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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문학동네 신인상 소설부문 당선작. <문학동네> 2018년도 가을호 수록.
2월의 마지막 날, 남편과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원진과 술을 마시던 ‘나’는 5월 연휴에 일본으로 떠날 비행기 표를 충동적으로 예매한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출발 보름 전 회사 일에 시달리느라 의욕이 다 떨어진 ‘나’는 3박 4일 동안의 모든 계획을 원진에게 떠넘기지만, 출발을 하루 앞두고 갑작스레 원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저로서는 도저히 소화해낼 수 없을 만치 빼곡한 원진의 일정표를 휴대폰에 담고서 혼자 여행을 다녀온다. 시간이 흘러 11월, 원진은 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고, 여행에서 잠시 스친 유코로부터는 서울에 올 일이 있으니 한번 만나자고 메일이 온다. 일주일 후, 그 사이 원진을 떠나보낸 ‘나’는 유코와의 자리에서 대책 없이 운다. 「작정기」는 대강 그런 이야기다.
‘나’가 울음을 터뜨리기까지의 사연은 이렇다. 여행의 첫째 날 밤 우연히 만난 유코와 함께 맥주를 마시던 작은 술집에서 둘은 옆자리의 한 남자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일본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로 처음 말을 걸어온 유코가 일본어를 모르는 ‘나’와 한국어를 모르는 남자의 대화를 이리저리 옮기는 동안 제 여정이 죽은 친구를 대신해 떠나온 것으로 오해되는 걸 ‘나’는 굳이 바로잡지 않는다. 레즈비언으로 암시된 ‘나’의 연심을 원진이 모른척했던 순간들에 들었던 그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고, 그러자 “가벼운 해방감”(349쪽)이 느껴졌기 때문이란다. 그 때문에 ‘나’는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자책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때문에 유코의 작은 위로에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대강 그런 사연이다.
-황현경 "작정(作庭)하길 작정(作定)하는 이야기"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