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도시, 추방에서 유폐로 ― 조해진 <북쪽 도시에 갔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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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악어새 댓글 1건 작성일 16-02-23 17:00본문
수록단편 <북쪽 도시에 갔었어>
조해진, 문학동네, 2014
(아무도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았지만) 고백하자면, 첫키스는 이불 속이었다. 따듯하고 포근한 이불과 이불속으로 들어오던 연한 햇빛이 기억난다. 날씨가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한낮인지라 이불속은 흐린 회색빛으로 환했다. 나는 그때 “이때쯤 종소리가 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때의 바깥 풍경을 기억할 수 없다. 이불속은 아주 좁고 따듯하고, 그리고 누군가와서 장난스럽게 손을 뻗으면 부서질수있을만큼 연약했다. 우리는 이불을 덮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이불이 벗겨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둘이 간신이 끌어안고 누울 수 있는 그 좁은 공간이 분리된 오후의 전부였다.
퀴어의 경험은 어떤 의미의 분리 혹은 ‘추방(43p)’들이다. 퀴어하지 않은 것들, 소위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로부터의 분리, 자신을 재정의하는 과정이 퀴어 경험의 출발점이 된다. 어떤 추방들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고 어떤 추방들은 독특함의 증거가 되기도 하며 자신의 프라이드가 되기도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특별히, 고통스럽게 추방된 두 남자가 등장한다. 연인인 K와 함께 누워 몸을 보듬을 공간이 없어 고시원에서 섹스를 하고 “개새끼들은 꺼져라” 라는 통보를 받은 주인공과, 연인이었던 남자로부터 소리 소문도 없이 추방당한 어쳐라는 남자가 그 둘이다. 둘에게 추방은 아주 고통스러웠고, 때문에 그들의 모든 삶을 추방당한 그 상처의 자리로 되돌아오게한다. 어쳐는 연인이었던 칼 박을 찾으러 한국에 와서 주인공을 만난다. 어쳐는 추방의 원인을 찾기 위해 한국의 여러 곳을 전전하지만 결국은 칼 박을 찾지 못한다. 몇 달 동안 한국을 헤매며 어쳐는 아마도 분리된 채 덩그러니 놓여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칼 박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한편 주인공 역시 상처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K와의 이별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가지 못한채 약간의 우울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새로 사귄 연인에게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고 여전히 K의 기억을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그들이 당한 추방이 그들에게 얼마나 급작스럽고 고통스러웠는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실은, 모든 사랑은 분리의 경험이다. 타인의 경험세계를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어쳐는 칼 박을 사랑했으나, 영어 한마디 하지 못하는 아시아계인 동양인이 캐나다에서 겪어온 경험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칼 박을 찾으러 한국으로 온 이후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여서, 어쳐가 만나는 한국의 풍경들은 모두 어쳐에게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는 K의 심경을 -아내와 자식들이 있고 남자와 함께 모텔에 들어가기 힘들어했으며 결국 산으로 올라가 동사하고 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이 가진 그 고유한 경험세계를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몇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실 추방되고 유폐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분리된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홉 살때 처음 느꼈어. 조금 이른 편이었지. 3일정도 내 방에서 한발자국도 안나갔어. 그 3일동안, 탈진하도록 춤을 췄고 너무 지치면 이온음료를 마셨지. 정말 긴 시간이었어”
(...)
우리는 이내 샌드위치 가게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고요하게 서로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정지된 시간이 기다렸다는 듯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단단한 막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우리의 일생이, 본적도 없고 들어본적도 없는 시간까지 섬세하게 교환되는 기분이었다, 그 때, 폐쇄된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이 열리면서 뚜벅뚜벅, 누군가 걸어나와 우리를 지나쳐갔다. 푸른눈의 아이였다. 몇 번의 탈진을 반복했을 아이의 얼굴은 3일사이 청년의 표정으로 바뀌어있었다. 밖에서 그애를 기다리고 있던 열두 살의 깡마른 소년이 아이의 손을 잡더니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이좋게 걸어가는 그들을 우리 역시 말없이 지켜보기만 할뿐, 불러세우지는 않았다. (48-49p)
어쳐는 결국 칼 박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찾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그는 칼 박을 찾기 위해 캐나다를 떠나 한국에 왔으며, 찾지 못함을 인정하고 한국을 떠났다. 추방은 어쳐를 움직이게 했고 다른 시간 혹은 다른 공간속으로 자신을 던질 수 있게 했다. 거기에는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사람이 있었다. 한 때 칼 박과 겹쳐봤을지 모르는 주인공에게서 새로운 mr.park을 보게 되고 난 후, 어쳐는 토론토로 돌아간다. 마침내 긴 외로움의 한 장을 끝내는 것이었다. 한편 어쳐가 돌아간 후 주인공은 K의 부고를 듣는다. 그리고 나서 토론토로 향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어쳐가 말해준 토론토 광장으로 가지 않고 다만 전화기를 들어 어쳐에게 전화를 건다. 간단한 안부인사를 건넨 후 전화는 끊어지고, 주인공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다. 주인공 역시 자신의 역사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곳은 갇혀있다고 생각하면 감옥이 되고 나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성이 되오.*” 어느 만화에서 들은 대사이다. 우리는 모두 추방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유폐의 역사이다. 분리의 어느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추방되었다고 여기고 고통 속에 자신을 멈춰 세운다. 유폐는 필요하다. 어쳐가 3일동안 춤을 추던 그 좁은방, 주인공과 K가 간신히 드나들던 고시원의 작은방은 스스로의 마음이 익어가는 공간이다. 하지만 추방이 고통스러운 날들에, 외로움이 자신을 죽이는 날들에, 우리는 한걸음을 나아서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 스스로를 유폐시킨 벽장 속에서 한걸음 걸어 나오는 것, 고통스런 기억을 갈무리하는 것, 상처 위에 예쁜 밴드를 붙여주는 것 등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일수 있다. 스스로를 어루만지는 일, 그리하여 모든 일의 마지막장, 춥고, 마치 인생의 끝인 것만 같은 북쪽도시에 다녀오는 일. 그곳에서 가만히 안부를 묻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일들 말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추방할 수 없어.”(52p)
*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6화
덧붙임> 나는 “소설은 일종의 ‘극복의지’”라는 말에 따라 이 책을 ‘추방’과 그것을 극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읽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우리에겐 가끔씩, 추방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마음의 안식만을 말하기엔 추방은 너무 잔인할 때가 있지 않던가.
악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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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님의 댓글
보배 작성일(진짜루) 잘 읽고 갑니다 <-지나가던 팬