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 북클럽 2기 4회차: 정해나, 〈요나단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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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지개책갈피 댓글 0건 작성일 23-06-14 16:42본문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이렇게 아깝지 않은 작품이 또 있을까? 선우, 의영, 다윗, 주영 모두 실제 세상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인 것만 같고, 이 작품은 그들의 삶 일부를 최선의 형태로 담아낸 것처럼 느껴졌다. 선우와 주영이가 다윗을 사랑하는 방식, 의영이 선우를 신경 쓰고 아끼는 방식, 다윗이 스스로의 삶의 모양을 선택해 나가는 방식 모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데, 또 어쩐지 현실에서 언젠가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기독교 집단과 퀴어는 대개 서로 적대적이지만, 어떤 퀴어 당사자에게는 종교가 삶에 있어 중요한 한 부분일 것이다. 선우도 그런 사람이다. 교회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한다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교회야말로 선우와 같은 아이들에게 안전한 공간이 되어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에 가자는 말이 폭력이 아닌 구원이 되려면, 기독교 내부의 인식이 많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퀴어를 혐오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아름다운 만화를 추천하고 싶다. / 조소민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었다. 마치 쓴 에스프레소를 꿀과 같이 마시는 기분이었다. 따뜻하지만 지나치게 쓰고 정말 달디 단 커피, 그렇게 마시고 잠 못 드는 것과 같이 조금은 속이 쓰렸다. 세 권이 한 세트라 책의 호흡이 조금 길었는데도 말이다. 책 속에서는 기독교 학교가 배경으로써 작용하기도 한다. 편견 때문이겠지만, 더더욱 책 속의 아이들이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더 마음이 아파오는 듯 했다. 책에서 유려하게 그려낸 선우라는 아이는 목소리가 좋고 부모님에 의해 ‘세상음악’은 듣지 못하도록 강요 받고 억압받는 삶, 그리고 어쩌면 세상, 혹은 교회에서 용인되고 허락되지 않을 감정들을 가진다는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아이를 내부에서부터 병들게 했을 것이다. 주인공 선우의 아픔이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그 상처를 회복하고자 노력할 때마다 너도 함께 그 사건을 이해하려 애쓰며 항상 선우와 그 친구들을 응원했다. 그것은 내 학창시절이 언뜻 생각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나의 선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 사과
한 번 읽고 나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선우와 의영, 다윗과 주영이의 이야기를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 사람이 좋고 소중한 마음에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려 하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말해지지도 못하는 곳으로 사진과 지난 시간만이 이 세계에 남은 채 비워졌다. 모두를 사랑하고자 하는 교인들의 기도 속에서 난감하고 붉어진 사람으로 살아왔던 다윗이 지옥이 아닌 천국에 있지 않는다면 직접 전할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주영이와 선우는 이 세상의 기도와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큰 사람, 믿을 수 있는 신의 울타리가 그의 곁에 없다면 비워진 다윗을 두 눈으로 보고 내가 그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서 다윗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싸우고 천국이 없어서 지옥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이상한 어른들의 눈가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우와 주영이는 다윗이 천국에 꼭 있어서 사랑받고 있다는 걸 믿어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다. 잊혀지지 않을 것 같던 다윗은 애석하게 그 자리에 멈춰 있었고 주영과 선우는 견디지 못했을 시간을 지나 여전히 그를 그리워한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건 아프고 힘들고 망망대해를 위태롭게 지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아프고 힘든 건 피하고 싶어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죽음과 사라짐은 그만큼 사랑이 필요한데 많이 외면하고 있다. 끝내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같이 울 수 있어서 경외롭고 다행스럽다. / 무름
최근 엄마와 동생에게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장례식장에서 모태신앙으로 평생 다니던 교회를 왜 그만두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다. 열아홉 살 때의 내가 생각 났다. 앞으로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하니 집사님과 전도사님이 기도실로 불러냈다. 두 분은 나에게 ‘주님의 뜻에 맞는 글을 쓰길’ 요구했다. 나는 ‘주님의 뜻’이 무어나 물었다. 그들은 단호한 목소리로 ‘동성애가 나오지 않는 글’이라고 대답했다.
