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받지 못할 땅 위 꽃들의 몸부림 ? 정이현,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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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빼어날수 댓글 0건 작성일 16-04-19 02:19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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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그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린 꽃잎에 번성하는 목화진딧물의 냄새, 갓 말린 바다 냄새, 처녀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 냄새, 혀끝이 열리고 온몸이 아리아리해지는 냄새, 태초의 냄새. 세상의 모든 냄새. -무궁화.1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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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작가의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수록된 다섯 번째 단편 소설, 무궁화의 첫 시작은 ‘나’가 묘사하는 그녀의 냄새로 가득 차있다. 어딘지 아늑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는 묘사 속 ‘나’의 그녀. 하지만 그녀는 아이가 있는 유부녀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 역시 ‘나’를 사랑한다. 남들의 눈에 위험한 불륜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들에게 있어 이 이상의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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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쉽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을 가졌다. 귀를 드러내는 짧은 헤어스타일과 말간 피부는 해사한 소년 같아 뵈기도 했고, 활짝 웃을 때 드러나는 진분홍색 잇몸은 과년한 처녀의 그것 같기도 했다. 앞 머리칼은 톡 튀어나온 이마를 절반쯤 가리고 있었고 희고 마른 얼굴과 작은 몸피가 아이보리빛 터틀넥 스웨터 속에 마치 강보에 싸인 아가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무궁화.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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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을 고르라면 많은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이 부분을 짚지 않을까. 해사한, 이 짧은 단어 속에 ‘나’의 온갖 감정이 다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첫 인상은 은은하면서도 강렬했다. 머릿속에 아른아른 그려지는 그녀의 모습이 수채화빛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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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여성 동성애자 사이트의 정기 모임에서 만난 유부녀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 ‘나’. 행복과 위기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나날들. 그리고 어느날 갑작스레 사라진 그녀. 결국 그녀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까지 가는 데 성공했지만, 그 문을 열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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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집은 정말 비어 있는 것일까. 저절로 다리 힘이 풀린다. 남편. 그녀의 남편이 너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렇다면. 너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아내에게 애인이 있으며, 그 애인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남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추궁하고 분노하는 것 말고는. 짐승처럼 소리 지르고 가재도구를 부숴버리는 것 말고는. -무궁화.1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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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그녀를 찾지 못한다. 종종 함께이던 집에 영 혼자가 되어버린 ‘나’에게 남은 것은 공허감 뿐이다. 메마르다, 라는 말 밖에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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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대한민국 아래 숨 죽인 채 살아가는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의 차가운 시선이 두려워, 이 낯선 사회에서 어떻게든 숨어 보려는 누군가의 몸부림이 아닐까. 언젠가 그녀는 말했다. 결혼을 한 건,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야. 그 한 마디에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보게 된 느낌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더욱 사랑할지언정 절대로 탓하지 않는다. 사실 누가 그녀를 탓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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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변소 옆에는 왜, 벌레 먹은 분홍 꽃들이 피어 있을까.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다 말고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라꽃이라 그래. 하수구와 공중화장실은 국가에서 관리하니까. 저 꽃에선 어쩐지 지린내가 나는 것 같아. -무궁화.1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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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무궁화’의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여성의 성기 모양, 그리고 동시에 그들 자체가 될 수있다. 소설 속 무궁화는 아주 잠깐, ‘벌레 먹은 분홍 꽃’으로 묘사되어 나온다. 제목을 통해 그 꽃이 무궁화라는 것을 간신히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나’와 그녀가 무궁화를 향해 보내는 시선은 마냥 곱지 않다. 공중변소 옆에 피어있는, 벌레 먹은, 지린내가 나는 것 같은 분홍 꽃. 짧았던 둘의 대화는 내게 어쩐지 비극적으로 보였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고있어, 라고 말하는 듯한 담담하면서도 슬픈 그런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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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의 내용 중 대부분은 둘이 함께 있었던 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조금 몽환적인 분위기 속, 나른한 기분으로 침대 위 나란히 손 잡고 누워 있는 듯한 분위기. 하지만 그 안개같은 행복보다는 비극적인 두 송이 무궁화에 마음이 가는 것은 왜일까.
두 무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남는 것은 시큼한 냄새 뿐이라고. 결국 우리 모두가 한 송이 무궁화일 뿐이라고. 지금 이 순간도 어디에선가, 몇 송이 무궁화들이 몸부림치고 있을지 모른다. 살아가기 위해서. 환영받지 못할 세상 속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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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빼어날秀
19살. 나의 문학이 지구의 자화상이 될 때까지.
피드백은 늘 감사합니다:)
ask95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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