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 값'에 가로 막히는 연대 - 전경린, 「백합의 벼랑길」 퀴어하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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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브 댓글 0건 작성일 16-04-09 06:54본문
전경린, 「백합의 벼랑길」, 『천사는 여기 머문다』, 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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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 값’에 가로 막히는?연대 - 전경린 「백합의 벼랑길」 퀴어하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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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의 단편작 「백합의 벼랑길」에는 동성연애 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층에 사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272).[1] “머리카락이 긴 여자”와 “머리카락이 짧고 늘 바지를 입는 여자”는 “번갈아가며 짐을 들고 번갈아가며 운전을” 한다 (272-3). 그리고 “번갈아가며 세탁도 하고 요리도” 할 것이라고 서술자는 추측한다 (273). 제목인 「백합의 벼랑길」이 제시하는 이미지와 더불어,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작품이 퀴어 프렌들리하게 읽힐 수 있는 이유가 이 두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전경린의 이 소설을 다른 관점에서 퀴어하게 읽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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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인물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나’이다. 이 글에서 ‘나’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취향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나’는 조곤조곤한 어투의 존칭을 사용하며 상대방을 ‘당신’이라고 칭한다. 햇빛 알레르기를 앓고 있고 하청을 받아 원고를 윤색하는 일을 한다. 계단참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나’의 특정된 젠더는 무엇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글을 읽는 내내 필자는 ‘나’의 젠더를 남성이라 인식했었다. 그러나 책의 뒷부분에 수록 되어 있는 서평에서는 너무 당연하게도 ‘나’를 여성 인물로 칭하고 있었다. 소위 ‘여성적 글쓰기’라고[2] 정의되는 특징적 문체 때문에 작중인물에 자연스럽게 ?‘디폴트 값’을 적용한 셈이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콘텐츠와 문학에 이와 같은 ‘디폴트 값’을 적용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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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백합의 벼랑길」은 서술자를 남성으로 인식하고 읽을 때에 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웃 사람들의 서늘한 시선을 받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내 이야기라도 쑥덕거렸는지 소리없이 앙글거리던 눈들을 화들짝 피”하고 (271), “이웃 주민들의 눈빛에서 새어나오던 질책” (275)에 익숙해 져야 하며, “봄이 일 년에 세 번 네 번 찾아온다 해도 꽃놀이 한번 못” 가는 (283) 것은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이다. “아내와 나 사이에서” (281) 갈팡질팡하는 ‘당신’의 모습은, 최근 이성과 결혼을 한 동성애자들을 향해 쏟아졌던 ‘탈반’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나’가 결국 ‘당신’에게 이별을 고한 뒤, 햇빛 알레르기를 극복하고 햇빛 속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전환치료를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과 맞물려 비판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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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인공 ‘나’에게 여성과 이성애라는 ‘디폴트 값’을 씌워버리는 순간,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영원히 소거된다. 작품 속의 동성연애자들은 “나를 가만히 놔둬요, 나도 당신들을 그대로 놔둘게요.” 라고 말하며(272), “외국인”이자 “서로 심판하지 않기 위해 더욱더 무관심해진 타인들”로 남게 되는 것이다(281). 물론, 기존의 사회질서에 편입되지 않는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퀴어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소수자 인권을 위해서는 다수와 연대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남대문 상가에서 만나나 여자가, ‘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순간적으로 나를 밀어내고 돌아서는 작은 도마뱀 같은 초록빛 시선”을 건네야 했던 이유는, ‘나’가 무의식적으로 적용하는 또는 관습에 의해 ‘나’에게 적용되는 ‘디폴트 값’ 때문은 아니었을까(281). 이들이 결국 연대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에 남아있어야 했던 이유는 ‘디폴트 값’의 폭력은 아닐까. 필자는 독자들에게 전경린의 이 소설뿐 아니라 많은 문학작품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퀴어하게’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처럼 ‘퀴어한’ 읽기를 통해 우리가 지금껏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규범들이 사실은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인지, 그러한 ‘디폴트 값’이 얼마나 많은 집단 간의 연대를 막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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