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생인가 - 김태웅 희곡 [이(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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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림 댓글 1건 작성일 16-04-13 22:57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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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웅, <이(爾) - 김태웅 희곡집 1>, (평민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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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 [이(爾)]의 ‘연산’과 ‘공길’은 생의 목적이 뚜렷한 이들이다. 연산은 ‘잊지 않기 위해’ 산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상기한다.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잊는 것은 생을 잃는 것이다. 연산은 어머니를 죽게 만든 사람들을 모조리 처단함으로써, 어머니의 적삼을 태움으로써 그녀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남는 것은 없다.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눈앞에, 손 위에 놓여있지 않다. 이미 사라져버린 뒤다.
? 그 형용할 수 없는 허망함을 연산은 녹수의 존재로 달래려 하지만, 애초의 녹수는 연산의 근본적인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슬픔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곧 잉태할 생명, 그로 인해 자신의 죽음 뒤에도 계속해서 존재할, 권력의 꽃. 녹수는 슬픔 너머 자신이 가져야만 할 것을 생각하기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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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연산의 거처.
연산은 버들가지로 공길의 등을 때린다.
공길, 눈을 가리고 있다./ 다른 방에서 녹수는 출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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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슬픔처럼 잡스러운 것이 없을 게다. 헌데 길아 나는 어이해 이리 서럽기만 하냐?
이(爾), 말해라. 아프다고, 제발 그만 두라고 말해보란 말이다.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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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길
마마, 마마가 들어옵니다. 내 살이 패이고 찢길 때 마마가 내 속으로 들어옵니다. 전 마마를 느낍니다. 더 세게 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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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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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제발 아프다고 말해, 이. 너도 아픈 게지? 나처럼 아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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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길
(눈가리개를 풀며) 미욱한 이놈 전한의 종입니다. 전가가 기꺼워하시는 것이 옳음이며 전하가 저어하시는 것이 거짓입니다.
전하는 이놈의 주인입니다. 마마가 없으면 이놈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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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네가 없으면 난? 난? 난 무엇이냐? (생략) (P.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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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길은 그런 연산의 빈틈을 파고든다. 그는 연산의 슬픔을 말이 아닌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인다. 자신의 매질이 공길에게 고통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연산은 그 가학적인 행위를 멈출 수 없다. 연산에게 공길은 자신의 슬픔 그 자체를 보듬어줄 수 있는 가장 태초의 인물이기에. 나의 슬픔을 고통으로라도 이해하려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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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길은 ‘나 자신을 위해’ 산다. ‘이(爾)’는 왕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말. 임금 연산이 광대 공길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단순한 문장으로 설명하기에는 단 한 글자에 담겨있는 무게가 가볍지 않다. 광대라는 미천한 신분으로 살았던 공길에게 연산이 불러주는 새로운 이름은 그에게 광명과도 같았으리라. ‘누군가의 무엇’으로 태어나는 순간, 난생 처음 나의 어깨 위에 어떤 의미가 내려앉는 순간은 짙은 의미로 새겨진다. 인생의 복선이 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공길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 연산의 이(爾)가 된 공길은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린다. 종4품의 벼슬, 비단 도포, 많은 우인들을 거느릴 수 있는 권력.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존재가 있다. 그는 바로 ‘장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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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
쳐라. 잃을 게 없는 나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으니 나를 쳐라. (P.71)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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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
근데, 길아, 지금이 낮이냐 밤이냐? (사이) 이렇게 앞이 안 보이니까 많은 게 보여. 네 마음이 보여. 밝고 환한 네 마음이 보여.
길아, 죽으면 더 많은 게 보이겠지?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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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이 ‘잊지 않기 위해’, 공길이 ‘나 자신을 위해’ 산다면 장생은 ‘벗어나기 위해’ 삶을 산다. 그러므로 장생은 연산과 공길, 병렬적으로 놓인 두 사람의 관계의 대척점이라고 볼 수 있다. 잃을 것이 없어서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는 장생의 말은 연산과 공길, 그리고 극 전체에 트리거가 된다. 가학적이면서도 극단적인, 서로에 대한 사랑. 끝끝내 추구해온 생의 목적과 그에 의한 소유욕. 그것들 모두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 작품 안에서 장생은 대신들에게 반정군의 서찰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로써?장생의 등장과 죽음, 그리고 연산에 대한 반정이 서로 맞물린다. 그로 인해 연산과 공길이 치열하게 지키려했던 삶은 순식간에 뒤집어져 버리고,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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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허허로이 웃다가) 인생 한바탕 꿈! 그 꿈이 왜 이리 아프기만 한 것이냐??자, 반겨줄 이 이제 아무도 없으니 나를 빨리 저 어둠 속으로 데려가다오.?탕진과 소진만이 나였으니 나를 어서. 한때 깜빡였던 불길이로. 바람 앞에?촛불이로. 다 탄 불길이로. 연기 같이 사라질 불꽃이로. 다 탔구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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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눈가리개로 자신의 눈을 가린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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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침내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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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의 마지막 장면은 벽사 의식가면을 쓰고 부정을 씻어내는 의식이다. 우인들이 가면을 쓰고 버들가지를 들고 나와 의식을 치른다. 그곳에 죽은 장생이 등장한다. 이는 마치 장생이 공길과 연산의 삶, 그리고?죽음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그래서 아무 것도 손에 쥐고 있지 않았던 장생이 그들의 부정을 씻는다. 이는 아마도 장생이 했던 선언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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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을 것이 없어서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는.?
? 결국,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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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 (o00itismi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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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젠더 판섹슈얼.
들키고 싶은 비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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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나무님의 댓글
나무 작성일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필력이 정말 좋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