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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단편 『에우로파』 ― 우리의 그림자가 앞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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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북극곰 댓글 0건 작성일 18-10-1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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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에우로파」,  『노랑무늬 영원』수록

문학과지성사, 2012


 



 내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한다. 

 생일 케익 촛불을 불며 소원을 빌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빌어온 소원은 줄곧 한 가지였다.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게 해주세요. 20년이 넘도록 꾸준하게 빌어왔지만 한낱 바람에 꺼져버리던 촛불은 끝내 그 소원을 이뤄주지 않았다. 소원의 힘으로 행복해지길 바랐던 이들 중 누구는 가족을 잃었고, 또 누구는 꿈을 잃었으며, 몇몇은 나를 떠나갔다. 결국 지독히도 이뤄지지 않던 내 소원을 통해 깨달은 건 한 가지 명료한 사실이다. 

 모두가 각자 몫의 불행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사람들은 그 명백한 사실을 알면서도 “유리 조각들이 촘촘히 흩어져 박힌 것 같은 침묵” 아래 각자의 불행을 솜씨 좋게 감췄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 소원을 포기한 지 오래다.


 <에우로파>의 ‘나’와 인아는 그 불행이 이미 각자의 몫을 초과하기 직전이다. 인아는 6년 간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마친 뒤 깊은 우울증을 겪었다. 다시 일어나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던 인아는 죽은 화분에서 핀 꽃처럼 기적같이 일어서 가수가 되었다. 한편 ‘나’는 남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여성이길 바라는 트랜스젠더이다. 인생을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살아가고 싶은 ‘나’는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회사원으로 살면서도, 인아와 밤산책을 나설 때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싶어한다. 그것이 하룻밤의 짧은 순간일지라도 말이다. 

 둘은 이러한 각자의 불행을 서로 공유하면서도 완전히 공유하지 않은 경계선의 관계에 서 있다. ‘나’는 인아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것을 알지만, 어떠한 폭력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인아는 ‘나’의 성 정체성을 알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다. 너무나 잘 알지만 완전히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관계. 깊지도, 얕지도 않은 그 관계 안에서 인아와 ‘나’는 무던한 듯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인아의 방을 나서기 전에 나는 묻는다.

그대로 잘 거야? 불 꺼줄까?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복종하듯 나는 스위치를 내린다. 인아의 단단하고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긴다. 다시 스위치를 올려 날카로운 불빛을 불러들이거나, 저 불분명한 어둠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나는 침착하게 억누른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침착하게 억누른 그 충동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나’는 왜 그 충동을 침착하게 억눌렀을까. 둘의 관계는 ‘나’와 인아 사이에 있는 어둠을 둘 중 누구도 깨지 않았기에 이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내’가 불을 켜서 인아의 불행을 캐묻고 비명을 지른다면, 인아 또한 ‘나’의 불행을 파해치고 소리칠 것이다. 서로의 불행을 파해치는 것과 그 불행을 알면서도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 무엇이 해피엔딩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그러나 확실한 건, 불행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고 추궁하지 않는 지금의 상태가 유지된다면 관계는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이 무던하게 말이다.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후리후리한 우리 그림자가 골목길 위로 앞서 걸어가는 것을 나는 지켜본다. 조그만 허밍으로 후렴부를 따라 부른다. 키를 낮게 잡았기 때문에 인아의 목소리는 높고 처연한 음역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노래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녀의 음성은 낮고 무겁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잃어버린 가족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한 번 놓친 꿈은 되찾기 힘들 것이며, 나를 떠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두 사람이 그랬듯, 함께 선 그림자가 앞서 걸어가는 것을 같이 지켜볼 사람이 있다면 불행을 조금 덜 수 있지 않을까. 극적인 행복은 아니지만, 낮고 무거운 인아의 음성처럼 잔잔하게 퍼지는 행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다음 생일 소원을 찾은 것 같다.




김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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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생각하고, 글쓰고, 연애하는 이상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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