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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의 <천국보다 낯선>에서 진짜 여자와 진짜 퀴어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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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빅뷰티 댓글 0건 작성일 15-09-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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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이장욱, 민음사, 2013.

 

이 글은 소설 『천국보다 낯선』에 감명 받아 쓰는 추천글이 아니다. 답답해서 쓰는 글이다. 전지적퀴어시점으로 이야기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꽁꽁 숨어있는 퀴어를 탐색해내려는 글이다. 『천국보다 낯선』이 '세 남녀의 이야기가 증발되는 낯선 결말'로 '新서사를 구축해냈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그러나 이 책에서 우선적으로 증발된 것은 실제적 여성과 레즈비언의 구체성이지 않냐며 반기를 들고, 작품의 서사는 바로 이 '은폐'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글이다. 수많은 한국 소설에서 증발된 (왜곡되지 않은) '여성'과 '레즈비언' 관계에 대해 목말라 쓰는 글이다.

 

『천국보다 낯선』은 서른셋의 대학 동창생 '정', '김', '최', '염'이 친구 'A'의 부고 소식을 접하면서 전개된다.  '정', '김' 부부의 차를 '최'가 얻어타고 가며 행로는 시작된다. 진눈깨비 휘날리는 밤에 장례식장이 있는 K시를 향해 어두운 도로를 달리며, 이들은 갖가지 해괴한 일들을 겪는다. 차량 추돌 사고에 휘말릴 뻔 하고,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긴 터널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가, 교통경찰의 기괴한 행동에 식겁하기도 한다. 급기야 네비게이션도 먹통이 된다. K시에 이 날 안으로 갈 수 있을지, 'A'의 영정사진을 마주할 수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천국보다 낯선』은 '로드 무비의 형식을 빌린 공포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다양한 장치로 긴장감을 선사하며 그 충실한 역할을 다 한다. 그러나 전지적퀴어시점에서 보자면, 불편한 지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작품은 각 장마다 시점을 전환한다. 등장인물들은 장마다 번갈아가며 일인칭 시점으로 화자의 역할을 맡는데, 독자는 이러한 구도로 同床異夢의 진실을 읽게 된다. 문제는 등장인물들이 'A'를 회상하는 방식, 나아가 작가가 'A'라는 인물을 구성하고 그려내는 방식이다. 

 

'정', '김', '최' 등 세 인물은 함께 있는 내내 각자 다른 방식으로 'A'를 회상한다. 대학시절 영화동아리에서 함께 수많은 영화를 보고, 논하고, 만들기도 했던 이들. 청춘을 함께한 만큼 서로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점은, 유독 'A'를 모른다는 것이다. 'A'와 어울리지 않았거나 갈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A'가 옆에 있어도 파악하기 힘든 대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A'는 '해독 불가능한 문자 같은 것…(중략)…말하자면 아랍어나 희랍어 같은 것…이해되지 않지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계(p.83)'였다. 또한 이들에게 'A'란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언제나 와전되는 중(p.124)'이며 '어딘지 무질서해 보였고 예측할 수 없었(p.106)'던 존재였다. 동창들 사이에서 'A'가 시민 단체에서 일한다, 영화판에 들어갔다, 대안 공동체에 들어갔다, 심지어는 수녀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 때에도 'A'는 '정말 그 모든 것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p.125)'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모를 수밖에 없다. 『천국보다 낯선』은, 이들이 'A'를 모르기 때문에, 'A'가 유령이나 안개처럼 흐릿하고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성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쉽게 끌리는 사람(p.83)'이라며 자백하듯 밝히는 '정'처럼 다른 인물들 또한 각기 다른 방식으로 'A'를 사랑해왔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A'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며 'A'와 거리를 유지해왔다. 불완전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대상. 이해할 수 없어서 더욱 강렬하게 끌리고, 사랑하게 되는 대상. 이러한 맥락으로, 'A'는 작품 전반에 걸쳐 대상화된다. 

 

