한 낙담에 빠진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이별한 뒤에야 스스로가 행한 “경계와 단속이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니었다는 걸─오히려 우리를 조금씩 상하게 만들었다는 걸” ‘나’는 아프게 실감한다.
「겨울의 끝」은 어쩐지 우스우면서 슬프고, 이윽고는 뭉클해지는 이야기이다. ‘나’는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한다. 엄마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건장한 남자친구를 데려와 같이 김장을 할 수도 있다는 말에 “그러게. 동성 결혼 만세다, 야”라고 말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나’에게 결혼은 언제 할 것인지 묻는다. 끝없이 반복되는 커밍아웃에 지친 ‘나’는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독백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달라지리라는 희망을 놓아버릴 수 없”기도 하다. 게이 아들과 엄마. 두 사람은 평행선 위에 있지만 ‘나’가 그저 “겨울이 떠나가는 풍경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 엄마를 보며 웃음을 짓고, 무언가를 실감하는 일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장면은 삶을 살아내는 작은 낙관의 힘을 일깨운다.
「우리 시대의 사랑」에서는 사랑을 할 때마다 늘 사랑의 끝에 대해 생각하는 ‘나’가 HIV감염인인 남자친구와 강릉으로 여행을 떠난다. HIV에 대한 몰이해와 무조건적인 혐오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며, 상대를 향한 염원은 더욱 강해진다. 그럼에도, 또는 그래서 높아지는 사랑의 밀도. 하지만 “설령 그 끝이 아득한 나락일지라도,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실감과 절망뿐일지라도…… 나는 너와 함께 살아가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었다”는 ‘나’의 독백은 쉽사리 발화되지 못한다.
「결혼식 가는 길」에서 ‘나’는 예술대학원에서 만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서로에 대한 연정을 함께 나누었던 류 선배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을 ‘쫓겨난 사람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강한 열망을 품었던 류 선배, 그의 결혼식으로 향하며 ‘나’는 어떤 시기의 끝에 대해 생각한다.
표제작인 「햇빛 기다리기」에서, 소설가인 ‘나’는 우울감과 무력감에 침잠해 있다. 사귄 지 팔백 일이 넘은 연인과의 관계는 위태롭다. 두 사람은 연말연시를 맞이해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 일출을 볼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일에서도 작은 갈등을 빚는다. 그런 와중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뉴스들, 차별금지법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들은 ‘나’를 더욱 지치게 할 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종내 진심이 담긴 한마디로 화해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랑의 확실한 감각’은 어둠 속에서도 찰나에 불과하지만 희미한 빛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희미하지만 삶을 이어나가도록 하는 희망의 기미는 「이 세상의 것」에서도 발견된다. 불현듯 떠나간 ‘친구’, 그리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불균형할지언정 서로에게 각각의 방식으로 의지하던 세 사람의 관계를 와해시킨다. 그러나 ‘나’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죽은 ‘친구’.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이 분명할 그이지만 “내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느낄 수 있는데, 나를 위로하는데, 어찌하여 이 세상 것이 아닌가, 이 세상 것이지” 하는 ‘나’의 인식은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은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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