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소년을 자라나게 만든다 ? 성석제, <첫사랑> > 전지적 퀴어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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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소년을 자라나게 만든다 ? 성석제,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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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빼어날수 댓글 0건 작성일 16-05-17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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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jpg

 

 

흙먼지가 커다란 꽃처럼 피어올랐다. 빵공장에서 트럭들이 쏟아져나왔다. 트럭은 빵공장에서 나갈 때는 보름달 빵처럼 부풀었다가 돌아올 때는 러스크 빵처럼 납작해졌다. 길가로는 흰 머릿수건을 하고 하늘색 제복을 입은 처녀들이 소리 없이 지나다녔다. 정자나무 아래에 노인들이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었다. 매일이 똑같았다. 빵틀에서 똑같은 빵이 찍혀나오듯이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었다. 그리고 네가 따라오고 있었다. 매일 따라오는 네가. -첫사랑.71p

 

 성석제 작가의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 세 번째로 수록된 작품 첫사랑. 이 작품은 작가의 실제 유년 시절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속 ‘나’는 누구나가 어릴 적 느껴보았을 법한, 뚜렷하기보단 은은하고 낯설지 않은 향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시골 촌구석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나’와 그런 나에게 자꾸만 마음을 표현하는, 흔히 말해 학교의 실세인 ‘너’. 하지만 너와 달리 공부만 하는 샌님에 가까운 나는 너를 자꾸만 밀쳐내기만 한다. 하지만 결국 이별의 순간, 둘은 처음으로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작품속 ‘나’는 저가 사는 동네를 ‘지옥’이라고 표현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사는 이곳은 궁핍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유일한 혈육인 누나는 꼬박꼬박 나가는 공장에서 월급을 받지 못하고 매일 아침을 굶는다. 그나마 종종 학교에 나타나는 빵 실은 트럭은 급우들에게 치여 구경도 하지 못하고, 어느 날은 깡패의 말을 듣지 않아 얻어맞고 코피를 흘린다. ‘나’는 이 지옥같은 가난을 벗어날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독서실을 다닐 정도의 열의를 보이며 공부를 한다.

 

“이건 너 주려고 산 거야.”

너는 김이 나는 찐빵을 내밀었다. 너는 커다란 암소가 그려진 우유도 주문했다. 나는 허기가 져서 쓰러질 것 같았지만 먹지 않았다.

“먹어봐.”/“왜 나한테 이러는 거니.”

“그냥 주고 싶어.”/“난 네 부하가 아냐.”/“너 같은 부하는 필요없다.” -첫사랑.78p

 

 그런 나에게 ‘너’는 뜬금없고, 낯선 존재일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괴롭힐 만큼 덩치가 크고, 몸에는 또래들에겐 없는 털이_배랫나룻이나 겨드랑이 털 같은_있다. ‘너’는 또래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너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앞가림 못하는 한심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 ‘나’는 ‘너’에게 있어 특별하다. 또래들을 제지시킨 채 빵 봉지를 다섯 개 집게 해주거나_정말로 집지는 않는다_찐빵과 튀김을 사주기도 한다. 여자 목욕탕을 보여주기 위해 다리에 상처를 입고도 꿋꿋히 버티는 그 모습은 차라리 헌신에 가까울 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거부한다. 그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다르다’하고 거는 자기 세뇌에 가까워 보이는 모습이다. 나는 계속 공부를 해서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 해. 남들 괴롭히기나 하는 너와는 달라.

‘너’는 ‘나’에게 있어 벗어나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바로 그 처녀의 눈에 빠졌다. 놀람과 분노와 당혹감을 한껏 떠진 눈으로 총알처럼 쏘아보내던 눈빛. 희고 검은 부분의 경계선이 지금도 손으로 그릴 수 있을만큰 뚜렷한 그 눈. 둥그란 눈. 홉뜬 눈. -첫사랑.91p

 

 그리고 ‘나’의 삶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나가 평소에 흘끗거리던, 당시 또래 사이에서는 유명한 빵집 여자와 ‘너’가 정사를 치르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다름아닌 ‘너’의 예고대로였다. ‘나’가 그 여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너’는 그 여자를 먹어 보겠다는 속된 말과 함께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다. 안 가야지 하지만 결국 제일 아끼는 옷을 입고 ‘나’는 그 장소로 간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타인의 정사를 보게 된다. 그 안에는 ‘너’가 있었다. 나는 그 이후 연합고사를 칠 때까지 너를 일절 피하기 시작한다. 너 역시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잦아진다.

 

그날 이후 매일이 똑같았다. 나는 너를 상대하지 않았고 그 처녀는 중학생을 상대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서 도는 행성과 같았다. 너는 슬픔에 잠겨 네 멋대로 했고 나는 시름에 겨워 내 마음대로 했다. 너는 연합고사를 몇 주일 앞두고 퇴학을 당했고 나는 지옥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치렀다. -첫사랑.91p

 

 그리고 운명과도 같은 연합고사가 끝난다.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너’가 교실 창밖으로 보이고, 나는 달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절정에 달한다. 성석제 특유의 문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너는 외투를 벌렸다. 나는 네 품 안에 들어갔다.

“사랑한다.”

너는 나를 깊이 안았다.

“나도.”

지나가던 아이들이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옥의 빵공장에서 빵 트럭이 쏟아져나오고 딴 세상 바다에선 고래들이 펄쩍 뛰어오르던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사랑.93p  

 

 

 

 

by. 빼어날秀
19살. 나의 문학이 지구의 자화상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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