'A'가 은유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는 궁극적 메시지라는 것을 독자가 간파하기란 어렵지 않다. 삶은 본래 'A'처럼 모호하고 불확실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니까. 다만 작가가 선택한 대상이 'A'라는 것. 'A'가 그려지는 방식이 진부하면서도 (대부분의 한국 문학에서 반복되어왔듯) 폭력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늘 조용하면서 어딘가 신비로운 여성, 아름답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여성, 끝내는 죽고 마는 결말로써 신격화된 여성. 이장욱이 그려낸 'A' 캐릭터는 한국 문학에 뻔질나게 등장한 위의 여성 캐릭터와 몹시 닮아있다.  'A'의 욕망, 'A'의 취향, 'A'의 사랑, 'A'가 생에서 꿈꾸는 것 등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된 것이 『천국보다 낯선』에는 없다. 'A'는 그저 모호하고 신비한 여성 그 자체다. 이러한 'A' 캐릭터는, 사실상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장욱이 그린 'A' 는 폭력적 클리셰다. 『천국보다 낯선』은 이 클리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장욱이 많은 청년 팬을 거느린 젊은 작가이기에 더더욱, 이 클리셰가 좀 게으르고 치사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것, 은폐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정'과 'A'의 레즈비언 관계다. 작품을 잃은 독자라면 섣불리 동의하지 못할 수 있다. 읽어내기가 쉽지 않으니까. 작가가 꽁꽁 숨겨놨거나, 또는 작가 본인마저 제 손끝에서 뻗어나온 이야기의 분명한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을 수 있으니까.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정'은 'A'를 사랑했으며 'A' 또한 '정'을 사랑했다. 'A'를 향한 '정'의 감정을 굉장히 형이상학적으로 그려낸 것, '정'에 대한 'A'의 진심을 몹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작가의 문학적 기법인지 이성애 중심주의적 은폐인지 분명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전지적퀴어시점으로 포착 가능한 것은, 두 인물이 상호 간에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동아리방에서, '정'은 'A'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그런데 그 진심이 상당히 추상적이다. 고백은 고백인데 손에 잡히지가 않는 고백이다. 내가 느끼기에 너는, '발음할 수 없는 외국의 문자들이 꽃처럼 피어올라 이룬 숲(p.83)'이다. '나는 그 숲을 산책하고 그 숲에 누워 안식을 취하고 그 숲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것(p.83)'이 좋다. 뭐, 이런 식이다. 이게 대체 무슨 고백인가. 아름답기는 하다. 허나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후에 그녀의 남자와 결혼까지 하는 사람이(!) 하는 고백치고는 몹시 아쉽다. 풋풋하긴 하나, 이것이 십 여 년 한 여자를 사랑한 '정'의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라는 점도 아쉽다. 레즈비언도 박력 있게 고백하고! 그냥 막 사귀고! 뽀뽀도 하고! 섹스도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차이면 접고 다른 사람 탐색할 수도 있는 건데 말이야. 그게 진짜 아름다운 건데 말이야.

 

그렇다면 'A'는 어땠을까. 전지적퀴어시점에서 추리해보자면, A는 자기포비아를 지닌 레즈비언 또는 바이섹슈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학시절 '정'의 고백을, 'A'는 굉장히 이성애중심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거절한다. '너의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며, 대학 신입생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p.84)'는 말에서는 포비아적인 시선이 발견되며 '하지만 나는 너의 곁을 스쳐 가는 강물일 뿐이다…그리스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흐르는 강물에 잠시 손을 담글 수 있지만,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는 손을 담글 수 없다'는 부분에서는 염세적 궤변론자의 태도가 엿보인다. 어쨌든 'A'는 '정'을 거절한 것이다. 이때문에 이들의 레즈비언 관계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훗날 'A'의 진심이 밝혀진다. 물론 'A'의 진심을 밝히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밝히지 않았다. 작가가 은폐한 진실 한 조각을, 독자는 퍼즐을 풀듯 찾아 맞추어야 한다. 

 

단서는 다큐멘터리다. 'A'는 죽기 며칠 전, 친구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다. '김', '최', '염' 세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이미지들의 난해한 연속. 그 다큐멘터리의 뜻을 이해한 사람이 오로지 '정' 혼자였다. 그 이미지들이 '정'과 'A' 두 사람의 이야기였으며, 'A'가 '정'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동시에 그것은 대학 시절 주고받았던 농담에 대한 'A'의 대답이기도 했다. 농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 친구가 길을 걷고 있었어. 그중 한 친구가 말했지.
"헤이, 신발 끈이 풀렸어."라고.
다른 사람이 "나도 알아"라고 대답했어.
(…)
그리고 몇 블록을 더 걸어갔는데 세 번째 친구가 나타났지.(p.179)

 

세 번째 친구가 뭐라고 말하면 이 농담이 완성될까? 대학 시절 네 사람은 이 농담을 완성하는 놀이에 빠져들었다. 여기에 '정'이 건넨 답은 다음과 같다. "헤이, 넌 신발 끈을 왜 목에 감고 있어?"(p.182) 모두들 멍한 표정을 지었을 뿐 아무도 이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독자에게 주어진 단서다. 신발 끈을 자살도구로 해석한 데서 읽히는 '정'의 레즈비언적 우울을, 'A'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A'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다큐멘터리를, 즉 자신과 '정', 두 사람의 관계를 제시한 것이다. 그것도 당사자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이미지의 연속―다큐멘터리라는 것으로 말이다. 신발 끈이 나에 대한 사랑의 은유라면, 나 또한 너를 사랑했다고. 어쩌면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천국보다 낯선' 형식의 작품으로 말이다.

 

빈곤한 상상력으로 여성의 육체성, 레즈비언 관계의 구체성을 제거한 데 따르는 정치적 책임이 비단 이 작품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어디 이 작품의 일만이겠는가. 또는 필자가 지적한 은폐의 지점이, 실은 작가가 고안해낸 고도의 숨은 그림 찾기일 수도 있다. 허나 퀴어가 그 숨은 한 조각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나는 이제 지겹다. 도저히 읽히지 않는 정체 모를 여자의 본심 읽어내기가…… 나는 이제 지루하다. 퀴어가 '진짜 이상한 존재, 그래서 숨겨야할 존재'로 다뤄지는 방식은 이제 식상하다. 나는 보고 싶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속시원히 밝히는 여자. 왜곡되지 않은 여자. 진짜 여자, 진짜 퀴어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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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뷰티(@sobigbeauty)

150cm, 74kg.

살찐, 아름다운, 플러스사이즈 활동가.

전신성형수술로 몸이 아닌 마음을 고쳐먹은 여자.

퀴어.

헬스트레이너인 애인과 동거 중. 애인에게 놀멍쉬멍 PT를 매일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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