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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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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짠~ 댓글 3건 작성일 16-02-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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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A Single Man, 2009,?그 책,?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조동섭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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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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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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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king up begins with saying am and now. (잠에서 깰 때, 잠에서 깨자마자 맞는 그 순간, 그때에는 ‘있다’와 ‘지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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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번역할 때, 번역자는 ‘am’을 어떤 한국어 표현으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읽은 번역본에서는 ‘am’을 ‘있다’라고 번역해 놓았다. ‘있다’라는 말은 평범해서 별다른 연상이 일지 않는다. ‘존재한다’라고 했다면 의미는 구체화되었을지 몰라도 어감이 딱딱해졌을 것이다. 이 문장의 ‘am’은 ‘있다’의 일상적인 느낌과 ‘존재한다’의 의미를 포괄하면서도 독자에 따라서 배타적으로도 읽힐 수 있는 복합적인 표현일텐데, 이런 표현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을 찾기는 어렵다. ‘있다’는 알맞은 번역어가 아닌 것 같지만, 더 적합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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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의 ‘있다’와 ‘지금’, ‘나’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떠올린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첫 문단에 ‘있다’와 ‘지금’, 그리고 ‘나’는 코기토의 진행 순서대로 배치되어있다. 의식이 들면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그것이 느껴지는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 인지된다. 그런 후에야 천천히 ‘나’라는 것이 파악되고, 거기에서부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추론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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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라는 공간이 인식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느낌의 덩어리에서 ‘나’가 되고 기억과 감각의 뒤섞인 다발로 존재하다가 대뇌의 작용으로 의식과 겉모습이 알맞게 정리되어 마침내 사회적으로 적합한 형식을 갖춘 자아인 ‘조지’가 된다. 그렇게 ‘조지’가 된 후에야 조지는 집을 나서고, 녹나무거리를 벗어나며 고속도로를 통해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이 있는 대도시에 도착한다. 데카르트가 불확실한 것들 속에서 찾아낸 ‘존재’라는 단단한 발판을 디디고 세상을 연역해내듯, 이 소설은 가장 확실한 것-있다, 지금, 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 불확실한 것-조지, 집, 녹나무거리, 사회-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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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하루 동안 조지가 사회에서 겪는 갖가지 일들이 묘사되지만 그중 딱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16년간 동거한 조지의 애인 짐이 교통사고로 죽은 일이라든가, 짐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든가하는 주인공에게 중요한 변화를 준 사건들은 이미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일어난 것들이다. 그 일들은 오래 전에 종료된 채로 늘어진 여운만을 소설 안의 시간에 드리우고 조지는 속으로 남을 저주하고 징벌하는 상상을 하는 정도를 빼곤 대체로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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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조지’가 하루 동안 겪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성소수자로서 조지가 당하는 차별과 그로인한 불쾌감에 대해서도 말하며, 오랫동안 동거한 애인을 사별한 상실감을 묘사하지만, 이것들은 소설의 소재일뿐 주제가 아니다. 이 소설의 주제(주제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면)는 ‘있다’와 그것에 수반되는 ‘지금’이다. 이 소설은 눈을 뜨면서 시작되는 ‘있음’과 관상동맥이 막히며 뇌가 멈추게 되면서 ‘있음’이 끝나고 ‘지금’이 멎을 때 까지의 다양한 있음의 모습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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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동안의 벌어지는 조지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지는 죽음을 맞지만 벌어지는 사건들이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인 것도 아니다. 속도감을 부여하는 기승전결식의 구조가 없는 이 소설의 시간은 느릿하게 흐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형식은 보다 삶에 가깝다. 이야기에 가까운 삶이 아닌, 삶에 가까운 이야기. 어떤 커다란 서사의 단계로서의 시간들이 아니라 그 자체로의 ‘지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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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식이 활동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데카르트의 고립된 자아는 외롭다. 이 소설의 느릿한 시간에 짙게 배여 있는 정서도 외로움이다. 조지는 짐이 죽어서 외롭고, 박해하는 세상 때문에 외롭고, 이해받지 못해 외롭지만 반드시 그렇기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다. 조지는 짐이 죽지 않았어도, 세상에 의해 환영받는 존재였어도, 자신을 이해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있었어도 여전히 외로웠을 것이다. 조지가 처한 여러 상황들은 외로움의 부분적 원인이기도 하지만 외로움의 양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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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는 외로움을 몰아내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이어지는 ‘지금’들의 무의미함을 극복하려 삶에 목적과 이야기를 부여한다. 그런 노력은 얼마간 성공적일 수도 있다. 아찔한 것은 그런 시도들?틈에 벌어지는 공백이다. 이 소설은 그런 시도들이 모두 벗겨진 '지금'과 '있음'을 그린다. 이 소설이 삶을 닮아있다는 것은?그런 이유에서?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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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 디자이너 톰 포드의 영화 감독 데뷔작인 같은 이름의 영화가 유명하다. 사실 나는 영화를 먼저 봤다. 영화 [싱글맨]은 확실히 조지에 관한 영화다. 소설 [싱글맨]이 ‘있다’와 ‘지금’에 관한 작품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댓글목록

오르님의 댓글

오르 작성일

글 잘 읽었어요. 삶에 가까운 이야기라니 흥미로워요.

짠~님의 댓글

짠~ 작성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r /> 이런 글을 읽을 때 사르트르 [구토]의 한 부분이 떠오릅니다. 이야기를 닮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로캉탱의 일기중 토요일 정오에서 발췌했습니다.<br /> "한 인간은 늘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에 에워싸여 살고 있으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자신의 삶을 마치 이야기하듯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살 것인지, 이야기할 것인지를."<br />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대장치가 바뀌어 여러 사람들이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결코 발단이 일어나는 적이 없다. 하루하루는 아무 이유 없이 하루하루에 덧붙여진다.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단순한 덧셈이다."<br /> "이것이 산다는 것인데, 삶을 이야기할 때는 모든 것이 변한다... ...저런 몇마디의 말로 발단에 엄밀함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말이다."<br /> 감상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발췌부분은 이희영씨 번역입니다.)

오르님의 댓글

오르 작성일

덧붙여주신 글 고맙습니다! 다음 리뷰 쓸 때 참고가 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이야기를 위한 삶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여러 번 있어서 더 인상적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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