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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문장 속 반짝이는 묘사, 아사노 아츠코 <분홍빛 손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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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모글토리 댓글 0건 작성일 15-07-21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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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빛 손톱 표지.jpg

아사노 아츠코, 《분홍빛 손톱》, 까멜레옹,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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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소설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조금 비극적인 냄새가 풍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절망, 쏟아질 비난에 대한 두려움, 다수와 다르다는 것에서 오는 괴리감. 퀴어를 소재로 하는 많은 작품들이 내뿜는 이 음험함 때문에 계속 읽다보면 자꾸만 기분이 찜찜하고 우울해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가끔은 간질간질하고 가슴 설레는 소설이 읽고 싶어진다. 그럴 때면 다시 펼쳐보고 싶어지는 책 《분홍빛 손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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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아츠코의 장편소설 《분홍빛 손톱》(2008)은 평범한 여고생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 다카토 루리의 특별한 일 년간을 담은?이야기다. 어느 날 방과 후 옥상으로 불려나간 루리는 세 명의 선배들에게 둘러싸인다. 불러낸 이유는 이전에 루리를 찾아온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너 내 남자친구랑 잤지?” 으르렁대며 사이좋게 따귀 한 대씩 주고받는 소녀들 주위로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신나게 모여들어 구경한다. 그리고 그 순간 돌연 옥상으로 올라온 한 소녀, 아야메 슈코.

루리는 이 까만 안경을 쓴 보기 드문 미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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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나이대의 다른 여자애들과 달리 엄격할 만큼 직선적이고 담백한 루리와 엉뚱하고 특이한 감수성을 지닌 슈코는 흘러다니는 소문들의 주인공이다.?내용은 다르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을 헤집어 놓는 공통적인 단어―평범과 이단. 소문을 따라 이어지는 마녀재판에 동성애자와 초능력자는 진절머리를 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문과 진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소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주체할 수 없이 술렁이는 마음, 아무렇지 않은 척 포개는 손, 귓불을 간질이는 귓속말. 읽는 사람까지 두근두근 긴장되는 상황을 전하는 어조는 의외로 담담하다. 대신 넘치지 않는 간결함 속에 반짝이는 묘사가 가득 들어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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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요. 왜 화를 내요?”

“화 안 냈어.”

“화났잖아요.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 화났어. 그것도 아주 많이.”

“왜요, 갑자기?”

슈코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동백 꽃잎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던 햇살이 슈코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빛나는 머리칼은 아련한 향기를 머금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격정이 잘 어울린다.????????????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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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꽃잎’처럼 절기에 따라 나뉜 장(章)마다 계절감이 뚜렷하다. 감각적이고 생명력이 느껴지는 묘사는 십대의 요동치는 마음을 생동감 있게 전달해준다. 게다가 주인공 루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때때로 주변 인물로 시점이 옮겨가기 때문에 그다지 길지 않은 작품 내에 많은 이야기를 빈틈없이 담고 있다.

여백이 있지만 불필요한 공백은 보이지 않는 짜임새, 부드럽고 둥근 문체, 읽는 사람까지 가슴 떨리는 심리묘사. 루리의 분홍빛 손톱처럼 은근한 아름다움을 가진,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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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글토리

책, 영화, 드라마, 만화 등?다양한 장르의 퀴어 작품들을 광적으로?소비하는 탐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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