〈요나단의 목소리〉 속 주인공 선우는 종교와 사랑, 그리고 자신의 존재 사이에서 갈등 중이다. 친구 다윗이를 만나고 그를 사랑하며 자신의 세상을 아프게 받아들여가는 과정이 전개된다.
다윗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짓말하며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는 해야 해. 내 진심을 누가 궁금해 해. 누가 이해해주고 무슨 처방을 내려주겠어. 같이 싸워준다더니 어디로 갔어. 난 거짓말이라도 해야 해.”(요나단의 목소리 2, 305-308)
선우는 자신이 딛고 선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신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우리의 사랑 중 어떤 것은 진실되고, 어떤 것은 거짓일 수 있을까. 누군가는 축복받고, 누군가는 죄인이 되는 세상에서 신은 왜 홀로 무결하게 우리를 내려다볼까. 선우가 겪은 일들은 내가 경험한 것과는 달랐지만 나는 선우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선우는 이야기 속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자신을 괴롭게 했던 굴레 몇몇을 스스로의 힘으로 넘어선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이 달라졌어도 그의 마음 어딘가엔 계속 빛바래지 않는 다윗이가 있다. 나도 이제 더는 열아홉이 아니지만, 열아홉의 내가 마음 속 한구석에 계속 남아 있다. 나는 선우처럼, 주영이처럼, 그리고 의영이처럼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나?
가족들은 나에게 ‘그래서 왜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느냐’고 계속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글쎄… 그냥 신앙이 없었어.” 이 이야기는 가족들이 알아듣기 쉬웠고, 복잡하고 머리 아프지 않았기에 그들은 아주 손쉽게 납득했다. / 아영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교회에 다니던 시간들을 기억해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부모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린이들을 떼어내 가장 앞에 있는 의자에 앉도록 했다. 그 자리에서 설교를 들은 내용을 받아 적어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성실하게 수행하다가 어느 날 주위의 친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각자 졸거나, 열심히 듣거나 하는 모습들. 그 모습들을 본 뒤로 설교 시간에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나는 설교를 적는 것 대신 다른 이야기들을 적기 시작했다. 뒷자리에 앉은 장로가 뭐라고 하기 전까지. 좋아하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내가 혼날까 그것도 그랬지만 그 아이에게 어떤 말이 전해질까 그것도 걱정 됐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나는 꿋꿋이 계속 썼다. 뭐라고 하면 당신도 설교를 듣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고, 왜 듣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냐고 말하자고 혼자 계획했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와 설교의 내용을 적절하게 섞어 썼다. 들켰는지 들키지 않았는지? 그것은 잘 모른다. 설교 시간에 좋아하는 사람의 눈썹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경할까? 들키면 안 될 만큼.
어린이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어른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한다. 설교에서는 듣지 못하는 사랑들이 있다고 그것들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 신난
세 권의 긴 책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오는데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그것보다 조금 덜 무거웠고 책 속 그림은 그것보다도 산뜻했다. 이 책은 목사 부부의 아들 선우와 그의 친구 의영에 관한 이야기다. 선우의 괴롭고도 찬란한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던 초, 중반부에서 결국 부모님께 커밍아웃하는 선우가 등장하는 후반부까지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러간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지금 생각해본다면 역시 선우가 부모님께 커밍아웃했을 때였던 것 같다. 책에서 선우는 아름다운 사람인 동시에 괴로운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죽다 살아난 선우가 부모님께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혔을 때, 커밍아웃한 이유는 둘째치고 그 순간만큼은 선우가 그 괴로움을 벗어던진 사람처럼 보였다. 내 주변에도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숨기며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일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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