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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과 손, 김영하 단편 소설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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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모글토리 댓글 0건 작성일 15-09-22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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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호출≫ ,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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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을 넘기고 있던 일요일 오후 다섯 시, 열어둔 창문 너머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신음소리와 헷갈릴 만큼 가녀린 흐느낌은 점점 굵어지다가 갈라진 비명으로 바뀌었고 나는 그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마침 주인공이 자기 손을 망치로 내려친 부분을 읽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무슨 일인지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는 동안 책 속의 인물은 하얗게 드러난 뼈라느니 뭉개진 살갗에 대해 건조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습게도 살짝 왼손 손가락을 구부려봤다. 잘 있나 싶어서.

? 김영하의 소설 <손>은 화자 ‘나’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내용으로 한, 이십 페이지 남짓의 단편소설이다. 편지글답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흘러나오는데 전부 손에 관한 이야기다. 라 보엠 <그대의 찬 손>부터 시작해서 반지, 로댕의 조각, 손에 관한 역사적인 일화 등 손이라는 표제어를 중심으로 마인드맵처럼 가지가 곳곳으로 뻗는 느낌이다. 방향성 없이 튀는 이야기들은 마지막 순간에야 의미가 한 줄기로 관통하는데 그 중심선을 잇는 키워드가 바로 그 사람의 손, 당신의 손 그리고 나의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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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세요.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베토벤을 그이의 시선 아래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 그의 손이 제 목덜미에 와 닿는 것이었어요. 음이 흐트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연주에 열중하려고 애썼습니다. 제 목덜미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그이는 제 귀에 속삭였습니다. 계속 연주해줘. 멈추지 마.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요. 멈추지 않을게요. 그 사람의 손은 천천히 목덜미를 지나 쇄골을 더듬다가 제 젖무덤으로 내려왔어요.?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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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을 연주하던 나, 그리고 나를 연주하던 그. 그러나 그 사람의 손은 믿어달라고 했던 눈과는 달리 다른 여자도 연주하고 있었고 이제 ‘나’는 더 이상 눈을 믿지 않는다. 손을 믿는다. 그에 비해 눈을 보라는 말을 하지 않는 당신의 손은 혼란스러운 온도로 ‘나’를 위안해주었다고 말한다. 의장대의 총검술처럼 담배를 뽑아들던 손, 우아하고 색정적으로 ‘나’를 부르던 당신의 손짓을 화자는 기억한다.

? 이처럼 사람이나 상황을 묘사할 때도 온통 손에 관한 이야기뿐이라 장면들은 감각적이지만 어쩐지 모호하고 이 손이 그 손이었던가 싶게 정보들이 뭉텅뭉텅 잘려있다. 손 페티시처럼 줄곧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화자의 손과 관련된 ‘그 사건’에서 드러난다.

? 연극이 막을 내리던 날-비로소 당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게 된 그날 밤- 화자는 ‘나’를 연주했던,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던 그 여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난생 처음 자신의 손을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왼손 약지를 조이는 반지를 발견하고 빼보려 하지만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망치를 들어 자신의 손을 부숴버린다.

? 그렇다. 줄곧 그 사람(혹은 그이), 당신이라고 지칭했던 인물들이 여자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나 당신이라는 지칭에서 가볍게 남성이라고 넘겨짚었던 독자의 추론이 깨져버린다. 손 말고는 외모에 대한 묘사가 없었다는 사실이 반전으로 다가온다. 성적 지향을 판별하는 방법 중 하나로 손톱을 꼽을 만큼 레즈비언에게 있어서 손이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몸을 쓸어내리고. 어쩌면 눈보다 손이 더 깊은 곳까지 연인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가 자신의 손을 망치로 짓뭉갠 후 모든 관계의 끝을 선언한 것일 수도 있다.

? 그러나 손을 내리치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화자가 조각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종말이 아닌 완성의 의미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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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두 손가락이 뭉그러진 제 왼손을 조각할 거예요. 그 속에는 제가 그동안 탐해왔던 모든 손들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을 거라고 믿어요.?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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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겪었던 관계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던 행위는 사실 일련의 모든 상황, 감정을 수렴하는 폭발적인 자기표현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확대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오페라 라 보엠에서 <그대의 찬 손>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이며 망치로 부숴버린 손은 관계의 끝, 그리고 다시 완벽한 손을 조각하려는 행동은 재탄생과 완성을 의미하는 듯 느껴진다.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다각도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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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퀴어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반전이기 때문에 퀴어소설로 소개하는 것이 어쩐지 미안하다.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 라고 얘기해버린 듯한?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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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글토리

책, 영화, 드라마,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퀴어 작품들을 광적으로 소비하는 탐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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